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서곤체(西崑體)는 북송(北宋) 초(初) 시단(詩壇)을 대표하는 3대 시체(詩體) 가운데 하나로,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을 종주(宗主)로 삼아 그의 시작(詩作) 특징을 본받으려 한 점이 특징이다.
북송 초라고 하면 태조 원년인 960년부터 제3대 황제 진종 말년인 1021년까지 약 60여 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의 생활 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했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은 점차 단조로운 것보다는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인 태조(太祖)·태종조(太宗朝)에 유행한 백체 시(白體詩), 태종 연간 후기부터 진종 연간 사이에 유행한 만당체 시(晩唐體詩), 그리고 진종 경덕(景德) 연간에 시작되어 인종조(仁宗朝)까지 그 이름을 떨친 서곤체 시 등이 바로 이 시기 시단을 대표한다. 왕우칭(王禹偁)을 중심으로 한 백체 시는 백거이(白居易)의 평이하고 꾸밈없는 창화(唱和) 시풍을 계승했는데, 이는 당시 관리들이 시를 주고받을 때 많이 사용한 시 형식이었다. 따라서 벼슬길에서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창화와 맞물려 백체 시가 성행한 것이다. 그러나 백체 시가 지나치게 평이하고 천속(賤俗)한 경향을 보이자, 이에 일부 시인들이 반기를 들고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만당체 시인들이다. 만당체 시인들은 중당(中唐)의 가도(賈島)와 요합(姚合)을 종주로 삼아 시 창작에서 전고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교한 구성에 주력하는 등 청고(淸苦)한 시풍을 본받을 것을 제창했다. 천속하고 평이한 쪽으로 편향되었던 당시(當時) 백체 시의 병폐를 극복하긴 했지만, 이들의 시풍은 만당 후기의 기울어 가는 시대에나 어울릴 만한 소극적이고 협소하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점은 북송 초 한참 발전을 앞두고 있는 시대 풍조를 반영해 내지 못하면서 점차 쇠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억(楊億)을 중심으로 해서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본받아 시를 창작한 서곤체 시의 등장은 당시(當時)의 시대 분위기와 사람들이 추구하던 심미 취향에 매우 적합했다.
이렇게 볼 때, 백체 시와 만당체 시는 당시의 연속이고, 그것에 새로운 시도를 더해 다른 풍격을 보인 서곤체 시는 새로운 송시 출발의 맹아로 볼 수 있겠다. 서곤체 시는 백체 시의 창화시풍은 계승하고 백체가 말류에 지나치게 평이하고 통속적으로 흐르는 경향에 대해서는 변화를 주었다. 즉 이상은의 작법(作法)을 본받아 풍부하고 아름다운 시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전고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시의 함축성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이고 문인화된 시풍을 형성했고, 이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므로 큰 환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송시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200자평
백체(白體), 만당체(晩唐體)와 더불어 송 초를 대표하는 서곤체(西崑體)의 시를 모았다. 숭문 정책과 부국강병에 힘입어 양억을 비롯한 서곤파의 시인들은 좀 더 화려하고 깊이 있는 시를 추구함으로써 당시(唐詩)와는 구분되는 송시(宋詩)의 기틀을 마련했다. 옮긴이의 상세한 주석과 해설이 그동안 까다로운 전고로 인해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지은이
≪서곤수창집≫의 편찬자 양억(楊億, 974∼1020)은 자(字)가 대년(大年)으로 개보(開寶) 7년(974)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11세에 신동으로 알려져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이후에도 태상시봉례랑(太常寺奉禮郞), 광록시승(光祿寺丞), 저작좌랑(著作佐郞), 좌정언(左正言), 좌사간(左司諫), 지제고(知制誥),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호부낭중(戶部郞中), 공부시랑(工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경덕 2년(1005)에 왕흠약과 함께 ≪책부원귀≫를 편찬하는 일을 총괄하게 되었다. 대중상부 6년(1013)에 ≪책부원귀≫ 편찬이 완성되자 비서감(秘書監)으로 그 품계가 올랐다. 천희(天僖) 4년(1020) 46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양억은 일생 동안 교유를 중시했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명예와 절조를 중시했다. ≪서곤수창집≫에 7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이 밖에도 많은 저작이 있다.
