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이태준(李泰俊, 1904∼?)은 ‘순수 문학의 기수’ 혹은 ‘근대적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1930년대 이후 미학적 완성도가 높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소설을 창작한 작가였다. 그는 현대적인 소설 기법과 인물의 성격 창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동시에 묘사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구성력을 중시하는 소설관의 주창자이자 실천자였다. 이태준은 1933년 ‘구인회’를 결성해 김기림, 정지용, 이상, 박태원, 이효석, 유치진, 조용만, 김유정 등과 함께 활동하며 소설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1939년 문예지인 ≪문장≫의 편집을 맡아 신인을 발굴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이태준의 수필은 ≪무서록≫(박문서관, 1941)에 수록된 작품들과 기타 작품들로 대별될 수 있다. ≪무서록≫이 작가가 스스로 엄선한 수필집이라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에 해당한다면, 기타 작품들은 그 밖의 여러 지면에 발표한 다양한 글들에 해당한다. 전자가 이태준이 의도적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작품들을 정리한 것이라면, 후자는 그가 처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시시각각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태준의 수필을 제재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자연의 대상, 일상의 삶과 사물, 기행(紀行), 고완품(古翫品)이나 동양적 완상품(玩賞品), 소설론 혹은 문학론 등으로 대별할 수 있고, 이를 다시 주제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자연에 대한 사색, 일상에 대한 사색, 기행의 경험과 사유, 상고주의와 동방의 정취, 소설 혹은 문학적 사유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200자평
순수 문학의 기수로 불리는 소설가 이태준의 수필을 모았다. 그의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삶의 일면을 관조하고 사색하는가 하면, 우리 고전과 전통의 재해석을 갈구하기도 하고, 자신의 소설관과 문학관을 거침없이 피력하기도 한다.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빚어 낸 그의 문장은 문학으로서 수필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린다.
지은이
이태준(李泰俊)의 호는 상허(尙虛)이고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에서 부 이창하와 모 순흥 안씨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이태준은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지만,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해 함북 이진(梨津)에 정착한다. 1912년 모친이 별세해 고아가 되고, 외조모에 의해 고향 철원 용담으로 귀향해 친척집에 맡겨진다. 1915년 철원 사립봉명학교에 입학하고 1918년 3월에 우등으로 졸업한 후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한다. 한 달 후 가출해 원산 등지에서 객줏집 사환 등의 일을 하면서 2년여를 보내는데, 이때 문학 책을 탐독한다. 192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고학생으로 우수한 성적을 받으며 습작을 시작한다. ≪휘문≫의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동화 <물고기 이약이> 등 6편의 글을 ≪휘문≫ 제2호에 발표한다.
1925년 일본에서 단편 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해 입선하고 ≪시대일보≫에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1926년 4월 도쿄 상지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하고≪반도산업≫을 발행하면서 작가 나도향, 화가 김용준·김지원 등과 교유한다. 1927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후 1929년 개벽사에 기자로 입사한다. ≪학생≫의 책임자를 맡고,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관여하며, ≪어린이≫에 소년물과 장편(掌篇)을 다수 발표한다. 9월 ≪중외일보≫로 직장을 옮기고 사회부, 학예부 등에서 근무한다. 193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고, 1931년 ≪중앙일보≫ 학예부 기자가 된다. 1932년 이화여전 등에 출강하며 작문을 가르치고, 1933년 김기림·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며, 3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에 임명된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를 퇴사한 후 창작에 몰두하고, 1938년 만주 지방을 여행하며, 1939년 ≪문장≫의 편집자 겸 신인 작품의 심사를 맡는다.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을 받고, 1943년 강원도 철원 안협으로 낙향해 해방 전까지 이곳에서 칩거한다.
1945년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 문학가 동맹, 남조선민전 등의 조직에 참여하고 문학가 동맹 부위원장, ≪현대일보≫ 주간 등을 역임한다. 1946년 2월부터 민주주의 민족전선 문화부장으로 활동하고, 7∼8월 상순 사이에 월북한다. <해방 전후>로 제1회 해방 문학상을 수상하고, 1949년 북조선 문학 예술 총동맹 부위원장, 국가 학위 수여 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된다. 1950년 10월 중순 평양 수복 때 문예총은 강계로 소개(疏開)했는데 이태준은 따라가지 않고 평양 시외에 숨어 있으면서 은밀히 귀순을 모색했다고 한다. 1956년 2월 평양시 당관할 문학 예술부 열성자 대회에서 한설야에 의해 비판받고 숙청된 후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수집 노동자 등으로 배치된다. 1964년 중앙당 문화부 창작 제1실 전속 작가로 복귀한다. 김진계의 구술 기록에 따르면, 1969년 1월경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하며, 이후 연도 미상이지만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엮은이
오형엽(吳瀅燁, Oh Hyung-Yup)은 1965년 2월 7일 부산에서 출생했다.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고, 1996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제3회 젊은평론가상, 제6회 애지문학상, 제21회 편운문학상, 제24회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현대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연구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 ≪현대 문학의 구조와 계보≫, ≪문학과 수사학≫,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 역서 ≪이성의 수사학≫ 등이 있고, 평론집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등이 있다.
차례
壁
물
밤
早熟
죽엄
山
花壇
芭蕉
발
同情
돌
바다
城
가을꽃
黎明
孤獨
水仙
歷史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評論家
東方情趣
短篇과 掌篇
命題 其他
朝鮮의 小說들
小說의 맛
小說家
異性 間 友情
通俗性이라는 것
春香傳의 맛
妓生과 詩文
蘭
≪夜間 飛行≫
冊
筆墨
摸倣
一分語
自然과 文獻
作品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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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두 淸 詩人 故事
海村日誌
滿洲 紀行
白日夢 (上)
물과 불
新綠
惡伴侶
모기장 속
車窓에서
내게 감화를 준 인물과 그 작품-안톤·체홉의 哀愁와 香氣
陽春四重奏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밤이 오는 것은 날마다 보면서도 날마다 모르는 새다. 그러기 때문에 낮에서부터 靜坐하여 기다려도 본다. 닫힌 門을 그냥 드러서는 完然한 밤 거름이 있다. 壁에 걸린 寫眞에서 어머님 얼굴을 다려가 버리고 책상 우에 혼자 끝까지 눈을 크게 뜨인 꽃송이도 감겨 버리고 나중에는 나를 深山에 옮겨다 놓는다.
그러면 나는 버레 우는 소리를 만나고 이제 찾아올 꿈을 기다리고 그리고 이슥하여선 닭 우는 소리를 먼 마을에 듣기도 한다.
<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