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한국 미술사에서 서양화와 동양 수묵화 화가로, 그리고 미술 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을 했고, 이후 1930년대 중반에는 서양화-유화를 그리던 화가에서 문인화를 그리는 수묵화가로 전필했으며,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 머물면서 고구려 벽화 연구와 회화사 등의 연구를 통해 조선 미술사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둔, 대단히 활력적이고 개성적인 이력을 가진 예술가다.
한편 화가와 미술 연구자로서의 성과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 온 것이 바로 수필가로서의 글쓰기 실력이었다. 그의 문장력은 당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높게 평가되어 왔는데, 수필집 ≪근원수필≫(을유문화사, 1948)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무서록≫과 함께 한국 현대 수필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며, 수필 문장의 진정한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김용준 자신은 수필을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라고 ≪근원수필≫의 ‘발문’ 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수필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위에서 동서고금의 문·사·철(文史哲)의 사상과 철학이 자연스럽게 언어와 사유 속에 녹아 있는 글들이다. 이에 한국 수필 문학사에서 그의 글은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김용준은 예술가들이란, ‘자유스러운 심경을 잃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수필집 발문에서 역시 이야기했는데, 수필이란 그의 자유로운 기질과 성격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글쓰기 양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수필의 소재를 일람해 보면 세태의 인정과 변화, 친구들과의 추억, 자기 삶에 대한 성찰, 미술 화단(畫壇)과 비평, 그리고 한 사물에 대한 세심하고 깊이 있는 관찰 등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모든 다양한 소재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당대 우리−조선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나아가 이런 생각들을 풀어 나가기 위해 예술가로서 치열한 정신성을 강조하고, 전통과 민족 문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근대 지식에 대한 해박함과 개성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수필에서 읽을 수 있는 이런 관점과 내용은 김용준의 그림과 미술 평론, 그리고 미술사학자로서의 연구 활동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200자평
근원 김용준은 서양화와 동양화를 두루 섭렵한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 미술 사학자지만 수필에서도 못지않은 성과를 자랑한다.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수필을 만나 보자. 자연스럽고 담담한 문장 속에 동서고금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다.
지은이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은 1904년 2월 3일 경북 선산(善山)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약방을 운영하던 아버지 김이도(金以燾)와 어머니 김옥순(金玉順) 사이에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아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세 살 때 개울에서 본 송사리를 그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15년, 충북 영동에 있는 황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전까지는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1920년 4월에 김용준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23년, 20세 되던 해에 전통 화가와 양화가들이 운영하는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의 청소년 대상 연구생 지도 수업에서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등과 함께 미술 학습을 시작했다. 1924년에는 이종우가 운영하는 도화 교실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같은 해 학생 신분으로 제 3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동십자각(東十子閣)>(원제 <건설이냐 파괴냐>) 가 입선되어 화제가 되었다.
1925년에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이듬해 재학 시절 만났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진숙경(秦淑卿)과 결혼했다. 같은 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과 동기가 되었다. 김용준은 표현파를 추구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치사(百痴社)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을 만나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1927년에는 당대 프로 예맹 이론가들을 비판하는 <화단 개조>,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을 발표해 임화 등의 반격을 받았으며, 이때 미술 비평가로서 국내 화단에 등단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도쿄미술학교 동문들과 함께 동미회(東美會)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고, 향토회를 조직하고 창립전에 <정물>, <풍경>, <꽃> 등을 출품했다. 또한 동문인 길진섭, 이마동 등과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조직하고 주도해 나갔으며,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제9회 미전과 조선 화단> 등의 평문을 발표했다.
