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조선 민족 갱생의 도≫는 선구적인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1930년에 발간한 에세이집이자 논설집이다. 외솔 선생이 이 책의 글들을 집필한 1926년은 33세의 나이로 일본의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당시 젊은 지식인으로서 우리 민족이 처한 일제 치하의 암담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다시 살아날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표제에 “갱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외솔 선생은 당시 우리 민족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외솔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민족이 갱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의 실천에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민족적 질병의 진찰’, 제2장은 ‘민족적 쇠약증의 원인’, 제3장은 ‘민족적 갱생의 원리’, 재4장은 ‘민족적 갱생의 노력’이다. 이 가운데 제1장과 제2장은 우리 민족이 죽음의 상태에 빠져든 원인을, 제3장과 제4장은 그런 상황을 극복해 민족이 갱생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각 장들은 인과론적인 구성에 의해 유기적으로 연관되면서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대부분의 글들이 강건하고 논리적인 문체를 보여 주지만, 때로는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문장들을 구사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외솔 선생이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민족 갱생의 방안은 문화적인 것인 동시에 물질적인 것이다. 또한 정신적인 것인 동시에 육체적인 것이다. 이들 사이의 균형감 있는 생각과 실천 방안들은 오늘날 상황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족적 이상의 중요성이 그의 시대나 지금 시대나 다를 수 없으며, 각종 불합리한 생활의 개선이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갱생을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민족 대약진을 위한 나침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외솔 최현배의 대표적인 에세이집이자 논설집인 ≪조선 민족 갱생의 도≫의 1962년판이다. 우리 민족의 장점과 단점,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그를 통해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강건하고 논리적인 문체로 문제와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문장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지은이
외솔 최현배 선생은 1894년 갑오개혁과 농민 혁명이 있던 해에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1899년(5세)부터 8년 동안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다가, 1910년(16세)에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5년 만에 졸업을 한다. 이 시기에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을 배웠는데, 이때의 경험이 최현배 선생의 앞길에 매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했다.
1915년(21세)에 일본 히로시마사범학교 문과 제일부에 입학하고, 1919년(25세)에 졸업을 하면서 수신, 교육, 일어, 한문, 번제경제 등의 교원증을 받았다. 이듬해에 경남 사립 동래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2년(18세)에 일본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입학해 1925년(31세) 철학 개론과 심리 및 논증의 고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받으면서 졸업을 했다. 바로 그해부터 논설적 에세이집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구상하고, 1926년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서 연재해 세간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26년(32세)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부임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30년(36세)에는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출간했는데, 출간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교양 도서로 애독했는데, 심지어는 일본 사람들도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처럼 여겼다고 한다.
1938년(44세)에 ‘흥업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연희전문대학에서 강제 사직을 당했다. 최현배 선생은 흥원 경찰서를 거쳐 함흥 감옥으로 이감되어 한 해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영어 생활을 했다. 그 가운데서도 ≪글자의 혁명≫을 집필해 한글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38년(44세)에는 ≪한글갈≫을 출간하면서 이후 한글 연구에 몰두했다. 1941년(47세)에 연희전문학교에 복직했으나, 이듬해에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함흥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시작해 광복 이후에 풀려났다.
1945년(51세) 광복이 되자, 조선 어학회 상무이사를 맡고 국어 교육에 힘을 썼다. 같은 해에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을 하면서 당시 불모지와도 같았던 국어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열성을 다했다. 만 3년간의 편수국장을 마치고 ‘한글 전용 촉진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글 전용을 국회에서 법령으로 제정하도록 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또한 1946년(52세)에는 ‘한글 가로글씨 연구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말본 강사를 했다.
1949년(55세)에는 ‘조선 어학회’를 ‘한글 학회’로 개칭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1951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취임해 전쟁 와중에 국어 교육의 기본을 바로잡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60세)에는 연희대학교 교수로 다시 부임하면서 학장직을 맡고, 이듬해에는 부총장의 보직을 수행하면서 같은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7년(73세)에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를 창립해 부회장에 취임해 한글 정신의 근간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각종 활동을 했다. 1962년(68세)에는 ‘한국 기계화 연구소’를 신설하고 소장직을 맡았으며, 같은 해에 연세대학교 이사로 취임해 활동을 이어 나갔다.
엮은이
이형권(李亨權)은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1998년 ≪현대시≫ 우수 작품상으로 등단한 문학비평가다. 현재 현대문학이론학회 회장, 어문연구학회 부회장, 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 계간 문예지 ≪시작≫ 편집주간, ≪애지≫ 편집위원, 대전 문화재단 자문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 ≪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감각의 발명≫, ≪공감의 시학≫ 등이 있다.
차례
중간 머리말
머리말
緖言
第一章 民族的 疾病의 診察
第二章 民族的 衰弱症의 原因
第三章 民族的 更生의 原理
第四章 民族的 更生의 努力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近代 朝鮮 民族의 生活을 觀察하건대, 살아 계시는 父母보다 죽은 父母를 놀랍게 여기는 風이 있으며, 子孫의 將來 發展을 圖하기보다도 차라리 죽은 祖先을 섬기는 것을 重히 여기는 風習이 있다. 우리 近代의 朝鮮 사람에는 子孫의 敎育 問題보다 祖先의 奉祭祀와 名山 잡기가 큰 義務이며, 關心處이었다. 그 祖先의 祭祀로 因하여 每年 農牛나 田土를 팔아 쓰는 地方 특히 忠淸道가 尤甚함이 없지 아니하다. 全 朝鮮 內는 每年에 十五 回 乃至 二十 回의 祭祀를 지내기에 온 집안 眷口 더구나, 婦人네들이 말할 수 없는 奔走한 時日을 보내는 집이 셈 없이 많을 터이다. 婦人의 家庭生活의 重要한 部分은 여기에 虛費되고 마니, 어느 틈에 사람다운 自己 修養에 時間을 쓸 餘裕가 생기리오?
<民族的 疾病의 診察−性質의 陰鬱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