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씨연대기
지만지한국희곡선집출간특집 6. 분단에 대한 이성의 관찰
황석영의 소설을 김석만과 오인두가 각색한 ≪한씨연대기≫
아버지, 내복 갈아입으셨나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분단은 너무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다. 월남하는 아버지는 말한다. 내복 갈아입기 전에 돌아온다고. 60년이 지났다.
한창빈: 아버지!
창빈 엄마: 여보!
한영덕: 에미나이, 거 정말 말 안 듣네 기래. 며칠 후면 돌아올 거인데, 괘난히 나가 고생할 거야 없디 않갔어?
창빈 엄마: 어케 생짜로 헤어집네까?
한영덕: 좋아, 그럼 난 안 가가서. 폐양 집으로 돌아가자우. (돌아가려 하자)
창빈 엄마: (말리며) 그럼, 저 사람들이 그냥 놔둘 것 같습네까?
한영덕: 죽으면 나 혼자 죽지 않간? (사이)
창빈 엄마: (눈물을 참으며) 그럼, 창빈이나 데빌고 가시라우요.
한창빈: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아바지!
한영덕: (사이) 내복 갈아입기 전에 돌아올 거요.
한창빈: (남게 된 어머니를 이별하며) 오마니!
창빈 엄마: 창빈아!
(이들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창빈이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창빈 엄마: 창빈아!
한창빈: 오마니! (사이. 갈등하다가 아버지에게) 에이, 못 가갔시오. 아바지 혼자 가시라우요. 전 오마니하고 남갔시오.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한씨연대기≫, 황석영 소설/김석만·오인두 희곡, 38∼39쪽
어떤 장면인가?
제7장, ‘피난’의 한 장면이다. 주제를 잘 반영한 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가족이 부서지는 것인가?
주인공 한영덕이 한겨울, 대동강에서 가족과 헤어지며 내뱉는 한마디가 특히 중요하다. “내복 갈아입기 전에 돌아올 거요.” 가장 뭉클한 대목이다.
아직 내복을 갈아입지 못한 것인가?
계절이 바뀌면 돌아올 줄 알았던 영덕의 예상과 달리 아직도 우리는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다.
주제는 ‘분단의 아픔’인가?
그렇다. 분단이 한 개인과 한 가족에게 미친 영향을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고 산다. 우리 삶은 냉전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었다. 그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황석영의 소설로 희곡을 쓴 이유는 뭔가?
1974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10년 만인 1983년에 돌아왔다.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걸 실감하는데, 돌아와 보니 아무도 분단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 듯했다. 놀랐다. 내 삶에 그토록 영향을 미친 분단이 마치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에 있었던 아득한 옛날 일처럼 여겨지는 듯싶었다. 미국에 가기 전에 읽었던 황석영의 소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무엇을 각색했나?
분단의 기원,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취한 입장, 전후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 상황이다. 작품의 시대 배경을 다큐멘터리로 창작해 서사적 장면을 새로 도입했다. 한영덕에 얽힌 이야기는 압축하고 생략해 간결한 서사를 만들었다.
브레히트 방법론인가?
그랬다. 장면을 해설하고, 장면 이름을 적은 차트를 등장시켰다. 다큐멘터리를 삽입하고 장면을 생략했으며, 공간을 다발적으로 분할하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서사극 기법을 사용했다.
서사극의 효과는 무엇인가?
서사극 기법은 관객들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장면이 제공하는 정서를 통해 색다를 인식을 하도록 만든다.
당신이 만든 어떤 장면이 그런가?
피난 장면은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관객이 피난 가는 가족의 고통을 천천히 목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관객은 한 가족에게 슬프고 가슴 아픈 고난을 안겨 준 국제 정세에 대한 분노를 깨닫게 된다.
초연이 1985년이었나?
그해 4월 24일부터 5월 6일까지 문예회관 소극장, 지금의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했다.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이어서 분단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는데 공연할 수 있었던 일은 놀랍기만 하다.
문성근이 주연이었나?
초연 때 주인공 한영덕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문성근이었다. 그때 배우 문성근 일가 4대가 극장을 찾은 일이 있었다. 문성근 씨 아내와 딸, 부모인 문익환 목사 내외, 조부모인 문재린 할아버님, 김신묵 할머님이 함께 공연을 본 것이다. 당시 우리 배우들은 공연을 마치고 관객보다 먼저 로비에 나가 돌아가는 관객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4대를 함께 관객으로 맞은 배우들이 무척 감동했다.
공연 평이 좋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놀랍고 신선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가수 조영남이 공연을 보고 “많은 연극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이런 시도를 해 왔다. 그러나 나로서는 감히 ≪한씨연대기≫가 그 최초의 대표적인 성공작이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소설가 송기원은 “흔히 민중지향적인 연극이 빠지기 쉬운 편협성이나 치기에서 벗어난 연출 솜씨가 빼어나 보였고,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주제를 소화해 내는 배우들 기량도 돋보였다.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은 감동적인 공연이었다”라는 소감을 들려주었다.
황석영의 반응은 어땠나?
여러 번 공연을 보러 왔고, 배우들을 격려해 주었다. <속 한씨연대기: 한영숙 편>을 만들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2004년 공연도 반응이 여전했나?
2004년 ‘연극열전’ 첫 작품으로 재공연했다. 초연 때 출연했던 배우들 문성근, 양희경, 박용수, 오인두, 김경희 등과 황석영 작가, 2004년에 출연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홈커밍 행사도 가졌다.
이 희곡의 독법을 추천할 수 있는가?
황석영의 원작 소설 ≪한씨연대기≫도 함께 읽어 보기를 권한다. 아울러 남아 있는 분단의 기억을 두고두고 자식들에게 들려주었으면 한다. 아프고 괴로운 기억일망정 공유해야만 분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당신은 누구인가?
김석만이다. 한국종합예술학과 연극원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