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
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의 ≪화염(Incendies)≫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
곡물 방화를 우물 파괴로 갚자 잠자던 분노는 번식을 시작한다. 우물은 집을 요구하고 집은 생명을 요구하고 생명은 순결을 요구하고 순결은 교수형을 요구한다. 한번 눈뜬 인간의 동물성은 증식의 속도를 늦출 줄 모른다. 그것이 행복의 기억을 만날 때까지는.
의사 전쟁 때문입니다.
사우다 무슨 전쟁이오?
의사 누가 알까요? 아무도 이해 못할 겁니다. 형제가 그들의 형제를 향해 쏘고,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 쏘죠. 전쟁입니다. 하지만 어떤 전쟁일까요? 어느 날 국경 너머에서 50만 명의 난민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말했죠. “당신들 곁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이곳 사람들은 그러라고도 했고, 안 된다고도 했으며, 도망치기도 했죠. 수백만 명의 운명이 말이죠. 그리고 누가 누굴 향해 왜 쏘는지도 모르게 된 거죠. 이게 바로 전쟁입니다.
나왈 그럼 여기 있던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 거죠?
의사 모든 게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난민들이 도착했죠. 그들이 모두 잡아갔습니다. 갓난아이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요. 그들은 화가 나 있었죠.
사우다 왜요?
의사 복수하기 위해서죠. 이틀 전, 민병들이 난민 캠프 밖에서 뛰어놀던 난민 청소년 세 명을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왜 민병들이 그 아이들을 매달았을까요? 난민 캠프의 두 남자가 크파르 사미라 마을의 한 소녀를 성폭행하고 죽여 버렸기 때문이죠. 왜 그 두 녀석은 소녀를 성폭행했을까요? 민병들이 한 난민 가족을 돌로 때려 죽였기 때문이죠. 왜 민병들은 그들을 돌로 때려 죽였을까요? 난민들이 백리향 언덕 근처에 있는 집을 불태웠기 때문이죠. 왜 난민들은 그 집을 불태웠을까요? 자기들이 파 놓은 우물을 부숴 버린 민병들에게 보복하기 위해섭니다. 왜 민병들은 우물을 부쉈을까요? 난민들이 도그 강변에서 거둔 수확물을 태워 버렸기 때문이죠. 왜 그들은 수확물을 태웠을까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겠지만, 제 기억이 거기에서 멈춰 버렸죠, 더 거슬러 올라가진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오래전으로 계속 이어지겠죠, 분노에서 분노로, 고통에서 슬픔으로, 성폭행에서 살인으로 이어지겠죠, 태초의 세상으로까지 말입니다.
≪화염≫, 와즈디 무아와드 지음, 최준호·임재일 옮김, 74∼76쪽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태어나자마자 버려야 했던 아이를 찾아 고아원을 찾은 나왈과 사우다가 고아원에서 근무했던 의사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의사는 “누가 누굴 향해 왜 쏘는지도 모르게 된” 것이 바로 전쟁이라고 말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보복과 살인에는 기원도 없다. 나왈 가족에게 비극을 안긴 전쟁의 실체다.
<화염>은 어떤 작품인가?
무아와드가 10여 년에 걸쳐 쓰고 2009년에 마침내 완성한 4부작 비극 중 하나로, 그 둘째 작품에 해당한다. 2003년에 쓴 작품이다. 그가 이끄는 퀘벡 극단 ‘아베 카레 세 카레(Abé carré cé carré)’가 초연했다.
4부작 비극이라면 나머지는 어떤 작품들인가?
<연안 지대>, <하늘>, <숲>이다. 이 작품들은 추방으로 인해 고국인 레바논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삶과 관련이 있다. 무아와드는 아랍어 철자도 깨치지 못한 채 고국을 떠나야 했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잊힌 기억 속에 갇혀 있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네 작품은 감춰져 있던 가족사에 얽힌 비밀을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과 마주한다는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작품에서 레바논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역사적 사실이 암시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보복 테러, 버스 방화, 게릴라 추방 같은 사건은 특정 시기나 명칭에서 실제 사건과 차이가 난다. 이처럼 작품은 실제 사건을 전면에 부각하지 않는 대신 전쟁 때문에 세대를 거듭해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한 가족의 역사를 보여 준다.
