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소고 이항녕(1915∼2008)의 글은 진실한 삶에 대한 일관된 지향을 담고 있다. 그는 총 네 권의 수필집(≪객설록≫, ≪낙엽의 자화상≫, ≪작은 언덕에 서서≫, ≪깨어진 그릇≫)을 엮었는데 그 글들에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문학에 대한 열정, 문학과 법학의 근저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열망을 지녔다. 꾸준히 습작을 했고 첫 장편 소설인 ≪일륜차≫를 동아일보 현상 공모에 응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낙선한 후 법학을 택해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고등 고시에 합격해 군수로서 5년여간 활동하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이력은 평생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그는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후회와 참회의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항녕을 떠올리면 그의 약력 못지않게 언급되는 것이 그의 참회에 대한 기록이다. 이항녕은 첫 번째 수필집 ≪객설록≫에서부터 마지막 수필집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과오를 숨김없이 술회했다. 그것은 여러 차례 반복되다 보니 중복되는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그는 그 반성과 후회를 신문, 인터뷰, TV방송에서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했다. 자신의 과오를, 그것도 치명적 상처로 남은 과거를 몇십 년간 지속적으로 밝힌다는 것은 그에게 ‘진실’의 가치가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지니는지를 방증해 준다.
또한 이항녕의 수필에는 유독 법과 문학에 대한 성찰이 자주 발견된다. 그가 법철학자였다는 점과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찌 보면 합당해 보인다. 그는 문학은 사랑, 법은 평화라고 보았다. 문학과 법은 둘 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인간 사회를 다룬다는 점에 그 공통점이 있다. 법을 소재로 다루는 많은 문학 작품들을 고려할 때에, 그리고 인간 사회의 문제를 다룰 때에 다양한 법적 문제가 개입되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둘은 많은 관련성을 지닌다. 이항녕은 이 점에 주목했기에 문학과 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법의 특징을 여러 문학 작품들을 통해 심도 깊게 견주어 보며 그 공통 요소와 차이점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로써 문학과 법은 그 소재와 근본적 특성에 있어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그릇에 담길 수 있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라고들 말한다. 이항녕은 다양한 시련을 경험했던 이들에 대해 성찰을 시도했다. 단군 신화의 곰으로부터 시작해 최치원, 김정희, 초의선사, 팔만대장경을 새겼던 200인의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통해 당대의 시련들, 개인의 역경들이 어떻게 승화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시련은 피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마주쳤을 때에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시련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여기서 우리는 이항녕이 추구했던 삶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200자평
5년간의 친일, 그리고 남은 평생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 소고 이항녕의 수필집이다. 그의 수필은 ‘참회’, ‘법과 문학’, ‘풍류의 정신’의 세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과거’로 인한 후회와 참회를 인지하고, ‘현재’에서 오는 지적, 양심적, 도덕적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했다. 더불어 현재의 삶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소탈하지만 원대한’ 꿈을 ‘풍류’로써 발산하려 했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과오를 인정할 줄 아는 진실함, 그리고 후회에서 멈춰 서지 않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와 강인함을 지닌 참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지은이
소고 이항녕(小皐 李恒寧)은 1915년에 충남 아산군 둔포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당시 보통학교 교사였는데 조부에게 서당 교육(한문 교육)을 받느라 보통학교 입학이 또래보다 늦어졌다. 1923년 9세에야 비로소 둔포보통학교에 입학한다. 1934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재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예과 2학년생이던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장편 소설 ≪일륜차≫를 응모했는데 낙선한다. 이때 당선작이 바로 심훈의 ≪상록수≫였다. 이항녕은 ≪상록수≫를 읽으며 자신에게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아버지와 이광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문학이 아닌 법학을 전공과목으로 선택하게 된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그 후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해 잠시 동안 총독부 학무과에서 근무한다. 그리고 1941년 경상남도 하동군수를 지내고, 1942년에는 창녕군수로 부임해 그곳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지만 일제 시대 ‘군수 노릇을 한 일이 부끄러워’ 사표를 낸다.
