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박학했던 위당 정인보는 특정 분야에 머무르는 일 없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종횡무진 글쓰기를 펼쳐 나갔다. 그러니 그가 펼쳐 나간 산문 세계를 특정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는 ‘조선의 얼’을 내세웠던 역사가였으며, 다산의 ≪여유당 전서≫ 등을 펴낸 고서 정리자였는가 하면, 신문 매체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던 언론인이었고, 역사적 현장에서 비문·추도문을 도맡았던 문장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강화학파의 마지막 계승자로서 ≪양명학연론≫을 써낸 사상가이자, 수려한 문체로 ≪관동해산록≫과 ≪남유기신≫을 써낸 여행가였다. 운문과 관련된 사항을 배제하고도 이러했으니 정인보는 정녕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다양한 범주에서 작성된 위당의 산문들 가운데 역사가·조선고서 정리자·언론인, 문장가·국가 기틀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작품들 중심으로 가려 뽑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다양한 면모는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귀일하는데, 그 지점에서 오롯이 빛나는 것이 위당의 민족의식이다. 결국 위당 정인보는 한 가지 사상을 다양한 맥락에서 펼쳐 놓은 셈이 되겠고, 이는 다시 그의 박학을 증명하는 바가 될 터이기도 하겠다.
200자평
다방면의 학문에서 팔방미인의 면모를 보인 위당 정인보는 글쓰기에서도 역사 논문을 비롯해 각종 언론 매체를 활용한 논설, 비문 및 추도문, 기행문 등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그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정신이 있으니 바로 민족의식이다. 그의 수필은 다양한 형식과 소재를 통해 ‘조선의 얼’을 찾아내고 민족의식을 고취한다.
지은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鐘峴, 현 종로성당 부근)에서 정은조(鄭誾朝)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열다섯 살이 되었던 1907년 위당은 충북 진천으로 이사했다. 위당 집안은 한국 양명학을 이어 왔던 몇 가운데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위당 자신은 열세 살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문하로 들어갔던바, 난곡은 당대 한국 양명학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난곡이 별세했던 1939년까지 남다른 사승 관계를 지켜 나갔으니, 위당 사상의 기본좌표는 양명학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열일곱 살 되던 1909년 위당은 단발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위당은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로 건너가서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原堡)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때 삼원보에는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주동이 되어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한 신흥 강습소가 세워졌는데, 위당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정리해서 여기에 군자금으로 건넸다. 1913년에는 상해로 건너가서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인 성씨가 산고(産苦)로 별세한 까닭에 위당은 상해에 머무른 지 7개월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위당은 검은 옷차림으로 일관했던바, 여기에는 부인의 죽음과 더불어 나라 잃은 상황까지 아울러 곡한다는 의미가 겹쳐 있었다. 1922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부임한 뒤에도 그의 상복 차림은 여전히 이어졌다.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 유릉지문(裕陵誌文)을 찬술했으며,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도 국학과 동양학을 강의했다.
위당의 이력에서 ≪시대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 활동도 빼놓기가 곤란하다. 빼어난 논설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최남선,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천재로 이름을 날렸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저술인 ≪조선 고전 해제≫라든가 ≪양명학 연론≫, ≪오천 년간 조선의 얼≫ 등을 남긴 것도 이 시기다. 1931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경매물로 나오자, 이를 민족의 수치로 여겨 충무공의 유적을 보존하는 한편 현충사를 조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으며, 1935년에는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함으로써 실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38년 일제가 조선어 강좌를 폐지하고, 조선학(국학)을 탄압하자 위당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고, 자신을 향한 일제의 회유와 압박이 거세지자 경기도 양주군으로 낙향했다가 1943년에는 전라북도 익산의 산속으로 거주지를 옮겨 은둔에 들어갔다.
해방을 맞이하자 국학대학 설립에 나섰고, 1947년 국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얼이 올곧게 세워져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판단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1년여간 감찰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 그의 날카로운 사정(司正) 활동에 의해 1949년 2월 조봉암 농림장관이 물러나게 되었고, 6월에는 임영신 상공장관이 경질되었다. 임영신 장관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게 되자 위당은 감찰 위원장 자리를 사임했다. 사임 후 국학 연구에 매진했던 위당은 1950년 7월 31일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에게 피랍(被拉)당했고, 납북 중 58세를 일기로 10월 24일 병사했다. 위당의 시신은 현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199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당이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바는 “내 뜻을 굽히지 않고 내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不降其志 不辱其身)”였다고 한다.
엮은이
홍기돈(洪基敦)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199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학 비평가로 등단했고, 2003년 중앙대학교에서 <김동리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평론집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백의), ≪인공 낙원의 뒷골목≫(실천문학), ≪문학 권력 논쟁, 이후≫(예옥)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는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소명출판), ≪김동리 연구≫(소명출판)를 펴내었다. ≪비평과 전망≫, ≪시경≫, ≪작가세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차례
檀君 開天과 十月
丹齋와 史學
丙子와 朝鮮
朝鮮 佛敎의 精神 問題
朝鮮 古書 刊行의 意義
民族的 羞耻
誠金 一萬 圓
마음의 節制
私令을 排除하고 公令 遵行의 官紀를 세우자
百八煩惱 批評에 對하야
閑山島 制勝堂 碑文
露梁 忠烈祠 碑文
並川紀義碑文
<大東輿地圖>
≪擇里志≫
五千 年間 朝鮮의 ‘얼’
터무니없는 거짓을 바로잡는 글(正誣論)
부록 : <터무니없는 거짓을 바로잡는 글>의 원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를 아는 者ㅣ 누구냐 알랴는 者ㅣ 누구냐. 또 우리를 모르는 者ㅣ 누구냐. 삼가 告하노니 우리는 突然한 우리가 아니다. 멀리 所本함이 잇다. 오래 所歷함이 잇다. 盛衰 그 所自함이 잇고 榮悴 그 所因함이 잇다. 或伸 或蹙, 或强, 或弱이 그 故ㅣ 없을 리 없고 哀, 樂, 舊, 屈과 時困, 時紓함이 다 徒然한 배 아니니 五千이 少數이냐. 年代와 함께 百折, 千回하며 나려올 제 어떤 것이 우리의 長點의 發露이며 어떤 것이 우리의 短處의 破綻이냐. 어찌하다가 우리로서 우리를 모르고 또 알랴고도 하야 보지 아니하얏느냐. 返古라면 或 退蹙도 같다. 그러나 이 古는 묵고 썩은 후락한 古가 아니라 解釋하면 곧 ‘本我’라 함과 같으니 末流의 弊 그 本을 違棄하게 된 뒤는 返古ㅣ 아니고는 本我를 自證할 道理 없고 이 自證이 아니고는 언제나 兪轉, 兪迷하고 말 것이라. 그런즉 우리 自體에 對한 至纖, 至悉한 基本의 調査, 곧 우리로서 우리의 正實로 도라가는 미천이다. 우리의 紛郁한 芳香이 이제 와 덤덤한 것 같음은 오래 두고 내버려 헐어젓든 탓이니 屑片으로라도 모두어 보라. 東盟古日의 풍기든 그것이 예런 듯 나타날 줄 안다.
<朝鮮 古書 刊行의 意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