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경세시기승
설을 맞는 마음 1. 청나라 연경의 설날 풍경
취해도 용서가 되는 날
밤새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폭죽이 천둥을 친다. 배갈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가루분 파는 장사꾼의 호객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동틀 무렵 새 옷을 차려입고 조상님께 제사를 올린다. 집안이 모여 세배하고 찐 떡과 가루 국을 나눠 먹는다. 청대 연경 지역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제경세시기승≫은 정월(正月) 원단(元旦)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세시풍속의 목적은 태평안녕(泰平安寧)과 벽사진경(辟邪進慶).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이다. 절친한 친구가 아니라도 술 석 잔을 대접하며 흐드러지게 취해도 용서가 되는 날이었다.
원단(元旦)
제석(除夕)이 지나고 밤이 되어 자시가 처음 시작되면 문밖에는 화려한 보거(寶炬)가 다투어 빛나고 옥가(玉珂) 소리가 다투어 요란하다. 가마가 빽빽하게 많이 모이고, 수레나 마차가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낸다. 백관들이 조정에 들어가 원단을 축하한다. 폭죽 소리가 마치 파도가 치고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데 조야(朝野)에 가득 차 밤새도록 멈추지 않는다. 더욱이 묘(廟) 아래에서 들려오는 박랑북[博浪鼓] 소리, 과자(瓜子)를 팔고 근심을 푸는 소리, 강미(江米)로 만든 배갈을 팔면서 얼음 잔 부딪치는 소리, 계수나무꽃[桂花] 머릿기름을 팔면서 아름다운 아가씨를 부르는 소리, 향채 가루분 파는 소리와 폭죽의 소리가 서로 위아래로 어울려 가히 들을 만하다. 백성들은 새 의관을 입고 패물과 띠를 엄숙히 갖추고 신령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린다. 지전과 비단을 태운 후 동틀 무렵 온 집안이 모여 세배하고 초반(椒盤)을 바치고 초백주(椒柏酒)를 따르며 찐 떡을 배불리 먹으며 가루 국을 마신다. 문을 나서 새해의 기쁨을 맞이하고 약왕묘[藥廟]에 참배하며 영당(影堂)에 배알하고 명함을 갖추어 절일을 축하한다. 길에서 친우를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길게 읍하면서 축원해 말하길 “새해 복 받으세요” 한다. 술상을 차림에 곧 꽃을 조각하고 과일을 그려 만든 다식과 십금화과(十錦火鍋)를 함께 올린다. 탕점(湯點)은 곧 아유방보(鵝油方補), 저육만수(豬肉饅首), 강미고(江米糕), 황서탁(黃黍飥)이 있고, 술안주로는 곧 엄계납육(醃鷄臘肉), 조목풍어(糟鶩風魚), 야계조(野鷄爪), 녹토포(鹿兎脯)가 있고, 과품(果品)으로는 곧 송진연경(松榛蓮慶), 도행과인(桃杏瓜仁), 율조지원(栗棗枝圓), 사고경병(楂糕耿餠), 청지포도(靑枝葡萄), 백자강류(白子崗榴), 추파리(秋波梨), 빈파과(蘋婆果), 사감봉귤(獅柑鳳橘), 등편양매(橙片楊梅)가 있다. 모든 산해진미는 집에서 만들거나 시장에서 산다. 설사 절친한 친우가 아니더라도 절기에는 반드시 술 석 잔을 대접하니, 정을 잊을 정도로 가까운 친지에게 있어 흐드러지게 취하는 것이 무슨 흉이 되겠는가. 속설에 “신정 세배 절기에 천 집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집에 앉아 있는 것이 낫다”고 했다. 수레 소리가 요란해 종일토록 즐거움을 쫓아다니니 가히 한때의 즐거움이 지극하다 할 만하다.
≪제경세시기승≫, 반영폐 지음, 상기숙 옮김, 6∼9쪽
* 보거(寶炬): 납초[蠟燭, 초]의 미칭.
* 옥가(玉珂): 말머리에서 재갈에 걸친 장식 끈에 다는, 옥으로 만든 장식물.
