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미디어 생활 9. 라디오
2652호 | 2015년 6월 25일 발행
한국전쟁과 미디어 생활 9/10 라디오
국영 라디오 방송의 비극
북쪽의 선전 방송을 믿는 국민은 없었지만 남쪽의 라디오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통령의 담화가 거짓으로 확인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그날 이후,
방송은 신뢰를 상실한다.
권력의 입이었을 뿐 대중의 귀가 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정부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거구기(擧口機)’ 공보 매체에 불과하던 국영 라디오 방송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을 버려두고 도망가는 정부의 거짓말까지 그대로 보도하게 된다. 허위 전황 방송은 국민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했다. 1951년 1월 부산으로 이동한 방송국은 “멸공의 적개심을 앙양하고” “후방의 결속을 고양하는” 전황 보도를 주된 역할로 삼았다. 전쟁이 해를 넘기자 국영 라디오는 전쟁에 지친 국민의 침울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아담하고 명랑성을 띠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코미디 프로그램 <유모어 소극장>, 퀴즈 프로그램 <천문만답>, 그리고 대중가요 프로그램이 이때 방송되었다. 환도 후 정부는 방송 재건을 위해 방송관리국을 공보처에 신설하고 <마음의 샘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청취자의 관심을 끄는 데 여전히 실패했다. |
당시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백야는, “내용이 국민이 요구하는 진실과 거리가 있어 국민에게 버림을 받는 것이며 … 북한의 거짓 선전 방송을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한민국 공보처의 방송도 국민에게 상당히 멀어지고 말았다”고 평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라디오는 주로 정치 선거 보도에서 정부의 홍위병으로 복무했다. 4·19를 겪으며 국영방송이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었고 방송의 중립화가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일각에서는 민영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중단되었다.
백미숙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중 “라디오 사회문화사”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