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제야 일본 문학의 정수를 독자 여러분에게 선보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근현대 일본 작가 30명의 명작 단편 67편을 주제별로 엄선해 전 5권에 묶었다. 제1권 ‘인생을 말하다’, 제2권 ‘재난을 만나다’, 제3권 ‘근대를 살다’, 제4권 ‘동물과 교감하다’, 제5권 ‘광기에 빠지다’ 등으로 구분해 각 권에 13편 정도씩 담았으니 읽는 재미가 쏠쏠하리라고 확신한다. 각 권별 배열 순서는 대표 역자의 작품을 맨 앞에 두고 발표 연도순으로 배치해 각 시대의 흐름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기존에 잘 알려진 명작도 포함되어 있고 새로이 소개하는 작품도 많다. 작품 선정은 이 분야 전문가인 역자들에게 일임하고 편집위원회에서 조정 및 보완 후 번역을 의뢰해, 일본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단편(소설 중심, 동화, 에세이, 평론 일부 포함) 명작이 망라되도록 배려했다.
이 <일본 명단편선>을 기획한 의도는 무엇보다도 국내의 일본 문학 소개가 몇몇 현대 인기 작가의 대중적 작품이나 추리 소설류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전문가로서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기본적이고 우수한 일본 근현대의 맛깔나는 단편 명작을 다양하게 찾아, 전문가에 의한 번역과 적절한 작품 해설 및 작가 소개, 자상한 각주 등을 독자에게 제공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한편으로, 지금의 독서 풍조에 보다 풍요롭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국내 독자들의 일본 문학에 대한 편식을 일깨우고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의 작품부터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전기, 그리고 전후의 작품까지 일본 근현대 문학의 기본 흐름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체계적 작품 읽기를 지향하는 것이 이번 기획의 주안이다. 특히 일본 근현대 문학사에서 위상에 비해 이제까지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모리 오가이의 단편을 비롯해, 고다 로한, 이즈미 교카, 기타무라 도코쿠, 호리 다쓰오 등의 작품을 초역해서 게재한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역자들은 대부분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근대문학회에 참여한 이 분야의 전문가들로서, 동 대학원 일본 문학 전공 과정을 수료하고 대부분 국내 또는 일본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국내 여러 대학의 일어일문학 관련학과 교수 및 강사로 재직 중이다.
200자평
메이지부터 쇼와 전기까지, 일본 근현대를 대표하는 명작가들의 명단편을 모았다. 일본 근대 문학 전문가의 정확한 번역과 친절한 해설은 독자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격동하는 일본 개화기의 현장으로 안내할 것이다. 2권에서는 하야마 요시키의 <시멘트 통 속의 편지>를 비롯해 재난을 주제로 하는 열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지은이
하야마 요시키(葉山嘉樹, 1894∼1945)는 일본 후쿠오카 현 출신 프롤레타리아 작가다.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지만 학비 미납으로 제적당했다. 외항 선원으로서 홋카이도와 인도 콜카타를 왕래하는 화물선에서 근무한 경험을 훗날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하고, 1920년에는 나고야 시멘트 공장에 근무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다가 해고당하기도 한다. 그 후 나고야 노동자 협회에 가입해 각종 노동 쟁의를 지도하고, 1923년에 나고야 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된 후 미결수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창작 활동에 열중하는 한편 관동 대지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1925년 출옥 후 그의 대표작이자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매춘부>, <바다에 사는 사람들>, <시멘트 통 속의 편지>를 발표해 신진 작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다. 다소 도식적이고 관념적이던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비해 하야마는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꾸밈없이 그려 내어 문학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한 단계 높였다.
그러나 1934년 무렵, 특별 고등 경찰에 의한 사상 통제가 강화되고 일본의 국론이 중국 대륙 진출로 통일되자 하야마는 전향해 당시의 체제에 대한 지지 입장을 강화하게 된다. 1945년 만주로 이주하기 위해 건너갔던 그는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귀국하던 도중, 그해 10월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옮긴이
허호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바이코가쿠인대학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수원대학교 교수다.
<일본 명단편선>에 기고한 번역은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소개했던 단편 작품 중에서 선정했다. 하야마 요시키, 다자이 오사무, 김사량이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가들의 작품이지만, 읽기 쉬우면서도 되풀이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묘미를 느끼게 된다.
일본 유학 중 문학 평론가 히라오카 도시오(平岡敏夫)와 시인 기타가와 도루(北川透)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탐미파 문학에 관심이 깊다. 특히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호리 다쓰오,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의 작가와 관련된 연구가 많다. 논문으로는 <황순원과 미시마 유키오 비교 연구>,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연구>, <미시마 유키오 대표작 연구>, <호리 다쓰오 작품 연구>, <미시마 유키오와 엔도 슈사쿠 비교 연구>, <미시마 유키오와 오에 겐자부로 비교 연구>, <나쓰메 소세키 작품 연구>,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비교 연구> 등이 있으며, 번역 작품으로는 ≪금각사≫, ≪인간 실격≫, ≪포로기≫, ≪산시로≫, ≪노르웨이의 숲≫, ≪고목탄≫ 등이 알려져 있다.
평소에 즐겨 읽는 작가로는 위에 열거한 작가 이외에도 다니자키 준이치로, 호리 다쓰오, 미시마 유키오 등이 있다. 특히 ≪슌킨쇼≫, ≪산의 소리≫, ≪금각사≫를 일본 근대 문학의 3대 명작으로 꼽고 있다. 독자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차례
시멘트 통 속의 편지(セメント樽の中の手紙) 하야마 요시키·허호
호외(號外) 구니키다 돗포·김동연
한 병사(一兵卒) 다야마 가타이·이미경
라쇼몬(羅生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김용안
의혹(疑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전은향
애벌레(芋虫) 에도가와 란포·김동연
어머니들(母たち) 고바야시 다키지·김경화
진주(真珠) 사카구치 안고·이광호
산화(散華) 다자이 오사무·배가혜
비(雨) 하야시 후미코·오성숙
화폐(貨幣) 다자이 오사무·이지현
전쟁과 한 명의 여인(戦争と一人の女) 사카구치 안고·장부연
안경 이야기(眼鏡の話) 우메자키 하루오·장지영
편집위원의 말 최재철
책속으로
제 애인은 몇 통의 시멘트가 되었나요? 그리고 이곳저곳에 어떻게 사용되었나요? 당신은 미장이인가요 아니면 건축업자인가요?
저는 제 애인이 극장의 복도가 되고, 큰 저택의 담이 되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만약 노동자라면 이 시멘트를 그런 곳에는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아무 데건 사용해 주세요. 제 애인은 어떤 곳에 묻히더라도, 그 장소에 따라 반드시 제 몫을 다할 겁니다. 상관없어요. 그는 성품이 강직한 사람이니까 분명히 그에 걸맞은 몫을 하겠지요.
그 사람은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듬직하고 사내다웠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였어요. 갓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저를 사랑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이에게 수의를 입혀 주는 대신에 시멘트 포대를 입히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관에 들어가지 않고 회전 가마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하야마 요시키, <시멘트 통 속의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