* 과자(瓜子): 수박씨·해바라기씨·호박씨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 특히 이것들을 소금이나 향료를 넣어 볶은 것.
* 강미(江米): 찹쌀로 북방에선 강미, 남방에선 나미(糯米)라고 부른다. 민가에서 시품으로 연고(年糕)·원소(元宵) 등을 포함해서 많은 일상 음식에 쓴다.
* 초반(椒盤): 산초나무로 만든 소반으로 설날에 먹는 술안주다.
* 약묘(藥廟): 편작(扁鵲)·손사막(孫思邈)·불교의 약왕보살의 묘. 중국 의약의 창시자 신농씨(神農氏)가 백초(百草)를 맛보고 이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알려져 이를 기념하기도 한다. 탄신일인 4월 28일 의생들이 삼황묘(三皇廟)나 약왕묘에 모여 약왕제를 지낸다. 약시(藥市)의 사람들도 제사를 바치고 약업(藥業)의 번성을 기구한다. 일부 약왕묘에서는 복희(伏羲)·신농·황제(黃帝) 삼황(三皇)을 공봉하고, 진한(秦漢) 이래의 명의(名醫)를 배사(配祀)하기도 한다. 이는 삼황이 의약업(醫藥業)을 창시했다는 설에 기인한다.
* 영당(影堂): 조상의 위패를 모신 집.
* 십금화과(十錦火鍋): 여러 가지 재료를 써서 만든 다양한 모양의 신선로.
* 탕점(湯點): 탕의 종류.
* 아유방보(鵝油方補): 거위 기름을 첨가해 만든 음식의 종류.
* 저육만수(豬肉饅首): 돼지고기를 넣어 만든 만두의 종류.
* 강미고(江米糕): 찹쌀로 만든 떡.
* 황서탁(黃黍飥): 기장으로 만든 떡.
* 엄계납육(醃鷄臘肉): 소금에 절인 닭고기와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
* 조목풍어(糟鶩風魚): 술지게미에 절인 집오리와 바람에 말린 물고기.
* 야계조(野鷄爪): 꿩의 발.
* 녹토포(鹿兎脯): 사슴이나 토기 고기를 말린 것.
* 과품(果品): 과일과 말린 과일의 총칭.
* 송진연경(松榛蓮慶): 세 종류의 말린 과일로 잣, 개암, 연밥을 가리킴. 주로 절일(명절)에 먹으며 경축을 기린다.
* 도행과인(桃杏瓜仁): 복숭아, 살구, 과(瓜, 박과 식물의 과실), 과일 씨.
* 율조지원(栗棗枝圓): 밤, 대추. 여지(荔枝), 계원[桂圓, 용안(龍眼)].
* 사고경병(楂糕耿餠): 사고는 산사(山楂) 과즙에 백설탕·한천을 배합해 얼려 만든 부드러운 첨품(甜品, 단 식품)이다. 약용식품으로 뛰어나 소화를 돕고 어혈을 풀어 주기도 한다. 경병은 시병(柿餠, 곶감)을 가리킨다.
* 청지포도(靑枝葡萄): 포도 품종의 하나. 포도가 익은 후 가지가 청록색으로 변하기에 얻은 이름이다. 그 외에 금지포도(金枝葡萄)도 있다.
* 백자강류(白子崗榴): 석류 품종의 일종.
* 추파리(秋波梨): 배의 두 가지 품종으로 추리(秋梨)와 파리(波梨)를 가리킨다.
* 빈파과(蘋婆果): 부귀자(富貴子)·봉안과(鳳眼果)·칠저과(七姐果)·구층피(九層皮)·나황자(羅晃子). 산비탈 수풀이나 초목이 무성한 곳에 야생하거나 재배한다. 광동(廣東)·광서(廣西)·귀주(貴州)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옛날에는 빈파라고 불렀으며 범어(梵語)로부터 나왔다. 원래 뜻은 신영(身影)으로, 의역하면 상사수(相思樹)라고 한다.
* 사감봉귤(獅柑鳳橘): 사감이나 봉귤 모두 귤 품종의 하나다.
* 등편양매(橙片楊梅): 등편은 오렌지를 얇게 저민 것이며, 양매는 소귀나무의 붉은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