관료 사회를 벗어나고자 했던 그가 선택한 참회의 길은 벽촌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며 소박한 삶에서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2월 경남 양산군 범어사 밑 청룡초등학교의 교장, 1946년 경남 양산중학교 교장을 지낸다. 평교사가 되고자 했으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청룡초등학교에 재직하는 중에 범어사에서 스님들과 새벽마다 참선을 하고 학교에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 가는 것이 그에게 심리적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된다’는 이 시기의 경험으로 그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좀 더 깊은 철학적 탐구에 대한 욕망으로 1949년부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철학 개론과 법철학을 강의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부산대학교에서는 전공과 관련된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학칙으로 인해 철학 강의 대신 민법과 법철학을 강의, 성균관대학교를 거쳐 1954년부터 1971년까지 고려대학교 법대 교수로 재직하며 법학을 지도하게 된다. 1959년 고대 법대 학장 등을 역임하며 민법과 법철학, 법률사상사, 독어 원서 강독 등을 강의했다. 1960년 5∼8월에는 문교부 차관을 지냈으며, 1965년 고대 신문에 소설 <그믐밤>을 연재하며 문학 활동을 재개한다. 1965년 한·일 협정 반대 교수 회의에서 사회를 보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정치교수’로 지목되어 면직된다. 1966년 변호사 개업 및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67년 3월에 고대 교수로 복직이 된다. 1970년에는 부산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 홍익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홍익대 학장을 지냈고, 1972∼1980년 홍익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1973년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이사장, 1975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1980년 이후 변호사로 활용하며 홍익대학교 명예 교수로 있었다. 2008년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8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법철학개론≫(1955), ≪민법학 개론≫(1962), ≪법철학적 인간학≫(1978) 등이 있고, 소설 ≪교육 가족≫(1959), 자전 소설 ≪청산곡≫(1962), ≪사직 이유서≫(1980)가 있다. 수필집으로 ≪객설록≫(1962), ≪낙엽의 자화상≫(1977), ≪나의 인생관, 작은 언덕에 서서≫(1978), ≪깨어진 그릇≫(1980)이 있다.
엮은이
최은영은 1974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 서정소설 연구−이효석, 이태준, 김동리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와 경희대, 카이스트 강사로 재직 중이다.
차례
≪객설록≫
나의 雅號
밤을 새워 읽던 책
나의 스승
些少한 眞實
나의 遍歷
우리 國語
사랑과 平和
≪낙엽의 자화상≫
落葉의 自畵像
부끄러운 解放
風流의 길
茶山·秋史·草衣의 風流
나의 宗敎
더 높은 곳에
文學과 法學
≪작은 언덕에 서서 : 나의 인생관≫
山에서 느끼는 세 가지 幸福
大自然을 상대하는 기쁨
韓國 속의 世界
시련을 이겨 내는 끈기
現代 社會에서의 文學의 使命
八萬大藏經을 새기는 마음
宗敎란 이름
환하게, 신나게, 멋지게 살자!
未安합니다
마음의 化粧
法이라는 글자에 자랑이 있을까?
≪깨어진 그릇≫
깨어진 그릇
나를 손가락질해 다오
마음의 부자
금도(今道)네 콩나물국
나의 고대(高大) 시절
문학과 법학
상록수(常綠樹)
사랑과 보람
주름살을 말한다
단군 신화와 인간 사상
해설
지은이 소개
엮은이 소개
책속으로
나는 일제 때에 그들에게 붙어서 민족의식을 상실한 것을 해방 직후에는 부끄럽게 생각했었으나 그 뒤 얼마 안 가서 나의 일제 행각에 대한 정당한 변명을 마련했읍니다.
그것은 시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나는 4·19 이후에 그때까지의 비교육적인 처신을 일시 후회했었읍니다. 다시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하기도 했읍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나는 다시 곡학아세(曲學阿世)의 길을 걸었읍니다.
오늘의 우리나라에 진정한 학문이 없고 진정한 교육이 없는 것은 모두 나와 같은 파렴치한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길이 참회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기를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결의가 과연 얼마나 오래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읍니다. 나는 심한 건망증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다시 그 더러운 처세 철학을 소생시켜 추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동료들은 나를 꾸짖어 주시고 제자들은 나를 손가락질해 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손가락질해 다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