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은 ‘어린이의 아버지’, ‘아동 문화 운동의 선구자’, ‘아동 문학의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한국 현대 아동 문학사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상징성은 그의 사상적 면모조차 오로지 어린이를 찬미한 동심 천사주의(童心天使主義)자로, 실천적 아동 교육자로, 소년 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자로 각인되었다. 곧 그는 1931년 7월 타계한 직후 ≪어린이≫지에 특집으로 꾸며진 ‘방정환 선생추도호’(9권 7호, 1931. 8) 이후 지금까지 한국 아동 문학 논의의 출발점에 선 선각자의 일면만 부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제 면모는 일반에 잘 알려진 것보다 폭넓다. 그의 문학적 행적은 아동 문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고, 사상적 면모 또한 동심 천사주의(童心天使主義)나 민족주의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검열에도 위축되지 않고 전 장르에 걸쳐 활발히 활동한 진정한 문학인이었으며,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도 그 어떤 특정 이념·사상에 물들지 않고 천도교란 종교로 초월하여 ‘人乃天主義下에 絶對 平等’(≪천도교회월보≫ 126호)을 실천한 사회 운동가였다. 그래서 그는 일제에 ‘주의인물(注意人物)’로 낙인 찍혀 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와 미행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그의 면면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여러 지면에 다양하게 발표된 일종의 수필류이다.
방정환이 쓴 수필류의 글도 그의 글쓰기 양식처럼 다양하다. 형식 면에서 서간문, 감상문, 수상문, 신변잡기, 논(論), 풍자 만필 등 다기할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개인적인 자기 고백에서 일상생활, 문학, 교육, 예술, 종교, 사회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그러나 소견, 견문, 체험, 감상 등을 다양한 형식으로 쓴 그 수필류에 공통점이 있다면 겸손한 태도로 아는 사실을 꾸밈없이 진실하게 이야기하고자 한 진술 방식이다. 그도 <선전 시대?>(≪별건곤≫ 30호, 1930. 7)에서 “내가 남의 일을 쓰는 것이 안이라 내가 내 일을 쓰는 것이면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 분명한 일이 업슬 것임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리석은 일일망정 내 일을 내가 쓰는 것이니 확실한 일인 것만은 사실임니다”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방정환의 수필에는 그의 성장 과정, 생활 태도, 성격, 사회에 대한 인식 등 인간적인 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이에게 친근감을 더해 준다.
방정환의 수필을 형태별로 대별하면 사색, 깨달음, 동정, 실수담, 사회 풍자 비판, 일신상의 처지와 형편 등을 고백하는 주정적이며 주관적인 글과 논(論)의 성격을 지닌 보다 전문적이며 객관적인 글이 있다. 전자의 글은 자신의 성장 배경, 활동 상황과 그때의 정황, 자연이나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 일신상의 처지와 형편 등을 진솔하게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후자의 보다 지적이며 객관적인 글은 학생, 여성, 부형, 교사들을 위한 것으로 계몽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글들 속에서 우리는 방정환의 글쓰기 의식을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누구보다 이 나라와 어린이를 사랑했던 방정환의 글쓰기는 ‘새 문화 건설에 큰 힘’을 보태고자 한 일이다.
200자평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인 소파 방정환의 수필을 모았다. 그동안 아동문학가로만 알려진 그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수필에는 한번 세운 뜻은 어떠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은 진정한 문학인이자 사회 운동가였던 그의 진정한 삶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은이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동학 혁명이 봉기한 5년 뒤인 1899년, 서울 야주개(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부친 방경수(方慶洙, 1879년생)와 모친 손씨(1877∼1917) 사이에 태어났다. 방정환의 아명은 장돌(長乭)이었다고 한다. 7세(1905) 때 두 살 많은 작은삼촌을 따라 삼촌이 다니던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머리를 자르고 입학을 한다. 10세 때는 ‘소년 입지회(少年立志會)’를 조직하고 그 뒤 200명의 유소년대장으로 활동했다. 열한 살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미동보통학교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4학년 졸업을 한다. 15세(1913)에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을 1년 남긴 채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토지 조사국의 사자생(寫字生)으로 일했다.