1931년 2월,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달리는 기차가 전복되는 그림’을 그려 제출했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상과 멸망상을 보여 주었다 해서 압수당하고, 이후 <여인상>으로 대체해 제출하고 졸업했다. 귀국해 중앙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제2회 향토회 전람회’, ‘제2회 서화협전(書畫協展)’, ‘동미전(東美展)’ 등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미술 평론 <동미전과 녹향전(錄鄕展)>, <서화협전의 인상>, <미술에 나타난 곡선(曲線) 표징(表徵)>, <화단 일 년의 회고> 등의 글을 발표했다. 당시 한국 화단의 주요 논제였던 ‘조선 향토색론’을 앞장서서 이끌어 나갔는데, 민족 정서를 조선 향토색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특히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는 향토색과 관련된 대표적 글이라 할 수 있다.
1934년 도쿄미술학교 출신들과 함께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하고, ‘제1회 목일회 전람회’에 <자화상>, <풍경> 등을 출품했다. 같은 해부터 보성고보 미술 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목일회전’의 후신인 ‘목시회(牧時會) 전람회’에 <오월>, <정물>, <소품> 등을 출품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소설가이자 지기였던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 취미에 빠지기 시작해 전통 미술에 대한 애정을 평론에 담아냈다. 또 수필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舍)와 백귀제(白鬼祭)>를 발표하는 등 미술과 삶에 대한 수필을 이때부터 꾸준히 발표했고,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론>, <김만형(金晩炯) 군의 예술>(1942)과 같이 당대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도 썼다. 1939년 3월에는 딸 석란을 입양했다. 같은 해 2월, 월간 문예지 ≪문장≫이 창간되면서, 길진섭과 함께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40년에 발표한 미술 평론 <전통에의 재음미>를 통해 조선 고전 전통의 부활을 제창했다. 1944년에는 결핵을 앓게 되어 성북동 자택인 ‘노시산방(老枾山房, 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에게 넘겨주고 의정부로 이주했다.
해방 후 총 186명의 미술가들을 총괄한 최대 미술가 조직이었던 ‘조선 미술 건설 본부’에 참가해 동양화부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6년 보성중학교 교사를 퇴직하고 서울대 회화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미술애호회에 참가했고 미술 평론 <명일의 조선 미술>을 발표했다. 1947년에는 <민족 문화 문제>, <광채 나는 전통> 등의 평문을 통해 식민 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1948년 이후 잡지 ≪학풍(學風)≫에 다수의 수필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표지화를 그렸다. 같은 해,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고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1949년 동국대학교 강당에서 ≪근원수필≫ 출판 기념회를 가졌고, 6월에는 ≪조선 미술 대요≫를 출간했다. 그리고 연이어 <고미술 계몽의 의의>, <국전의 인상>, <신사실파의 미>를 발표하는 등 전통 미술과 현대 미술뿐만 아니라 국전이라는 새로운 전시 체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용준은 석 달 후인 1950년 9월에 부인 진숙경과 딸 석란을 데리고 월북했다. 월북하자마자 그는 평양미술대학 교수에 취임했으며, 1951년에는 조선 미술가 동맹 조선화 분과 위원장과 조선 건축가 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3에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사퇴하고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임했다. 이 무렵 미술사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는 등 미술사학자로 활약했다. 1956년부터 고구려 고분 벽화 현지 조사 및 문헌 연구를 시작했고, 1957년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학술 보고회에서 이 연구를 발표해 조선 미술사학의 수준을 높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소련에서 개최된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수묵 채색화 <춤>을 출품해서 금메달을 수상했는데, 조선화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1958년에 연구서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를 출간했다. 1962년에는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복직해 <조선화의 채색법> 등을 발표했고, ≪조선미술사≫와 ≪단원 김홍도≫를 출간하는 등 월북 이후에도 전통 미술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67년 향년 64세로 작고했다.
엮은이
김진희는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출발과 경계로서의 모더니즘−오규원론>이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일본 무사시대학, 규슈대학교의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2014년 김달진 문학상, 2016년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했다.
