한국사회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김영희가 쓴 <<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전국이 하나가 되었다
집집마다 라디오가 들어섰다. 서울과 부산과 광주와 춘천이 같은 시간,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듣는 것은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비로소 순간경험공동체가 되었다.
라디오는 전혀 다른 새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형성하며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유형과 문화 성격을 변화시켰다.
‘4장 일제 강점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145쪽.
라디오는 근대 국가에서 무엇인가?
발전과 변화의 중요한 동인이었다. 시공간을 넘어 국민을 하나로 묶고 호출하고 동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을 했는가?
일제 강점기 이래 국가의 중요한 정책 홍보 수단으로 활용됐다. 라디오 보급이 확대되면서 영향력이 점점 더 커졌다.
조선총독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정보와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고 식민지 체제에 조선인을 순응시키려는 교화 수단이었다.
라디오는 어떻게 활용되었나?
1926년 경성방송을 설립하고 1927년 라디오방송을 시작하면서 식민지 정책 홍보를 본격 진행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신 총동원 계획에 따라 라디오방송이 총독 당국의 대변인 노릇을 하게 된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자 전시 통제 체제 유지에 주도 역할을 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했는가?
불충분했다. 1933년까지 일본어 해독자가 7.81%에 불과했다. 일본어 위주 방송의 홍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해에 조선어 방송인 제2방송이 개설되었다.
조선어 방송은 성공했는가?
제2방송에서 3년간 ‘조선어강좌’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우리말에 대한 연구를 자극한 프로그램이다.
이율배반 현상이 일어난 것인가?
내선일체를 강요하고 조선어를 말살하려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의 의도와는 달리 라디오방송이 우리말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준 셈이다.
조선인에게 라디오는 어떤 경험이었나?
라디오 청취라는 생활습관이 생겼다. 상업에 활용되었고 가족 모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오락 수단이 되었다. 라디오를 매개로 한 대중문화 초기 현상도 나타났다.
해방 후 라디오방송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미군정기부터 제1공화국 시기까지 라디오 수신기가 서울을 중심으로 보급된다. 청취자들에게 라디오는 ‘문화의 첨단아’로서 새로운 소식을 가장 신속하게 전하는 뉴스 매체였다. 1950년 한국전쟁은 라디오 수요를 급증시킨다. 국내외 소식을 신속하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혜택 범위는 어디까지 미쳤나?
전국 단위 보급이 더뎌 수용자 폭이 넓지 않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라디오 청취자 수는 17만8026명이었는데 1949년 3월 말엔 14만4412명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청취자 수가 적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이 물러간 후 부품 공급이 원활치 않았다. 국내에서 라디오 수신기가 생산되지 않아 외국에서 들여오거나 불법 유출된 미 군수물자에 의존했다. 값이 비싸 보통 사람은 사기 힘들었다.
라디오로부터 가장 멀리 있던 사람은 누구인가?
농촌 지역 사람들이다. 소득 문제도 있지만 전기 공급도 문제였다.
이승만 정부의 라디오 보급 정책은 무엇이었나?
수신기가 전혀 보급되지 않은 농어촌 부락에 유선방송 시설을 설치했다. 가정에서 스피커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이른바 ‘앰프촌’을 조성했다. 1958년부터는 전기가 가설되지 않은 자연부락에 지역 방송국을 통해 트랜지스터라디오를 1대씩 무상으로 배부했다.
이승만 정부가 라디오 보급을 서둔 이유는 뭔가?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 정치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516 군사정부의 라디오 정책은 무엇이었나?
미디어를 근대화 추진의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인식했다. 경제개발계획의 홍보를 위해 라디오 보급을 적극 지원했다.
라디오가 빠르게 보급되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
상상의 전자공동체가 형성된다. 전국의 국민들이 매일 3~4시간 라디오를 접촉하면서 생긴 결과다. 청취율이 높았던 연속극과 한국 팀이나 선수가 참가한 국제스포츠 실황 중계를 통해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라디오라는 매체를 매개로 국민 다수가 같은 시간에 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전파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험이 시작되었다.
1960~1970년대를 ‘라디오 시기’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때부터 라디오가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갖는 미디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문에 의한 상상의 공동체가 공간의 제한을 받았다면, 라디오를 매개로 한 상상의 공동체는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도시와 농촌 생활의 장벽을 무너트린 게 라디오다.
라디오가 국민을 바꾼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을 전통적인 농업 중심 사회의 국민에서 근대 산업사회 성원으로 바꾸었다. 전파 매체가 형성한 보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당시 청취자들의 현실 인식과 가치관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청취자 대중의 탄생을 불러 온 매개였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영희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책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