유균(劉筠, 971∼1031)의 자는 자의(子儀)이고 태조 개보 4년(971)에 태어나 양억보다는 세 살 위다. 함평(咸平) 원년(元年, 998)에 27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해 관도현위(館陶縣尉)가 되었다. 함평 5년(1002)에 양억에게 발탁되었고, 이후 진종에게 시 창작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대중상부 6년(1013) ≪책부원귀≫가 완성된 후 좌정언(左正言)·직사관(直史館) 등의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다. 또한 지제고(知制誥)·우사간(右司諫)·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어사중승(御史中丞)·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등도 역임했다. 천성(天聖) 9년(1031) 60세의 나이로 생을 다했다. ≪송사(宋史)·유균전(劉筠傳)≫에는 유균 역시 문사(文辭)의 대우(對偶)가 뛰어났으며, 당시 양억과 함께 ‘양유(楊劉)’로 병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서곤체 시인 중에서 양억과의 관계가 가장 밀접한 인물로, 양억이 창화 활동을 시작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해, 서곤체 시인 가운데 양억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 주요 3인 중 한 사람이다. ≪서곤수창집≫에는 그의 작품 73수가 수록되어 있다.
전유연(錢惟演, 961∼1034)의 자는 희성(希聖)으로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의 아들이다. 건륭(建隆) 2년(961)에 태어났으니 양억이나 유균보다 그 연배가 10여 년이나 앞선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 오월(吳越)이 망한 뒤 전유연은 아버지를 따라 송(宋)으로 가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이 되었다가 이후에는 태복소경(太僕少卿), 급사중(給事中),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공부상서(工部尙書), 추밀사(樞密使)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전유연 역시 문사가 청려(淸麗)해 양억·유균과 병칭되었으며 경우(景祐) 원년(1034)에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전유연은 양억과 유균 다음으로 서곤체 창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서곤수창집≫에 수록된 작품을 보면, 양억이 수창한 43수 가운데 화시를 지은 것이 25수이고, 유균이 수창한 13수 가운데 12수의 화시를 지었으며, 자신이 수창한 것 또한 9수나 된다. 기타 다른 시인의 작품에 화시를 지은 것까지 포함해 전유연의 시는 총 54수가 ≪서곤수창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종악(李宗諤, 964∼1012)의 자는 창무(昌武)이고 송 태종 때의 학자 이방(李昉)의 아들이다. 건덕(乾德) 3년(964)에 태어났고 7세에 이미 글을 잘 지어 향거(鄕擧)를 통과했으며, 진사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郞)을 제수받았다. 이후에 비서랑(秘書郞),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 공부낭중(工部郞中),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등을 역임했다. 그가 한림학사가 된 것이 경덕 2년으로 양억보다 1년 앞선다. 또한 관각에서 벼슬을 한 시간이 비교적 길며, 양억과 비교적 일찍 교류를 시작했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여러 기록을 통해 이종악은 양억과 오랫동안 교유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백체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양억의 시풍(詩風)과는 큰 차이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시풍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관계로 인해 ≪서곤수창집≫에 비교적 많은 7수의 화시(和詩)가 수록되어 있다.
진월(陳越, 973∼1012)은 자가 손지(損之)이고 개보 6년(973)에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역사에 능통했다. 또한 글 짓는 재능이 뛰어나 이를 바탕으로 벼슬길에 진출해 저작좌랑(著作佐郞), 직사관(直史館)은 물론, 태상승(太常丞), 군목판관(群牧判官), 좌정언(左正言)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 한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유(李維, 961∼1031)의 자는 방중(仲方)이며 건륭 2년(961)에 출생했다. 관직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중서사인(中書舍人), 상서좌승(尙書左丞), 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역임했으며 시 짓기를 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서곤수창집≫에 2수의 시가 전한다.