최근 근대 문학 초창기 문학 장(場)의 형성, 한국 근대 문학의 근대성과 탈식민성, 제국과 식민지 번역, 비교문학−문학과 인접 예술, 근대 문예론, 동아시아 문학−지식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파시의 모더니티≫, ≪근대 문학의 장(場)과 시인의 선택≫, ≪회화로 읽는 1930년대 시문학사≫, ≪한국 근대시의 과제와 문학사의 주체들≫, ≪교류와 소통의 동아시아≫(공저), ≪동아시아 근대 지식과 번역의 지형≫(공저) ≪근대 지식과 저널리즘≫(공저) 등의 연구서와 ≪시에 관한 각서≫, ≪불우한, 불후의 노래≫, ≪기억의 수사학≫, ≪미래의 서정과 감각≫ 등의 비평집, ≪김억 평론선집≫, ≪모윤숙 시선≫, ≪노천명 시선≫, ≪한무숙 작품집≫ 등의 편서가 있다.
차례
梅花
게[蟹]
黔驢之技
釣魚三昧
구와꽃
두꺼비 硯滴을 산 이야기
머리
秋史 글씨
답답한 이야기
移動 飮食店
新型 住宅
老柿山房記
鬻莊後記
생각나는 畵友들
詩와 畵
藝術에 對한 小感
東海로 가던 날
骨董說
去俗
吾園軼事
답답할손 X 先生
八 年 된 조끼
眼鏡
銀行이라는 곳
袁隨園과 鄭板橋와 憑虛와 나와
畵家의 눈(一)
스리의 道德 (上)
孤獨
翰墨餘談
繪畵的 苦悶과 藝術的 良心
善夫 自畵像
十三級 碁人 散筆
말과 소
畵家와 怪癖
表情과 衣裳
白痴舍와 白鬼祭
서울 사람·싀골 사람
≪康熙字典≫과 감투
털보
碁道 講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너는 어째 그리도 못생겼느냐. 눈알은 왜 저렇게 튀어나오고 콧구멍은 왜 그리 넓으며 입은 무얼 하자고 그리도 컸느냐. 웃을 듯 울 듯한 네 表情! 곧 무슨 말이나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 가장 豪奢스럽게 치례를 한다고 네 몸은 얼숭덜숭하다마는 조금도 華麗해 보이지는 않는다. 恰似히 시골 색시가 綾羅綢屬을 멋없이 감은 것처럼 어색해만 보인다.
앞으로 앉히고 보아도 어리석고 못나고 바보 같고….
모로 앉히고 보아도 그대로 못나고 어리석고 멍텅하기만 하구나.
내 房에 電燈이 輝煌하면 할쑤록 너는 漸漸 더 못나게만 보이니 누가 너를 일부러 심사를 부려서까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네 입에 문 것은 그게 또 무어냐.
필시 장난군 아이 녀석들이 던져 준 것을 파리인 줄 속아서 받아 물었으리라.
그러나 배앝아 버릴 줄도 모르고.
준 대로 물린 대로 엉거주춤 앉아서 울 것처럼 웃을 것처럼 도무지 네 心情을 알 길이 없구나.
너를 만들어서 무슨 因緣으로 나에게 보내 주었는지 너의 主人이 보구 싶다.
나는 너를 만든 너의 主人이 朝鮮 사람이란 것을 잘 안다.
네 눈과, 네 입과, 네 코와, 네 발과, 네 몸과, 이러한 모든 것이 그것을 證明한다. 너를 만든 솜씨를 보아 너의 主人은 필시 너와 같이 어리석고 못나고 속기 잘하는 好人일 것이리라.
그리고 너의 主人도 너처럼 웃어야 할찌 울어야 할찌 모르는 性格을 가진 사람일 것이리라.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는 줄 아느냐.
그 못생긴 눈 그 못생긴 코 그리고 그 못생긴 입이며 다리며 몸둥어리들을 보고 무슨 理由로 너를 사랑하는지를 아느냐.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커다란 理由가 있다.
나는 孤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孤獨함은 너 같은 性格이 아니고서는 慰勞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두꺼비 硯滴을 산 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