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케레크인은 2010년 인구조사 기준 네 명만이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 절멸 위기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은 18세기 말부터다. 한때 케레크인은 다른 민족들의 침범과 전염병 창궐로 마을을 버리고 투만강과 그 남쪽으로 옮겨 갔다. 18세기 중반쯤 축치인이 대규모로 아나디르강 우안으로 이동해 케레크인이 거주하는 투만강, 벨리카야강, 하티르카강 계곡을 차지했고, 그 탓에 두 민족 간의 대규모 혈전이 벌어졌다. 또 축치인과 코랴크인 사이에서 혈전이 벌어졌을 때, 케레크인은 양측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케레크인 성인 남성들은 죽임을 당했고 아이와 여성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당시 이들에 맞서 적극적으로 대항할 능력이 없었던 케레크인은 절벽의 동굴이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잠적했고 이에 더해 유행병이 창궐하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케레크인의 전통 신앙은 샤머니즘과 조상 숭배 사상이다. 모든 케레크인 마을에는 제물을 바치는 ‘카마크’라는 성소가 있는데 일차적으로 이곳에 고래 턱뼈를 꽂은 해마의 두개골을 쌓아 둔다. ‘아파팔리(할아버지)’ 혹은 ‘일라필리(할머니)’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상 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다. 성소에는 여전히 순록의 두개골과 뿔, 사냥한 동물의 두개골, 이 동물들을 사냥할 때 사용한 사냥 도구 등이 쌓여 있다.
케레크인 설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소개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이 책에는 모두 13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까마귀 이야기 여섯 편, 동물 이야기 세 편, 지혜로운 케레크인 이야기 네 편이다. 특히 이들의 신화적 영웅인 까마귀 ‘쿠키’의 이야기에서는 이들의 세계관과 종교관,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200자평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의미 있는 곳, 시베리아. 지역의 언어, 문화, 주변 민족과의 관계, 사회법칙, 생활, 정신세계, 전통 등이 녹아 있는 설화.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설화를 번역해 사라져 가는 그들의 문화를 역사 속에 남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시베리아 설화가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의 설화에 조금은 식상해 있는 독자들에게 멀고 먼 시베리아 오지로 떠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도와주길 기대한다.
옮긴이
엄순천은 러시아어학 박사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며 시베리아 소수민족 언어 및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 ≪잊혀져가는 흔적을 찾아서: 퉁구스족(에벤키족) 씨족명 및 문화 연구≫(2016), 역서로 ≪북아시아설화집 3: 나가이바크족, 바시키르족, 쇼르족, 코미족, 텔레우트족≫(2015), ≪예벤키인 이야기≫(2017) 등이 있다. 연구 논문으로는 <중국 문헌 속 북방지역 소수종족과 퉁구스족과의 관계 규명: 순록 관련 기록을 중심>(2018), <에벤키족 음식문화의 특성 분석 − 인문지형학, 인문경제학, 민속학적 관점에서>(2017) 등이 있다.
차례
까마귀 이야기
쿠키 할아버지
남편 쿠키와 아내 미티
태양을 두려워하는 쿠키
쿠키와 교활한 여우
사냥을 싫어하는 여우와 까마귀
늑대에게 혼쭐이 난 쿠키
동물 이야기
바다표범 할머니 할아버지를 이긴 토끼
끝이 없는 여우의 장난
개 아가씨에게 청혼한 여우
지혜로운 케레크인 이야기
적을 죽인 영민한 아이
무사 테밀과 무사 벨빌레비트
가여운 옴리트바알
철로 만들어진 악령
해설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여우는 직접 창고로 가서 음식을 잔뜩 챙긴 뒤 자루를 묶으려고 하는데 손이 그물에 걸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리를 질렀다.
“아악!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 순간 까마귀가 나타났다.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너잖아. 왜 우리를 속였지? 왜 가죽 대신 낡은 그물을 넣어 둔 거지? 왜 남의 창고에 기어들어서 도둑질을 하는 거지?”
여우가 울면서 풀어 달라고 애원했지만 풀어 주지 않았고 거짓말쟁이, 도둑이라며 한참을 비웃었다. 결국 여우 혼자 힘으로 어찌어찌해 낡은 그물을 찢고 밖으로 나왔지만 손은 여전히 자루에 묶여 있었다. 그렇게 손에 자루를 달고 집으로 달려가 큰딸에게 말했다.
“빨리 자루를 풀어 다오!”
“싫어요. 엄마는 왜 만날 거짓말만 하고 다니는 거예요?”
작은딸이 자루를 풀어 주었다. 이렇게 까마귀는 여우가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한 데 대한 앙갚음을 했다.
-<사냥을 싫어하는 여우와 까마귀>, 45~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