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오늘날 다카야마 조규라는 인물은 일본 근대 문학사에 그 이름만이 남아 있을 뿐, 그의 주의주장이나 일본 근대 문학에 끼친 영향, 나아가 동아시아 삼국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충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낮은 평판에도 불구하고, 조규가 활동했던 189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중반까지 그의 명성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중에서도 젊은 청년 지식인들이나 문학도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예를 들어 훗날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1910년 <시대폐색의 현상(時代閉塞の現状)>에서 조규의 ‘개인주의’가 ‘자연주의 운동의 선구’로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주장’한 첫 번째 목소리라 소개한다.
청일 전쟁 이후 점차 고조되어 간 일본 내셔널리즘 속에서 조규는 ‘개인’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1890년 초대 문부대신(文部大臣) 모리 유레이(森有礼)가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이세 신궁(伊勢神宮) 주렴을 지팡이로 들어 올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후, 천황의 신성화 작업은 점점 더 가속화한다. 1891년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는 <교육칙어> 봉독식(奉讀式)에서 천황의 글에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1고등학교 교사직에서 해촉을 당했으며 1898년에는 불 속에서 천황 사진을 건지지 못했다고 초등학교 교장이 자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처럼 일본 사회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천황제 제국주의 시스템을 완성해 나갔고 그로 인한 일본 사회의 경직은 날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폐색’ 상태에 균열을 낸 것이 바로 ‘개인주의’의 자기주장이다. 물론 1900년을 전후해서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1894년 청일 전쟁과 1904년 러일 전쟁 사이에 완성되는 천황제 전체주의 앞에서는 아직 미력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조규의 문학과 평론 활동은 좌우익 전체주의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부지불식간’ 개인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현실적 제약 조건을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한 조규는 문명 비평가로서의 문학자를 꿈꾸면서도 결국 현실 국가인 일본 그 자체를 완벽하게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조규는 후년 그의 친구가 자연주의와 국가적 관념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했던 것처럼 니치렌론(日蓮論) 속에서 자신의 주장과 기성 강권(既成強権 : 국가 권력)의 압제적 결혼을 기도’했다는 조규의 파멸 원인 진단과 통한다.
아스카이 마사미치(飛鳥井雅道)는 ≪일본 근대의 출발(日本近代の出発)≫(1973)에서 청일 전쟁 전후 한 시점까지 ‘개인과 집단’은 확연하게 분리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조규 또한 개인의 정치적 확장이 국가나 세계 정치로 이어져 당연히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하고도 낙천적인 전망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조후에게 보낸 조규의 편지처럼 개인주의의 기치를 높이 내걸면서도 한편으로 어렴풋이 느끼는 천황제 제국주의의 억압을 무화(無化)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30여 년의 짧은 생으로 요절한 조규가 만일 좀 더 살았다면 이후 어떤 삶을 전개했을지 불가지의 영역이겠지만, 최소한 조규가 내걸었던 ‘자기주장’의 문학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 일본 ‘사소설’이란 형태로 이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200자평
일본 내셔널리즘이 발호하기 시작한 메이지 시대, 다카야마 조규는 ‘사회’와 ‘문명’의 비평을 문학자의 임무로 삼고, 긴밀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끊임없는 자기주장을 요구했다. 그가 일본 사회에 던진 ‘개인주의’와 ‘본능 만족’의 ‘미적 생활’은 경색되어 가는 천황제 제국주의에 균열을 내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의 ‘자기주장’의 문학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과 사소설로 이어진다. 그의 비평을 통해 일본 근대 사상, 문학의 발전과 그 한계를 읽을 수 있다.
지은이
다카야마 조규(高山樗牛, 1871∼1902)는 1871년 2월 28일 야마가타 현(山形県), 지금의 쓰루오카 시(鶴岡市) 하급 무사 사이토 지카노부(斎藤親信)의 6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 사이토 지카노부의 원래 성씨는 다카야마(高山)로 사이토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조규가 두 살 때 아들이 없는 백부 집에 조규가 양자로 들어가게 되어 다카야마 린지로(高山林次郎)란 이름을 갖는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며 열여섯 살 때인 1886년에는 ≪가인지기우≫의 한문체 문체를 본뜬 작품 ≪춘일방초지몽(春日芳草之夢)≫을 창작하는데, 작품 내용도 그 무렵 정치 소설의 주요한 주제였던 남녀 동권론(男女同権論)을 다룬다.