16세의 나이로(1914) 육당의 아동 잡지인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을 탐독하기도 했다. 이광수의 기억에 따르면, 방정환이 열여섯 살의 나이로 투고를 했으며 ≪소년≫이란 잡지에 투고한 글을 통해 ‘소년 문학과 소년 운동에 큰 뜻과 특재’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1918년 비밀 결사 단체인 ‘경성 청년 구락부’를 결성하고 문예 잡지 ≪신청년≫ 1호를 1919년 1월에 냈다. 이 잡지는 도쿄에서 창간한 동인지 ≪창조≫보다 한 달 앞서 나왔다. 조선 청년에 의한 신문예 운동의 첫 삽으로 평가할 만하다.
1920년 보성전문 법과 학생 신분으로 학생 강연단을 조직, 서북 지방을 순회하는 등 전국적으로 강연을 했으며, 1920년 9월 중순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개벽사 동경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 도쿄로 떠났다. 도쿄에 도착한 후, 1921년 2월 첫 번안 동화 <왕자와 제비>를 발표하고, ‘동화 예술’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가 도쿄 도요대학에 학적을 둔 시기는 1921년 4월부터 1922년 3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이다. 도쿄 유학생으로 있으면서도 하기 방학을 맞이해서는 다시 국내로 들어와 전국 순회강연 활동을 전개하고 틈틈이 천도교 소년회의 사업을 도모했다.
그는 김기전과 함께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고, ‘씩씩하고 참된 어린이가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우리나라 소년 운동의 선봉에서 실천해 나갔다. 1921년 연말에 도쿄에서 세계 명작 동화 10편을 역술해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국내에 머물면서 ≪부인≫ 잡지에 <옛날이야기 모집>, ≪개벽≫ 잡지에 <고래 동화 모집> 공고를 내어 조선의 설화 발굴에 역점을 기울여 이를 토대로 ‘새로 개척되는 동화’의 기초적 무대가 되도록 했다.
이 시기에 방정환은 ≪어린이≫의 창간호를 계획하고 그 집필에 힘쓰면서 방향성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도쿄로 떠나게 되는 1923년 1월 말 전후, ≪어린이≫ 창간호는 이미 전체적인 틀이 완성되어 ≪개벽≫에 광고 되었을 정도였다. 다시 도쿄로 가서는 3월 16일에 ‘색동회’ 창립을 위한 1차 모임을 갖고 5월 1일에 손진태·윤극영·정순철·고한승·진장섭·조재호·정병기 등이 참석해 한국 최초의 아동 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다시 7월에는 국내에서 ‘전국 조선 지도자 대회’를 갖는 등 우리나라 소년 운동을 가장 힘 있게 일으켜 나가는 한편, ≪어린이≫의 발행으로 이 나라 아동 문학의 기초를 정립하고 착실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중요한 공헌을 했다.
방정환의 필명에는 소파, 잔물, ㅅㅎ생, SP생, 에스피생, 파영(波影)생, 목성(牧星), ㅁㅅ생, ㅅㅍ생, 북극성(北極星), 몽견초(夢見草), 몽중인(夢中人), 은파리 등 많은 것이 있다. 그동안 방정환의 필명으로 알려져 왔던 雙s는 ‘청오 차상찬’의 것이다.
방정환은 소년 운동가, 동화 구연가, 동요·동화 작가, 소설가, 잡지 편집자, 교육자 등 각계 각 방면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주관한 잡지로는 1923년 3월에 창간한 ≪어린이≫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방정환은 앞서 언급한 ≪신청년≫(1919) 외에도, 예술 잡지 ≪녹성≫(1918), ≪개벽≫(1920), ≪신여성≫(1924), ≪학생≫(1929), ≪별건곤≫(1926), ≪혜성≫(1931) 등을 주재하며 우리나라 근대 신문예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1년 7월 23일. 방정환은 서른세 살의 짧고도 아까운 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어린이를 잘 키우자는 그 사랑의 표현과 미몽에 잠든 민족 독립에 대한 총화로 집약된다. 방정환은 사회주의 사상까지도 수용한 사회 운동가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적으로 인식되던 상황에서 방정환의 사상은 보수 우익의 표적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이론에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 사회주의 문학을 번역 소개한 진보적 문학가였다. <은파리> 연작 등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고 사회의 추악한 위선을 여지없이 풍자하고 폭로했다. 소파의 이 같은 사상적 측면에 대해 이재철은 ‘동심 평등주의’, ‘사회적 민족주의’로 집약하여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중 생전에 남긴 것은 ≪사랑의 선물≫(개벽사, 1922)이 유일하며, 사후 타인이 편찬한 단행본으로는 ≪소파 전집≫(박문서관, 1940), ≪소파 동화 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 ≪방정환 아동 문학 독본≫(을유문화사, 1962),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54), ≪소파 아동 문학 전집(전 5권)≫(삼도사, 1965), ≪소파 방정환 문학 전집(전 8권)≫(문천사, 1974) 등이 있다.
