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진보적 매체 ≪사상계≫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널리 알려진 장준하(張俊河, 1918∼1975)는 무장 항일 투쟁을 준비해 온 광복군으로서,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재야인사로서, 그리고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한 정치인으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특히 장준하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훼손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이를 뿌리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군사독재로 이어진 반민주적 장기 집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을 절대 지상의 과제로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4·19혁명(1960)이 이승만을 비롯한 타락한 위정자를 일소하고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 과도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애초 약속대로 민정으로 이양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직접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장준하는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해방 공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통일 운동의 공과에 대해 장준하는 매우 객관적 태도로 성찰하고, 몽양과 백범으로 대표되는 두 통일 운동 세력이 범민족적 조직적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인다. 무엇보다 해방 공간에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통치 점령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응을 펼치지 못한 점을 직시하는 대목은 냉전 제체 아래 민족의 분단을 어떻게 현명하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폭넓은 현실 인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00자평
타락한 권력에 맞서 민주 대도를 내세웠던 장준하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글 10편을 가려 엮었다. 군부 독재에 대한 거침 없는 비판, 민족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기획은 그의 냉철한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염원은 소멸되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를 향한 신생의 기운을 북돋우고 있다.
지은이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당시 한문 지식뿐만 아니라 신문명을 수용하는 데도 적극적 태도를 보였는데, 장준하의 회고에 따르면 시골 벽지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받아 볼 정도로 당대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일제에게 불령 불온자인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장준하의 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시위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항일 저항 의식을 보였다.
이처럼 장준하는 성장 환경 속에서 할아버지의 지식인적 삶으로부터 이후 ≪사상계≫의 잡지를 발간하게 되는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항일 저항 의식과 불의에 맞서 선(善)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민족의식과 인류 보편적 민주주의를 향한 정신을 함양하게 된다. 장준하의 이러한 모습은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그가 다니는 평양의 신성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연루돼 일본 경찰에 체포된 데 대해 석방을 요구하는 수업 거부와 동맹 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장준하에게 일제에 맞서 항거한 본격적 투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성중학을 졸업한 이후 장준하는 평북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의 교원이 되는데 바로 이때 스승과 제자로 만난 사람이 장준하의 반려자 김희숙 여사다. 3년간의 신안소학교 교원 생활 후 장준하는 1년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유학에서 그는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장준하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1940년대 초 일제의 군국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더니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 총동원 체제 아래 피식민지는 일제의 전쟁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무렵 장준하는 김희숙과 결혼(1943)을 한 후 일본군의 ‘학도지원병’으로 지원한다(1944).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참전하게 된 장준하는 동료 조선인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을 했고 온갖 난경 속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장준하는 그보다 먼저 일본군에서 탈출한 그와 같은 조선인 학병 김준엽을 만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무려 6000리(240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심하고 일본군과 마적의 위협을 뚫고 마침내 임시정부에 들어가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촨분교 내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해 군사교육을 받는다. 이곳에서 그는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신학, 철학, 사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토론과 학습 자료를 만들며 문무를 겸비해 나간다. 특히 중국 서안에서 미국 OSS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한반도에 기습 침투하는, 오늘날 공수특공대와 같은 게릴라식 전투를 주도면밀히 준비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작전 개시 5일 전,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중단된다. 이에 대해 장준하는 체험 수기 ≪돌베개≫에서 “떳떳한 승리의 군대로 조국에 개선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국내 치안을 주도해 보려던 꿈이 잠들고 말았다”며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일제가 패전한 후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장준하는 해방 공간의 혼돈 속에서 못다 한 신학 공부를 했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2년 9월 피난지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 창간에 이어 1953년 4월 ≪사상계≫를 발행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발행된 ≪사상계≫는 척박한 한국 언론의 토양을 객토하고, 무엇보다 환멸과 허무에 침잠해 있던 한국 지성사에 신생의 활력을 북돋았다. ≪사상계≫의 역할은 상상 이상 큰 것이었다. ≪사상계≫는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중심에 놓고 일체의 타락한 정치사회 세력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5·16군사 쿠데타 이후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가 장준하와 그의 ≪사상계≫를 탄압하기 위해 온갖 정치적 박해와 음모를 가했다는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암행 기록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사상계≫의 활동은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 부문의 수상자로 장준하가 선정되면서(1962) 국제적 명성과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장준하의 이러한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데, 이에 대해 장준하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친일파, 정치적 무능력, 반민주주의 독재 등)를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재야 민주주의 인사를 통합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박정희의 정치적 탄압으로 옥중에 있을 때 옥중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고(1967), 마침내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현실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유신 체제 아래 장준하는 ‘유신헌법 개헌 청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1973)을 벌이면서 숨죽이고 있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를 표면으로 솟구치도록 하는 도화선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장준하는 반민주주의를 획책하고 정치사회적 억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박정희 정부를 향한 준열한 비판과 저항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박정희 정부의 눈엣가시였던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에서 등산 도중 실족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1975).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는 데 한계가 있던 터에, 2012년 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었는데 그의 두개골이 함몰된 것이 드러나면서 두개골 정밀 감식을 거친다. 그에 대해 2013년 3월 26일 백범기념관에서 서울대 의대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의 결과 보고가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두개골 함몰은 추락에 의한 골절이 아니라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이고, “장준하 선생은 제3의 장소에서 살해당하고 시신이 옮겨온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로써 장준하의 죽음은 등산 도중 실족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 때문에 장준하를 살해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누구인가? 이 점은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 있다.
광복군으로서, 재야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장준하는 한국 현대사에서 그가 말한 대로 ‘민주대도(民主大道)’를 향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엮은이
고명철은 1970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쟁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비평사와 소설을 연구하고 있다. 199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 세계>가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 ≪리얼리스트≫, ≪바리마≫ 및 계간 ≪실천문학≫, ≪리토피아≫ 편집위원과 ‘한민족문화학회’(등재학술지 ≪한민족문화연구≫ 발간) 회장을 지냈고, 현재 ‘트리콘’ 대표로서 유럽중심주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문학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뼈꽃이 피다≫,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순간, 시마에 들리다≫, ≪논쟁, 비평의 응전≫, ≪칼날 위에 서다≫, ≪비평의 잉걸불≫, ≪1970년대의 유신 체제를 넘는 민족문학론≫, ≪‘쓰다’의 정치학≫ 등이 있다.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차례
사상계지 수난사
나의 사랑하는 생활
시민이 읽은 30년간의 신문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민족 통일 전략의 현 단계(초안)
민족주의자의 길
죽음에서 본 4·19
혁명상미성공
실질적 민정 복귀를 위한 범야 재단합 투쟁을 호소한다
한·일 관계의 기형화와 전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5·16 군사혁명이 왜 참자유와 민권의 그것이 못 되었나? 그들이 표방한 혁명 공약은 엄연히 역사 앞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왜 그 담당자들이 권좌에서 물러서는 날로 5·16은 겨레의 뇌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나? 5·16은 피로 바꾼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5·16은 공의(公義)를 위한 희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5·16의 공약은 피로 바꾸어 얻은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피흘림이 없는 혁명은 생명이 없다는 산 증거이겠다.
<죽음에서 본 4·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