제2고등중학교에 진학 후, 고향 친구들과 ≪야마가타 현 공동회 잡지(共同会雑誌)≫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여러 소품을 발표한다. 이 무렵 <잔다르크전> <페스탈로치전> 같은 위인전을 지어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때 조규(樗牛)라는 호를 필명으로 쓴다. 이 ‘저(樗)’와 ‘우(牛)’란 글자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혜자(惠子)와 장자의 일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후 여러 서구 문학 작품의 영역본을 중역하기도 하고 문학 취향의 학우들과 문학회를 조직해 ≪문학회 잡지(文学会雑誌)≫를 발간, <문학 및 인생>과 같은 다양한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한다.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와 인연을 맺으면서 ≪문학회 잡지≫에 <염세론> <희곡에서의 비극의 쾌감을 논함> 같은 염세주의적 낭만주의 문장을 발표하는데 이 <염세론>은 일본에서 최초로 일반인에게 쇼펜하우어를 소개한 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1893년 수석으로 제2고등중학교를 졸업한 조규는 그해 9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연말에는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에서 공모한 역사 소설 모집에 ≪다키구치 입도(滝口入道)≫란 작품으로 응모해 다음 해 4월 우등상을 수상한다. 1895년에는 우에다 빈(上田敏), 아네자키 조후(姉崎嘲風) 등과 함께 문학회를 만들어 1월부터 ≪제국문학(帝国文学)≫이란 잡지를 발간하는데, 조규는 이 잡지와 함께 당시 일본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 ≪태양(太陽)≫에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에 관한 글을 비롯해 문학, 예술, 미학 관련 문장을 다수 발표한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는 ≪태양≫의 문학 담당 기자가 되어 무서명으로 매호 문학 평론을 적는다. 11월 문과대 학생 전원과 함께 닛코(日光)에 원족(遠足)을 갔다가 기관지염을 앓게 되어 한동안 요양하는데 이것이 지병이 되어 결국 조규는 죽음에 이른다. 기무라 다카타로(木村鷹太郎), 모리 오가이(森鴎外) 등과 철학, 미학 관련 논쟁을 전개했으며 1896년 9월에는 제2고등학교 교수 임명을 받아 센다이에 부임, 영어와 윤리학을 가르친다.
1897년 4월 하쿠분칸에 입사해 ≪태양≫의 편집 주간으로 취임, 주로 시평(時評)이나 문학예술 및 교육 분야에서 건필을 휘두른다. 이 무렵 이노우에 데쓰지로 및 기무라 다카타로 등과 대일본협회(大日本協会)를 설립, 극단적인 복고주의와 종교 배척의 기관지 ≪일본주의≫를 간행한다. 이와 함께 ≪태양≫에도 <현금(現今) 일본 문예계에서의 비평가의 본무(本務)> <메이지의 소설> <일본주의를 찬함(이후 ‘일본주의’로 개제)> 등을 발표하면서 일본주의를 고취하고 국민 문학 창출에 주력한다. 또 쓰보우치 쇼요와는 역사극 관련 논쟁을 전개하는데 그 연장 선상에서 당시 일본 사회에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을 경계하기 위해 파괴적인 사회 소설, 사회주의 소설을 비판한 <이른바 사회 소설을 논함>을 발표한다. 다음 해에는 <소설 혁신의 시기−비 국민적 소설을 난함(이후 ‘비 국민적 소설을 난함’으로 개제)>과 같은 글에서 <메이지의 소설>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쇼요류의 사실주의 소설을 비판한다.
화려한 비평 활동의 한편으로 1897년 연말에는 법학박사 스기 교지(杉亨二)의 차녀 사토(さと)와 결혼도 하고 사립 철학관[哲学館 : 현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미학 및 미술사를 강의하는 등,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1900년 5월 문부성은 조규의 유럽 유학을 내정했고 귀국 후에는 교토대학(京都大学)에 교수로 취임하기로 예정되었으나 8월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입원했고 좀처럼 회복하지 못해 다음 해인 1901년 3월 마침내 유학을 사퇴한다.
