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타이포그래피
송성재가 쓴 <<한글 타이포그래피>>
욕심을 버려야 글자가 보인다
크게 굵게 눈에 확 띄는 색으로 한 자라도 더 적어야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글자는 싫어한다. 한글은 가늘수록, 여백이 넓을수록, 색이 침착할수록 잘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책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한글 타이포그래피다. 흔히 볼 수 있는 시각 문제나 현상을 통해 한글 활용과 이해에 다가간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타이포그래피 규칙을 설명한 책은 아니다.
타이포그래피가 무엇인가?
글자 다루는 기술이다. 활자나 폰트처럼 복제를 전제로 미리 만들어진 타이프를 주로 다룬다.
갈음할 우리말은 없나?
활자를 사용하던 때라면 활판술이 맞다. 활자를 조합해 긴 문장을 인쇄할 수 있도록 판을 짜는 기술이다. 지금은 활자가 모두 데이터로 바뀌어 컴퓨터에 저장된다. 자판을 두드리면 글자가 나오니 활판술은 맞지 않다. 적당한 말이 없어 타이포그래피라고 쓰는 것 같다.
글자를 소재로 하는 시각 작업을 모두 가리키는 용어인가?
요즘은 뭉뚱그려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상당수는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예술 영역의 작업을 타이포그래피라고 부르는 것을 본다. 주인이 문간방으로 밀린 느낌이다.
이 기술의 사회 사명은 무엇인가?
다양한 조건에서 최적의 읽기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타이포그래피가 좋은 것인가?
잘 들리고 쉽고 오래 남으면 좋은 말이다. 잘 보이고 읽기 편하고 깊이 들어오면 좋은 타이포그래피다.
핵심은 무엇인가?
가독성이다. 글을 효과적이고 빠르게 전달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무엇인가?
말에 억양·톤·음색이 있듯, 글자도 비슷하다. ‘개조심’, ‘불조심’을 벽에 적을 때, 전문가가 아니라도 대개 붉은 색이나 굵은 글자를 쓴다. 시각 뉘앙스 때문이다. 원고지에만 글을 쓴다면 글꼴은 필요 없다. 그러나 간판, 상품 패키지, 광고, 표지판 등 수많은 매체는 각각 제 목소리로 내야 한다.
책과 표지판, 또는 책과 또 다른 책에서 읽기의 조건은 어떻게 다른가?
책은 글자의 모양·굵기·공간 처리에서 광고나 표지판과 다르다. 책은 많은 분량을 오래 읽어야 하지만 표지판은 빨리 정확히 봐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과 과학책도 다르다. 소설은 편하게 빨리 봐야 하지만 과학책은 명확한 전달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글은 특정 시점에 특정인이 만들었다. 표음문자지만 한자 운용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한글은 초·중·종성 조합으로 만든다. 복잡하든 간단하든 같은 크기의 사각형 안에 디자인해야 한다. 이 경우 획의 방향과 밀도가 일정치 않아 명쾌하게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 양이 많을수록 읽기에도 영향을 준다. 이것이 약점이다. 그러나 영문보다 가로·세로 쓰기가 자유롭다. 강점이다.
모아쓰기가 가독성을 높이는가?
떨어뜨린다. ㄱ은 놓이는 위치에 따라 모양과 비례가 수시로 바뀐다. 외국인은 같은 글자로 보기 어렵다. 한글의 낱글자 모양은 수백 가지고, 조합된 글자는 수천 가지다. 당연히 읽는 속도와 눈의 피로에 영향을 미친다.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로쓰기에 적합한 글자 개발이 필요하다. 글자 내부 밀도를 균일하게 하고, 자간·행간 조정을 통해 문장을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불필요한 띄어쓰기 공간은 디자이너의 과제다.
외국인은 모아쓰는 한글에서 재미와 예술성을 찾지 않는가?
아름답다. 패션이나 디자인 상품에 활용되는 사례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서체 개발에는 결정적 어려움이다. 무분별한 영문 서체 사용에 빌미를 준다.
지금 쓰는 한글 서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옥원중회연이나 오륜행실도 같은 고서체에서 발전했다. 본문 글꼴은 대략 궁서체와 명조체로 나뉜다. 명조 계열 모체는 1930년대 활자 조각가 박경서가 개발한 신문용 서체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대 최정호가 서체 원도를 그렸다. 오늘날 사용하는 명조체, 고딕체의 직접 원형이다.