유척(劉隲)은 ≪송사(宋史)≫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왕중뤄의 ≪서곤수창집주≫의 부록 <서곤시인약전(西崑詩人略傳)>의 <유척사집(劉隲事輯)>에 따르면,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에 몇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몰 연도는 미상이고 함평 2년(999)에 집현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개봉부거인(開封府擧人), 국자감거인(國子監擧人), 개봉부국자감거인(開封府國子監擧人) 등의 시험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서곤수창집≫에 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위(丁謂, 966∼1037)의 자는 위지(謂之)인데 후에 공언(公言)으로 자를 바꾸었다. 건덕 4년(966)에 태어났고 순화(淳化) 3년(992)에 진사 급제했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을 역임했고, 진종조에는 정부재상(正副宰相)을 10년 가까이 맡았다. 인종 때 애주사호참군(崖州司戶參軍)으로 폄적되었고 명도(明道) 연간에 비서감(秘書監)으로 관직을 마쳤다. ≪서곤수창집≫에 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간(刁衎, 945∼1013)은 자가 부빈(符賓)이고 후진(後晋) 개운(開運) 2년(945)에 출생했다. 부친 언능(彦能)의 음덕으로 남당(南唐) 시기에 비서랑(秘書郞)과 집현교리(集賢校理)를 역임했다가 송대로 들어선 후에는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 대리시승(大理寺丞), 전중승(殿中丞),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郞), 형부낭중(刑部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 등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는 2수의 작품이 있다.
임수(任隨)는 함평 2년(999)에 저작랑(著作郞)에 있었으며 이후 태상승(太常丞)을 지냈다. ≪책부원귀≫ 편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집현원에서 일하면서 양억 등과 창화 활동을 한 결과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가 수록되었다.
장영(張詠, 946∼1015)의 자는 복지(復之)이고 태평흥국 5년(980)에 진사에 올랐고 이후 저작좌랑(著作佐郞), 비서승(秘書丞), 우부낭중(虞部郞中), 어사중승(御史中丞),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역시 유서 편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양억 등과 창화시를 주고받으면서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를 남겼다.
전유제(錢惟濟, 978∼1032)는 자가 암부(岩夫)이고 전유연의 동생으로 시풍이 전유연과 매우 유사하다. 제위장군(諸衛將軍), 은주자사(恩州刺史), 동염원사(東染院使), 봉주자사(封州刺史), 검교사공(檢校司空), 건주관찰사(虔州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송사≫에 손님을 초대해 연회 베풀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가 전한다.
서아(舒雅)는 자가 자정(子正)이며 국자감승(國子監丞), 비각교리(秘閣校理),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등을 역임했다. 역시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형(晁迥, 951∼1034)은 자가 명원(明遠)이고 어린 시절 일찍이 왕우칭 밑에서 수학했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원년(元年, 951)에 출생해 태평흥국 5년(980)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대리평사(大理評事), 장작감승(將作監丞), 전중승(殿中丞), 태상승(太常丞), 우정언(右正言),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 2수의 시가 전한다.
최준도(崔遵度, 954∼1020)의 자는 견백(堅白)이고 태평 흥국 8년(983)에 진사에 급제했고 저작좌랑(著作佐郞), 전중승(殿中丞), 태상승(太常丞), 좌사간(左司諫),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예부낭중(禮部郞中) 등을 맡았다. 진월(陳越)과 마찬가지로 한 수의 시가 ≪서곤수창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설영(薛映, 951∼1024)의 자는 경양(景陽)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대리평사(大理評事), 태상승(太常丞), 감찰어사(監察御使), 좌정언(左正言),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郞中), 지제고(知制誥),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상서좌승(尙書左丞), 공부상서(工部尙書), 어사중승(御史中丞) 등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 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유병[劉秉, 952∼1016, ‘장병(張秉)’이라는 설도 있음]은 자가 맹절(孟節)이고 진사에 급제해 감찰어사(監察御使), 우사간(右司諫), 도지원외랑(度支員外郞), 지제고(知制誥), 공부낭중(工部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예부시랑(禮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설영(薛映)과 마찬가지로 ≪서곤수창집≫에 6수의 시가 전한다.
