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홍난파는 우리에게 음악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십 권의 작곡집을 출간하고, 지휘자로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세만큼이나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우리는 어느새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의 노랫말과 곡조를 입안에서 흥얼거리게 된다. 그가 떠난 지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좋은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회자된다고 했던가. 그를 대표하는 곡들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곡이라고 했을 때, 그의 노래는 지금도 우리의 역사와 민족과 함께 숨 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대가 저물어도 민족의 정서 속에 깊게 내재화된 그의 음악, 그는 음악가라기보다 한 시대 민족의 정서와 감정의 연대를 읽어 내는 선각자이자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음악이라는 도구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시대의 조류에 부응해 국민의 의식을 계몽하기 위해서 기꺼이 붓을 들었을 것이다. 구한말에 태어나서 3·1 운동 무렵 청년기를 보내고 새로운 학문이나 서양의 문물에 눈을 떴기에 지식인의 선각자적인 자각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문학적 글쓰기로 조선의 계몽과 개화에 힘썼다. 민족 수난기를 고스란히 체험한 그는 국가와 민족이 없는 음악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했을 것이다. 서양 음악을 배웠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민족 고유의 전통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조선의 음악가로서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치열한 정신을 우리 민족에게 전염시키기 위해 문학적 글쓰기를 필연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여러 종류의 글들을 문학의 사정권 내에서 조명할 수 있는 이유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진실의 차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배경이 없는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는 힘이 든다”라고 했던, 그의 잠언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200자평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으로 유명한 홍난파는 음악뿐 아니라 시, 수필, 평론, 소설 등 다양한 문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예술가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두드러지는 그의 글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 속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각성시킨다.
지은이
홍난파(1898∼1941)는 1989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홍순(洪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후(永厚)이고, 난파(蘭坡)는 호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2세(1912)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서 바이올린 수업을 시작한다. 15세(1913)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를 공부하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축하 무대에서 독주를 한다.
16세(1914)에 김상운과 결혼한다. 17세(1915)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교사로 2년간 근무한다. 18세(1916)에는 홍난파가 쓴 최초의 곡인 창가 <야구전>을 발표한다. 19세(1917)에 의학에 뜻을 두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1년 후 중퇴한다. ≪악전대요≫(박문서관), ≪명곡신집(明曲新集)≫(박문서관), ≪통속창가집≫(박문서관), ≪간이무답(簡易舞踏) 행진곡집≫(박문서관), ≪말 잘하는 사위≫(광익서관), ≪조선 정악보≫(광익서관)를 펴낸다. 20세(1918년)에 부인 김상운이 사망한다. 도쿄의 우에노(上野)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21세(1919)에 도쿄에서 음악, 미술, 문학의 예술 잡지인 ≪삼광≫(삼광사)을 창간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해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한다.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주간이 되어 음악 보급 운동을 전개한다. <서울 계신 K 형께>(≪삼광≫, 창간호), <북변잡기(北邊雜記)>(≪매일신보≫ 8월 11일∼8월 19일) 등의 수필과 단편 소설 <바람과 빛>(≪삼광≫, 창간호), 음악 평론인 <창가 유희의 교육상의 효능>(≪삼광≫ 2호)을 발표한다. 22세(1920년)에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도쿄 복학이 거절된다. 소설 ≪허영(處榮)≫(≪매일신보≫, 9월 3일∼11월 18일)을 60회 발표한다. 단편 소설 <처녀혼>(≪삼광≫, 3호)을 출간한다. 이 책 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으로 멜로디를 게재하고 김형준(金亨俊)이 작사해 <봉선화>가 탄생하게 된다. 9월 도쿄에서 ‘폴란드 고아 구제 대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이를 홍난파는 최초의 연주회라 했다. 수필 <석왕사유기(釋王寺遊記)>,(≪삼광≫, 3호), 번역 소설 <빈인(貧人)>(≪삼광≫, 3호)을 각각 발표한다.