서체 개발이 어렵다는 주장은 근거 있는 불평인가?
영문에 비해 데이터 양이 많다. 만들기도 힘들고, 영문자처럼 글자 하나하나의 간격이 조정되지 않아 조판 지면이 유려하지 않다. 특히 띄어쓰기는 문법과 기술 적용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띄어쓰기가 뭐가 문제인가?
빈 공간이 너무 많이 보인다. 가로쓰기에서는 글의 흐름도 자주 끊는다. 많은 서체가 글자 간격을 좁혀 조판해도 띄어쓰기 공간은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넓게 보인다.
당신은 대안이 있는가?
띄어쓰기 공간을 획기적으로 좁히는 것이다. 영문에서는 W와 I가 만드는 폭의 차이를 상관하지 않는다. 한글에서도 글자와 띄어쓰기 폭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글자의 가로 폭은 세로쓰기에서만 의미 있다. 영미권 출판물은 마침표 다음에 띄어쓰기 없이 다음 문장을 시작한다. 가끔은 디자인에 문법을 들이대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가로쓰기는 한글 서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가로쓰기의 영향은 거의 없다. 원래 한글은 세로든 가로든 방향에 제약 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로쓰는 신문 지면은 세로쓸 때보다 좋아진 것인가?
지면이 아주 엉성해졌다. 세로 조판은 조밀하고 탄탄했다. 가로 조판은 빈 공간 처리 원칙이나 감각 대안을 찾지 못했다. 서체 디자인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결과는 명쾌하지 않다.
손글씨도 세로쓰는 것과 가로쓰는 것의 차이가 있나?
지금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가로쓰기만 보았다. 다양한 필기도구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의 글씨는 전 세대와 많이 다른 것 같다. 세로획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서체, 또는 폰트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디지털 서체는 폰트라 부른다. 폰트는 한 가지 통일된 형태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글자와 기호 한 벌을 말한다. 최근에는 서체를 폰트로 부른다. 서체는 컴퓨터에 데이터로 저장된다. 서체 디자인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 글자씩 그린 다음 정해진 디지털 테이블에 넣는다. 그러면 워드프로세스나 문서작성 프로그램에서 글자로 표현된다.
서적과 신문에 사용하는 본문용 한글 서체의 특징은 무엇인가?
붓글씨 특징을 보인다. 붓이 주요 필기도구였기 때문에 붓 가는 대로 글자를 썼다. 한자 영향을 받았다.
간판 서체의 사정은 어떤가?
간판 만드는 사람이 적절한 서체를 고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서체 자체 수준도 문제다. 최근 간판 개선 사업을 통해 글자를 입체로 정리한 것은 더 문제다. 가독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글자는 크고, 굵고, 색깔이 들어가야 눈에 띈다고 믿는 점포주나 건물주의 생각도 큰 걸림돌이다.
무엇이 간판을 더 잘 보이게 하는가?
글자는 주위에 빈 공간이 넓어야 잘 보인다. 한글은 획이 가늘어야 더 잘 읽힌다. 색은 글자보다 배경에 넣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장사도 중요하지만 간판은 문화다.
캘리그래피는 타이포그래피와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나?
캘리그래피는 손으로 쓰는 글자다. 타이포그래피는 미리 그려 둔 글자를 기계로 구현한다. 의미 표현의 목적은 같지만 용도가 다르다. 타이포그래피의 본류는 문장과 글이며, 글자의 생산과 복제다. 캘리그래피의 생명은 일회·일품이다.
한글 글꼴 개발자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글 글꼴 개발이 양과 질로 난제인 것은 맞지만 좋은 도구가 많아졌다. 글꼴 회사나 디자이너는 새로운 본문 글꼴, 가로쓰기에 알맞은 조판 원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일반인도 쉽게 나오는 값싼 결과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한글 서체를 응원할 방법은 무엇인가?
서체는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노력과 독창성을 작곡이나 음원과 비교하면 대단히 불공평하다. 노래처럼 선택 사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호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개발 노력에 적절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는 필요하다. 개인·출판사·기업이 좋은 서체를 구분해 사용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인식도 중요하다.
누구를 위해 이 책을 썼나?
한글에 관심 있는 사람, 한글을 의미 전달의 이미지로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타이포그래피를 예술 작품이나 그림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도 자극이 될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송성재다. 호서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