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조병화의 수필에 대한 태도는 한결같다. 그의 수필은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그의 시와 그림에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의 수필이 문자보다는 말의 운용 체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말하듯이 쓰는 창작 태도는 그의 몸과 일상의 현실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에 문자의 관념성이나 복잡 미묘한 세계보다는 쉽고 질박한 세계를 지향한다. 그의 수필의 이러한 창작 태도는 양가성을 드러낸다. 하나는 삶의 실존과 밀착된 형식과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삶을 긍정하고 안위를 긍정하는 과정에서 고통의 내면화와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흔히 삶의 실존과 밀착된 경우에는 고통의 내면화와 갈등이 뒤따를 수 있지만 그의 수필에서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통의 내면화와 갈등 없이 어떻게 삶의 실존과 밀착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삶의 태도에 있다. 그가 삶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따라 고통과 갈등의 유무는 결정될 수 있다. 그의 수필에 고통의 내면화와 갈등이 없는 이유는 그가 삶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고통은 그의 삶의 한 부분이지만 그는 그것을 전경화하거나 내면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서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의지로 삶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여기에 대해 강한 자의식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그의 수필에는 삶의 과정 속에서 체험한 다양한 현실 혹은 현실의 소재들이 하나의 질료로 들어와 있다. 이 질료는 수필 자체의 내적 질서를 드러낸다기보다는 그것과 분리된 그의 인격적인 여러 상태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서는 물론 그 체험의 양태가 쉽고 질박한 진술을 통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그의 쉽고 질박한 진술 속에는 자신의 정서에 대한 솔직함과 삶에 대한 긍정과 여유가 담겨 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수필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속성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보편적인 속성이 그의 수필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일정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의 수필의 이러한 흐름은 어느 때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상을 겨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을 겨냥하기도 한다. 그의 수필의 세계는 그 자신과 분리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서와 그 의미를 추구하는 하나의 흐름을 견지해 왔지만 그 흐름의 이면에는 다양한 변주의 세목들이 내재해 있다. 그와 수필이 분리되지 않은 채 그 흐름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곧 수필의 세계가 삶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삶 혹은 인간의 삶이란 시간의 흐름에 다름 아니다. 시간이란 그의 주관에 의해서 얼마든지 그 의미가 바뀔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탄생−성장−소멸’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탄생에서 성장으로 다시 성장에서 소멸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의식이란, 더욱이 삶을 자신의 수필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흐름의 궤적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0자평
조병화의 수필은 그의 시나 그림과 마찬가지로 쉽고 질박하다. 평범한 삶의 과정에서 체험하는 현실에 삶에 대한 긍정과 여유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두는 주제는 ‘시간과 죽음’으로 요약된다. 그의 수필은 어떠한 가식도, 기만도 없이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세상과 화해하고 소통한다.
지은이
조병화(趙炳華) 시인의 호는 편운(片雲)이다. 그는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부친 조두원(蘭有 趙斗元, 본관 한양)과 모친 진종(陳鍾 , 본관 여양)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8년 8세 때 용인 송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모친을 따라 서울로 이사해 미동공립보통학교(渼洞公立普通學校)를 다녔다. 1936년 16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보통과에 입학해 1943년 3월 23세에 경성사범학교 보통과 및 연습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이과에 입학해 물리, 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 9월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유(敎諭)로 교단 생활을 시작해 인천중학교(仁川中學校, 6년제) 교사, 서울중학교(6년제, 현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서울중학교 재직 시절인 1949년 7월에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출간해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울러 1955년부터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에서 시론을 강의하다가 1959년 서울고등학교를 사직하고 경희대학교 교수(시학 교수, 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원장 등 역임)로 부임했다. 이후 1981년부터 인하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 대학원원장, 부총장 등 역임)로 재직하다 1986년 8월 31일 정년 퇴임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는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해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김소월이 전원 서정을 바탕으로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데 비해 그는,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 허무와 고독으로서의 인간 존재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쉬운 낭만의 언어로 그려 냈다. 또한 그는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림 역시 시 세계와 흡사해 아늑한 그리움과 꿈이 형상화된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상을 받았는데 아세아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74), 서울시문화상(1981),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대한민국문학대상(1992),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1996), 5·16민족상(1997) 그리고 세계시인대회에서 여러 상과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이렇게 받은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 활동을 돕기 위해 1991년 5월 2월 편운문학상(片雲文學賞)을 제정, 시행했다. 이 상은 2016년까지 26회에 걸쳐 71명의 시인, 평론가들과 시문화단체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그의 사후 유족들이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3년 1월 8일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창작 시집 53권,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화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등을 비롯해 총 16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2013년 3월에 그의 문학을 집대성한 ≪조병화 시전집≫과 ≪조병화의 문학 세계 Ⅱ≫가 2014년 10월에는 ≪조병화의 문학 세계 Ⅲ≫이 출간되었다.
엮은이
이재복(李在福)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상 소설의 몸과 근대성에 관한 연구>(2001)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문화계간지 ≪쿨투라≫, 인문·사회 저널 ≪본질과 현상≫, 문학계간지 ≪시와 사상≫, ≪시로 여는 세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에 제9회 고석규비평문학상과 제5회 젊은평론가상, 2009년에 애지문학상(비평), 2013년에 제23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한국 현대 시의 미와 숭고≫,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몸과 그늘의 미학≫ 등이 있다.
차례
아웃사이더와 여수(旅愁)
동방 살롱
시는 아름다운 철학
시를 아는 시인
나의 食性
돌에 새긴 짝사랑
왜 사는가
고독한 靈魂
파이프
자연스러운 것, 세련된 것, 수양된 것
귀향 풍경
어머님은 나의 종교처럼
나의 서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기쁨의 발견, 그 희열(喜悅)의 창조. 그것만이 시간에서의 탈출, 범속에서의 초탈(超脫), 생과 사에서의 승리, 그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더구나 오늘날 같은 빽빽한 물질의 현실 속에선.
사방 갇혀서 살고 있는 듯한 이 변화 없는 풍속의 매일매일의 생활사, 그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로 이 ‘기쁨의 발견’, 그 희열의 창조이다. 온 우리 겨레, 주변 사람들이 각자 각자, 각자 각자가 놓여져 있는 자리에서 각자 각자에 맞는 각자 각자의 기쁨을 발견, 그 희열을 창조해 나간다면 이 사회, 이 시대가 얼마나 정화될까. 그렇게 되면 각자 각자 자기 기쁨, 자기 보람, 자기 만족, 자기 가치를 살아가는 깨끗한 사회−남의 일에 시기, 질투, 모함을 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믿어진다.
실로 여유가 없는 생활들을 우리 현대인은 쫓기며 쫓기며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간에. 이러한 쫓기는 시간 속에서 쫓기지 않는 시간의 여유를 만드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자기만의 시간을 만든다는 것, 역시 기쁨의 발견이다. 홍수처럼 떠내려가는 지구, 37억 인구의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 하루의 단 한 번이라도 자기를 보고, 자기를 다듬고, 자기를 가꾸어 가는 생활, 적어도 이건 있어야지 하면서 매일 하루를 살아간다.
<아웃사이더와 여수(旅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