그다지 몸 상태가 좋지 않던 1901년 1월 <문명 비평가로서의 문학자>를 ≪태양≫에 발표, 이전의 쇼펜하우어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니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개인주의와 문학자의 사회적 역할을 더욱 강력하게 요청한다. 그해 6월 발표한 <아네자키 조후에게 보내는 글>은 그가 표방했던 낭만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적 입장을 총괄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그리고 그해 8월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적 생활을 논함>을 발표한다. 과격한 니체 사상에 기반해 성욕과 같은 본능의 만족이 바로 미적인 삶이고 생활이란 주장은 일본 사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문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부여한다.
점차 더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결국 대학 강의까지 그만두는데, 그와 동시에 조규는 종교 세계에 심취한다. 그중 하나가 니치렌(日蓮)으로 이는 단순한 종교적 귀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일생을 통해 주장했던 것처럼 니치렌은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부처처럼 체제 비판적이고 혁신적인 ‘개인’으로 이들 성인을 이해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니체의 ‘초인(超人)’ 사상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1902년 2월 <나라조(奈良朝)의 미술>이란 논문으로 조규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에도 새로운 문체를 구상하거나 역사적으로 낮게 평가받고 있는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를 개인주의 입장에서 옹호하는 파격적인 글쓰기를 계속한다. 그러던 중 폐결핵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요양 중이던 가나가와 현(神奈川県) 히라즈카(平塚)의 한 병원에서 12월 24일 사망한다. 묘비에 ‘우리는 현대를 초월해야만 한다(吾人は須らく現代を超越せざるべからず)’라고 적었다.
옮긴이
표세만은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국립 고베대학 문화학 연구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박사학위 논문 <明治社会思想と矢野龍渓の文学>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국립 군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메이지 문학 및 메이지 사회사상과 현대 문화, 메이지 문학과 한국 근대 문학 성립기 등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정치의 상상, 상상의 정치−보편인 야노 류케이의 세계≫(2005), 공저 및 공역으로 ≪동아시아 근대 ‘네이션’ 개념의 수용과 변용−한·중·일 3국의 비교 연구≫(2005), ≪반전으로 본 동아시아−사상·운동·문화적 실천≫(2008), ≪후쿠자와 유키치의 젠더론≫(2014) 등이 있으며 다카야마 조규 관련 논문으로는 <다카야마 쵸규(高山樗牛)와 니치렌(日蓮) 사상>(2004), <다카야마 조규(高山樗牛)의 ≪다키구치 입도≫(滝口入道)론−‘국민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2018)가 있고, 기타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일본주의
이른바 사회 소설을 논함
비(非) 국민적 소설을 난(難)함
미감(美感)에 관한 관찰
문명 비평가로서의 문학자(일본 문단의 측면 비평)
아네자키 조후에게 보내는 글
미적 생활을 논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텐이 말하는 평등의 혜안으로 모든 것을 대하지 않는 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동정은 최소한 나 자신의 개인성(個人性)에 의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위 객관주의는 어디까지 제한을 허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과연 누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지, 지극히 애매하다. 내 입장에서 결국 객관주의라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것에 가깝고, 설령 어떤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수결주의, 인기 영합주의일 뿐이다. 애써 호오의 감정을 숨기고 포폄의 의사를 감추어, 가(可)도 없고 불가도 없는 평이하고 무위(無爲)한 사이에서 가능한 한 대다수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 이는 오히려 병폐가 아니겠는가? 크게 비판할 수 없는 것은 크게 칭찬할 수 없다. 문예의 문제는 취미의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로, 앞으로 내가 힘써야 할 바가 특히 많다. 소위 객관주의라는 것이 결국 역사주의일 수 없다며 일부에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한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 충분한 평가를 꺼리는가? 애초에 무슨 이유 때문에 이른바 주관주의, 이상주의를 싫어하며 나아가 그렇게까지 혐오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