엮은이
김용희는 동시인이자 아동 문학 평론가다.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아동 문학 평론≫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쪽배 동인으로 동시조를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동 문학 평론집 ≪동심의 숲에서 길 찾기≫, ≪디지털 시대의 아동 문학≫, ≪옥중아, 너는 커서 뭐 할래≫(엮음), 동시조집 ≪실눈을 살짝 뜨고≫, 동시 이야기집 ≪짧은 동시 긴 생각 1≫ 등이 있으며, 제9회 방정환문학상, 제18회 경희문학상, 제21회 한국아동문학상, 제1회 이재철아동문학평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부센터장, 계간 ≪아동문학평론≫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自然의 敎訓
觀花
牛耳洞의 晩秋
電車의 一 分間
불상한 生活
秋窓 隨筆
달밤에 故國을 그리우며
童話를 쓰기 前에 어린 기르는 父兄과 敎師에게
敎友 한 사람을 맛고
異域의 新年
夢幻의 塔에서
少年의 指導에 關하야
나그네 잡긔장 1
나그네 잡긔장 2
나그네 잡긔장 3
어린이 讚美
뭉게구름의 비밀(秘密)
이러케 하면 글을 잘 짓게 됨니다
사라지지 안는 記憶
방송해 본 이약이
二十 年 전 學校 이약이-내가 小學校에 入學하든
二十 년 전 學校 이약이-상투에 일흠 붓치던
二十 년 전 학교 이약이-벌거숭이 三百 명
二十 년 전 학교 이약이-강제로 머리 기든
힘부름하는 사람과 어린 사람에게도 존대를 함니다
내가 제일 창피하였던 일-外三寸 待接
便紙 騷動
나의 어릴 이약이
내가 第一 辱 먹든 일
朝鮮의 學生 氣質은 무엇인가
한 가지
尾行當하든 이약이
兒童 裁判의 效果
宣傳 時代?
兒童 問題 講演 資料
演壇 珍話
잇서도 學校에 안 보내겟소
豪放한 金燦
銀파리 1
銀파리 2
銀파리 3
銀파리 4
銀파리 5
銀파리 6
銀파리 7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내가 어느 학교 사무실에 가서 학생들의 作文 지은 것을 보닛가 문뎨는 ‘春’인데 이것저것을 모다 뒤저 보아도 모다
…嚴冬雪寒은 어느듯 지나가고 春三月 好時節이 來하니 我等은 大端히 愉快하도다. 桃李花는 滿發하고 蜂蝶은 춤을 추니 平和한 樂園이로다….
서로 약속하고 쓴 것가티 이러한 글들이엿슴니다. 족음 다르대야 엄동설한을 三冬 大寒이라 하고 春三月 好時節이 陽春 三月로 변하엿슬 이지 별로 다른 것이 업섯슴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마음이 퍽 섭섭하엿슴니다. 엇더케 그러케 六十 名 학생이 봄에 대한 생각이나 늣김이 고러케 가틀 수가 잇겟슴닛가 가튼 봄이라도 이 피닛가 조와하는 사람도 잇겟지만 어느 해 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잇는 사람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봄을 슯흐게 생각하는 사람도 잇슬 것이고 봄은 되엿지만 아버지 병환이 계신 사람이면 구경할 도 한편에 근심하는 마음이 업지 안흘 것임니다. 가티 봄이 좃타 하더라도 이 피닛가 좃타거나 졸업을 하닛가 좃타거나 운동을 하기 조흐닛가 좃타거나 그 생각에는 사람에 하서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만흘 것임니다. 그런데 그 남다른 자긔의 생각 그것이 글에는 귀중한 것인 줄 모르고 왼통 남이 쓰는 文字만 春三月 好時節이닛가 유쾌하거니 무어니 하고 느러만 노흐니 누가 그 글을 닑고 그 사람의 속을 리해는 고사하고 어림치고 짐작이나 해 볼 수 잇슴닛가. 그런 글은 아모 소용업는 붓작란에 지나지 못하는 것임니다.
그런고로 글은 짓는 것(미는 것)이 아니고 쓰는 것임니다. 생각이나 늣김을 고대로 쓰기만 하는 것임니다. 짓거나 미거나 하면 그만 그 글은 망치는 것임니다.
<이러케 하면 글을 잘 짓게 됨니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