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박은식은 정통 주자학을 배웠지만 시대적 현실 변화를 직시함으로써 ‘이용후생의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진정한 학자의 길을 실천했다. 또한, 그는 학자로서 스스로 올바른 방향을 깨우쳤다고 하더라도 민중을 외면하고 민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무용하다고 여겼다. 그 구체적 실천을 위해 그는 평생 동안 교육 사업과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또한 수많은 독립 단체의 결성을 지원하고 책임을 맡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는 데에 언제나 온 힘을 기울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가장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시기에 박은식은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방편으로 역사를 선택했다. 이때 그가 선택한 것은 먼 일들을 떠올리며 역사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도, 또 새로운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통과 피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면서도, 스스로의 자부심을 지켜 나가면서 희망의 미래를 예비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처럼 역사란 반드시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변치 않는 가치를 확인하고 또 그것을 외부의 것들과 견주고 우위를 확인하는 과정일 수 없다. 진정한 역사는, 박은식이 그랬던 것처럼,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민중과 같이 호흡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우리의 노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200자평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 그는 독립을 되찾을 방안으로 역사와 교육을 택했다. 그의 글은 이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가르침이자 안내문이고, 꾸짖음이자 사랑 고백이다.
지은이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은 조선조 말기의 유학자이자 일제 강점기 언론인·교육자로서 제2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냈던 독립운동가다. 호는 처음에 겸곡(謙谷)이었다가 나중 백암(白巖)으로 했다.
조금 늦은 나이에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 성리학과 과거 준비를 하던 그는 일찍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17세 무렵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낀 그는 아버지의 서당을 떠나 당대에 이름난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을 비롯해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그리고 구한말 영국 언론인이었던 베델[E. T. Bethell. 한국명 배설(裵設)] 등과 교분을 나누고,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을 찾아가서 학문을 배우며 당시 급변하는 사회 현실과 직접 만나게 된다.
1898년 독립 협회에 가입하고 이어 개최한 만민 공동회에서 간부로 활동했고, 1898년 9월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로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05년 11월 20일, 이 신문에 실린 장지연(張志淵)의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 되어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구속되고 신문은 정간되는 상황에서 박은식은 주필로서 폐간 때까지 사실상 ≪황성신문≫을 주관한다. 이 시기 그는 ≪대한매일신보≫에도 여러 차례 객원으로 논설을 발표한다.
1906년 설립된 민중 계몽 단체인 대한 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에도 역시 많은 계몽 논설을 썼으며, 10월에는 서우 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우≫(1906년 12월 창간)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저술 활동에도 힘쓰며 여러 권의 책과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원로회원으로 참가하는데,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서 1909년 창립된 서북 학회(西北學會)를 실질적으로 지도하면서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발표한 <유교구신론(儒敎救新論)>은 실천적 모습으로의 유교 개혁을 주장하면서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박은식은 서북 학회의 산하 교육 기관으로 서북협성학교를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교장을 맡기도 한다.
1912년 상해로 이동해 여러 우국지사들을 만나면서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했다. 동제사는 겉으로는 상해에 있던 한인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었지만, 독립을 목표로 해외 여러 곳에 지사를 두는 등 많을 때는 3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박은식은 총재를 맡아 여러 활동을 하면서 1913년 상해에 교육 기관인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 등 두드러지는 활동을 한다.
1914년에는 상해에서 교류하던 중국인들의 권유로 홍콩으로 건너가 중국 혁명당 관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발행한 잡지 ≪향강(香江)≫의 주필을 맡다가, 이 잡지가 당국에 의해 정간 조치되면서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상해로 돌아온 뒤에는 ≪안중근전≫과, 망명 중 틈틈이 집필해 오던 국권 상실의 과정이 기록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서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3편 114장)를 중국의 출판사에서 발행한다.
1915년, 이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신한 혁명당을 결성한다. 1918년 러시아 우스리스크 지역의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초청으로 현지로 이동해 기관지 ≪청구신보(靑丘新報)≫(이후 ≪한족공보≫로 변경) 주필을 맡는다. 1919년 1월, 해외 망명 지사들이 추진한 ‘대한 독립 선언서’에 39인 중 한 명으로 서명을 했으며, 3·1 운동의 영향으로 17일 이 지역의 독립운동 대표 기관인 국민의회가 주관한 독립 선언식에서 선언서를 작성한다. 26일에는 미국의 서재필과 홍범도 장군을 포함한 대한 노인 동맹단을 조직하면서 발족 취지서를 작성했다.
1919년 8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다시 상해로 온 박은식은 갓 출범한 임시 정부에서 사료 편찬 위원회의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 독립 투쟁사를 기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1921년에는 초대 사장이었던 이광수와 편집국장 주요한이 변절하면서 떠나간 임시 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선임된다. 이후 임시 정부 조직 개편을 위한 국민 대표회의의 결렬로 인해 임시 정부가 약화되면서 기관지 발행도 어렵게 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24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독립신문≫ 간행을 책임지게 된다. 12월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미국으로 떠나 버린 이승만 대통령의 대리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1925년 3월 21일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면서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었다. 임시 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수락한 박은식은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하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추천, 선출한 뒤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사임 이후 병세가 악화되면서 11월 1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에게 유촉(遺囑)을 남긴 뒤 상해의 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임시 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상해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에는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엮은이
남승원(南勝元)은 문학 평론가다. 경희대학교에서 ≪한국 근대시의 물신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2010년 ≪서울신문≫으로 등단, 문학 계간지 ≪시인동네≫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현재 ≪포지션≫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차례
務望興學
敎育이 不興이면 生存을 不得
滿報譯載後識
舊習改良論
文弱之獘는 必喪其國
女子普學院維持會趣旨書
本校의 測量科
謹於㣲와 無我라 演論
物質改良論
本校 第二回 卒業式의 祝辭
我 西北 敎育界에 缺憾
西道旅行記事
나의 사랑하는 靑年 諸君에게
早速 悔改하야 大同團結에 努力하라
痛告 二千萬 同胞
敵이 光化門을 毁却한다
倭奴의 强橫이 益甚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凡 厥人情이 莫不欲其子孫之榮且貴矣어 惟我同胞兄弟 任其子孫의 怠惰不學야 使之永墜萬刧地獄고 不得其高尙快樂之境遇耶아 念及於此면 寢食何安가 一言以蔽之고 當此時代야 敎育이 不興이면 生存을 不得이니 惟我同胞兄弟 互相 奮發고 互相 勸勉야 一心注意로 子弟 敎育을 振起야 所在學校가 相繼而興면 其設備之規模와 敎導之方法은 卽 本 學會之責任也오 對此雜誌之發行야 千言萬語가 皆吾儕의 嘔吐心血 者니 惟我 一般 士友 諒之勉之어다
<敎育이 不興이면 生存을 不得>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