<화염>은 이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쌍둥이 남매 시몽과 잔느는 공증인 에르밀 르벨에게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전해 듣는다. 아버지와 이들의 또 다른 형제를 찾아 편지를 전해 달라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지금껏 존재 여부도 몰랐던 아버지와 형제를 찾기 위해 어머니의 과거를 파헤치며 가족사에 얽힌 비밀을 하나씩 풀어 나가던 중에 감당하기 벅찬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한다.
주제는 역시 전쟁과 휴머니즘인가?
근친상간, 명예 살인, 버스 테러 등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가족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나왈은 와합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못한 대가로 영원히 침묵하는 고행을 감내한다. 한편 전쟁이라는 화마에서 살아남은 쌍둥이 남매 시몽과 잔느는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운다.
소하 베차라의 실화인가?
그녀는 2000년에 ≪레지스탕트≫를 출판했다. 이 책은 이스라엘군이 운영했던 지하 감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베차라는 레바논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조국 수호를 위한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다 1988년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저격했다. 이 일로 10년간 키암이라 불리는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 고난의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작품과 인물의 모티프가 되었다. 나왈은 베차라를 연상시킨다.
무아와드는 베차라를 직접 인터뷰했는가?
2001년 파리 조그만 아파트에서 만남이 이뤄졌다고 한다. 둘은 동년배였는데 무아와드는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가 겪은 분노의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몰랐으므로 무아와드는 죄의식마저 느낄 정도였다.
무아와드는 베차라에게 무엇을 물었는가?
세 가지를 질문했다. 감옥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나? 아바(ABBA)의 노래다. 민병대 대장을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지 않는가? 그를 죽이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는 게 중요했다. 왜 두 발을 쏘았나? 하나는 레바논을,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쏘았다.
이 작품은 기독교인가, 이슬람인가?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시류에 휩쓸리면서 겪는 보편적인 인간애가 핵심이다. 기독교 대 이슬람, 반군 대 정부군, 이스라엘 대 레바논이라는 갈등 구조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억압자를 처벌하거나 용서하는 결말을 취하지도 않는다. 현재와 과거, 남부와 북부, 퀘벡과 레바논 등 시공간을 중첩시킨다. 전쟁이 각 인물들에게 남긴 상처를 강렬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 냈다.
시간과 공간이 쉬지 않고 바뀌는 이 구성의 의도는 무엇인가?
관객 혹은 독자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시공간 변화가 쉼 없이 이루어진다. 쌍둥이 남매가 엄마의 과거를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 비밀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도록 했다.
당신은 왜 이 작품을 골라 옮겼는가?
작가의 다른 작품 <연안 지대>를 무대에 올린 일이 있다. 그때 당시로서는 다소 낯설었던 작가의 감성적인 문체를 보고 놀랐다. 이후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이 <그을린 사랑>이란 제목으로 상연되었고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때 원작인 희곡을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가의 메시지는?
삶이 쉽지 않지만 자기 앞에 드리워진 비극의 그림자 위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어 하는 극 중 인물들. 테러리스트로 이미지가 굳어진 아랍인들이 다른 세계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인간임을 말한다.
무아와드는 누구인가?
유럽, 북미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 연출가다. 2002년, 2009년에 프랑스와 캐나다 양국에서 훈장을 받았으며 2005년에는 프랑스 연극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몰리에르 극작가상을 수상했다.
그의 인생은 어떤가?
1968년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전쟁을 피해 열 살 되던 해에 고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1983년, 영주권 문제로 다시 퀘벡으로 이주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캐나다 국립연극학교에 진학, 연기를 전공했다. 1990년 극단을 창단한 이래 꾸준히 연극 활동을 펼쳐 오다 2009년 아비뇽연극제 협력 예술가로 활동했다. 현재 오타와 국립예술센터 프랑스 극장 예술 감독이다.
그의 극작 태도에서 보이는 특징은?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작품에서 이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기존 서유럽 작가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작품 기저에 흐르게 할 뿐, 섬세한 언어를 통해 인물들의 짓이겨진 삶과 그로 인한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데 주력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임재일이다. 파리8대학에서 브레히트 연극과 한국 민중극을 비교연구한 논문으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