옮긴이
박민정(朴玟貞)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중국어 교육[對外漢語] 전공으로 박사 학위 졸업 논문을 통과했다.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와 BK21중일언어문화교육연구단, 한국학연구소 등에서 연구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중문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편역서로는 ≪4색(色) 4미(味) 중국 시 산책≫이 있고, 논문으로는 <북송(北宋) 서곤체(西崑體) 시(詩) 연구(硏究)>, <서곤체(西崑體)와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에 관한 소고(小考)>, <서곤체(西崑體)의 시사적(詩史的) 위상(位相)에 대한 재고찰>, <송(宋) 초(初) 삼체시(三體詩)의 형식적 특징 비교 연구>, <韓語情態詞尾與漢語相應情態動詞對比硏究>, <漢語情態動詞“要”與韓語相應情態詞尾的對比−以語義、 句法特徵爲为中心> 등이 있다.
차례
남조(南朝) 양억
남조(南朝) 전유연
남조(南朝) 유균
남조(南朝) 이종악
궁궐 뜰의 나무(禁中庭樹) 양억
궁궐 뜰의 나무(禁中庭樹) 전유연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양억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전유연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진월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이유
다시 수창에 차운해 짓고 화답함(再次首唱題和) 전유연
다시 수창에 차운해 짓고 화답함(再次首唱題和) 양억
무궁화(槿花) 유균
무궁화(槿花) 양억
무궁화(槿花) 유척
무궁화(槿花) 전유연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첫째 수(一) 양억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둘째 수(二) 양억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이종악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정위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조간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첫째 수(一) 유균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둘째 수(二) 유균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유척
한 무제(漢武) 양억
한 무제(漢武) 유균
한 무제(漢武) 전유연
한 무제(漢武) 조간
한 무제(漢武) 임수
한 무제(漢武) 유척
한 무제(漢武) 이종악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유균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양억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전유연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장영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이종악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유척
밤 연회(夜讌) 전유제
밤 연회(夜讌) 양억
밤 연회(夜讌) 유균
밤 연회(夜讌) 전유연
학(鶴) 유균
학(鶴) 양억
학(鶴) 장영
학(鶴) 임수
학(鶴) 전유연
공자(公子) 양억
공자(公子) 유균
공자(公子) 전유연
옛 장군(舊將) 양억
해설
서곤체(西崑體)의 시사적(詩史的) 위상(位相)에 대한 재고찰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남조(南朝)
− 양억(楊億)
다섯 번의 북소리가 궁문에 울리고 물시계 소리 희미해져 갈 때
새벽을 알리는 댓개비 소리 끊어지자 화려한 수레 날듯이 궁문을 나서네.
별 가득한 새벽 제방을 닭 울음소리 들으며 지나더니
봄비 내리는 사냥터에서 꿩 잡아 돌아온다.
금 연꽃 위의 비단 버선 걸음에 일렁이는 물결,
<옥수후정화>를 부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용이 서렸던 제왕의 기운도 300년으로 끝나 버렸으나
그래도 열린 사립문 앞의 맑은 강물은 얻었네.
五鼓端門漏滴稀
夜籤聲斷翠華飛
繁星曉埭聞雞度
細雨春場射雉歸
步試金蓮波濺襪
歌翻玉樹涕沾衣
龍盤王氣終三百
猶得澄瀾對敞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