23세(1921)에 연극단의 음악과 연출을 맡았다. 자작 소설 ≪최후의 악수≫(≪매일신보≫, 4월 29일∼6월 7일)을 쓰고, 이를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자신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24세(1922)에 전문 음악 연구 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27세(1925)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한다. 세계 명작 가곡집(연악회)을 출판한다. 28세(1926)에 일본의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한다. 세계 악성집(연악회)을 출판한다. 29세(1927)에 도쿄 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한다. 31세(1929)에 도쿄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상권을 간행한다.
32세(1930)에 중앙 보육학교 음악과 교수가 된다. 33세(1931)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가 된다.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으로 2년간의 유학을 떠난다. 35세(1933)에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된다.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하권을 출판한다. 이은상의 시조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연악회) 제1집을 발행한다. 36세(1934)에 경성보육과 이화여전 강사가 된다. 빅터 레코드사의 음악부 고문을 지낸다. 12월 27일 소프라노 이대형(李大亨)과 재혼한다.
38세(1936)에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된다.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해 지휘자가 된다. 39세(1937) 성서(成西)트리오 3중주단을 조직해 경성방송국을 통해서 실내악 발전에 기여한다. 흥사단 사건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 4개월간 수감된다. 40세(1938)에 경성 음악 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다. ≪음악만필≫(영창서관)을 간행한다. 41세(1939)에 경성 방송 관현악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한다. 43세(1941)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타계한다.
엮은이
김나영(金那暎)은 경북 영천에서 1961년에 출생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대학원에서 <김춘수 시의 비동일성 연구>(2014)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에 ≪예술세계≫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을 했다. 2005년과 2008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개인 시집 발간 창작 지원금을 수혜받았다. 2013년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창작 지원금을 수혜받았다. 2006년에 첫 시집 ≪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를 발간했고, 2010년에는 제2시집 ≪수작≫(애지)을 발간했다. 이 시집은 2011년 한국도서관협회의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현재 한양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사라가는 法
樂壇의 뒤에서
樂壇 뒤에서(續)
유모레스크
째스나 流行曲이 一般 家庭에 끼치는 影響
東西洋 音樂의 比較
五月 女人의 손, 아름다운 象牙
첫 舞臺의 記憶
世界의 樂聖
世界의 樂聖
音樂 夜話-이탈리아 소녀
音樂 夜話-眞珠의 선물
音樂 夜話-榮光스런 逢變
音樂 夜話-술 먹지 않는 樂器
캔사스 역의 봉변
서울 계신 K 형께
음악가가 되려면
음악가로서 본 世人의 청각
狂想小曲
음악
가정과 음악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日前에 엇던 女子講習院 主催로 所謂 ‘世界音樂舞蹈大會’라는 것을 開催한 일이 잇슴니다. 나는 그 當夜에 볼일이 잇서서 音樂會塲인 靑年會舘에 갓다가 ‘프로그람’ 한 張을 엇어 보앗슴니다. 나는 놀나지 안을 수 업섯슴니다. 그 音樂會를 主催하신 主催者 側의 엇던 분도 맛나 본 일이 업섯던 나로서 그날 ‘프로그람’ 紙上에 내 일홈과 曲名이 쓰여 잇슴을 볼 에 健眼者인 나로서도 再三 刮目하고 喫驚하지 안을 수 업섯슴니다. 出演해 달나는 請求가 업슨 以上에 勿論 承諾 與否도 업섯슬 것이며 自己의 演奏 科目이 잇슬 줄도 모를 것이 아님닛가. 그러나 事實인즉 千萬想外에 이갓치 姓名과 曲名이 함 明記되여 잇스니 이것을 누구의 失策이라 할가요. 는 不注意라 할가요? 이러한 줄을 모르는 數百 聽衆은 내가 出演者의 한 사람으로 씨워 잇스면서 出演치 안는 것을 볼 에 憤怒와 不平을 품엇슬 것은 事實임니다. (그것은 그 當塲에서 證明된 事實임니다만은) 나는 主催者 側의 無智를 責함보다도 오히려 그네들의 無經驗한 것을 가엽시 아럿슴니다.
<樂壇의 뒤에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