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연극에 대해(О театре)≫는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가 상징주의 연극과 양식화 연극을 실험했던 1905년부터 1912년까지의 작업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저서로,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연출가가 연출 작업을 해 나가면서 쓴 일련의 논문을 모은 이 책은, 일부는 여러 저널에 이미 발표했던 논문들이고 일부는 출판과 함께 처음으로 발표된 것들이다. 책을 출판하면서 “연극의 본질에 대한 나의 관점의 발전을 보여 준다는 의미가 있다”라고 저자 스스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모스크바에서 1968년 두 권으로 출간된 메이예르홀트의 전집 ≪논문들, 편지들, 연설들, 대담들(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중 제1권을 저본으로 해서, ≪연극에 대해≫에 실린 두 편의 논문, <연극의 역사와 테크닉에 대해>와 <발라간>을 번역한 것이다.
<연극의 역사와 테크닉에 대해>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상징주의 실험에서 얻은 연극관을 정리한 논문이다. 1905년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떠났던 메이예르홀트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제안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스튜디오를 맡았던 해다. 당시 상징주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스타니슬랍스키는 상징주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비물질성, 영적인 분위기, 존재의 비밀스러운 느낌, 미묘한 음악성 등을 기존의 연극 메소드로는 쉽게 무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는데, 때문에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위해 ‘스튜디오’라고 부르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고 이를 메이예르홀트에게 위임한 것이다. 메이예르홀트는 이곳에서 상징주의 연극의 대표적 작가인 마테를링크의 <탱타질의 죽음>, 하웁트만의 <슐륙과 야우> 등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시작한다.
메이예르홀트는 현실에서 풀 수 없는 삶의 비밀과 신비, 리얼리즘이 우리에게 제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해답을 그로테스크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명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로테스크만이 ‘창조적 예술가에게 경이로운 지평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극이 삶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무대 위에서 모방하거나 연극적 현실이 삶의 현실과 같은 차원의 것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이예르홀트의 연극 이론과 연극 메소드는 반(反)사실주의 연극의 흐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며 연구되어 왔다. 특히 그러한 맥락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는 것은 그의 구성주의 연극과 배우 시스템인 생체역학이다. 반면에 그의 초기 작업, 특히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하면서 우슬로브니 연극관과 그로테스크 연극 미학을 정립해 나갔던 시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업은 그의 연출 작업 전체를 이해하고 그의 연극관을 관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싹튼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이후 그의 작업을 통해 발전되고 연극 이론으로 정리되어 나가면서 그의 연극관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연극에 대해≫는 바로 이 시기의 메이예르홀트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저서다.
200자평
연극이란 무엇인가? 일상의 완벽한 재현인가? 아니면 일상을 재창조한 예술인가? 20세기 연출가 시대에 스타니슬랍스키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연출가 메이예르홀트. 그의 연극 이론과 메소드는 반(反) 사실주의 연극의 흐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메이예르홀트 연극 이론의 핵심인 상징주의 연극관과 그로테스크 연극 및 마스크의 개념을 메이예르홀트 자신의 설명을 통해 만난다.
지은이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1874∼1940)는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이며 연극 이론가, 연극 교육자다. 그는 스타니슬랍스키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이루어 놓은 대중적인 사실주의 연극에 반기를 든 가장 대표적인 연출가이자 20세기 연출가 시대에 스타니슬랍스키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연출가이기도 하다. 메이예르홀트는 1874년 펜자라는 작은 도시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카를 카지미르 테오도르 메이예르골트(Карл Казимир Теодор Майергольд)였다. 그의 연극적 이력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창단과 함께 배우로서 시작되지만, 그는 곧 사실주의 연극에 회의를 느끼고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게 된다. 1917년 이후 혁명의 시기, 메이예르홀트는 가장 두각을 드러내며 선두에 섰던 연출가였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한 최초의 연출가였으며 10월 혁명의 이상을 연극을 통해 구현하기를 주장했던 가장 사회주의적인 연출가였다. 1920년대 들어 그는 구성주의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험하는 한편, 자신의 배우 시스템이라 할 ‘생체역학’을 정리한다. 이 시기의 연극을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 설명하는데, 노동은 예술과 유사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구성주의는 묘사적인 무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자유였다. 그는 구성주의적 비전을 통해 새로운 연극과 미래의 배우를 보았다. 생체역학에 의해 훈련된 배우는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배우의 모든 신체 기관은 수행되는 모든 작업의 매 순간 정확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배우는 무대 위에서 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배우의 환경이라 할 무대미술에 대해서도 무대장치는 현실 묘사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기능적이거나 재료의 성질만을 전달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무대에 세워진 메이예르홀트의 구성주의 구조물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도 의미하지 않았다. 오직 작업의 공간이자 배우 움직임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기계일 뿐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입각해 메이예르홀트는 크롬랭크의 <마음이 넓은 오쟁이 진 남편>, 고골의 <검찰관>, 오스트롭스키의 <숲> 등, 구성주의 연극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공연한다. 메이예르홀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사회주의의 이상에 깊이 동의한 예술가였지만,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실험적 연극을 고수해 나가는 그의 성향으로 인해 결국 당 지도부에게 형식주의자로 비난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획일성에 반발하고 공식적으로 지도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며, 결국 1938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1940년 사형된다. 메이예르홀트는 오랫동안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금기시되다가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이르러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해금되었다.
옮긴이
이진아는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희곡문학을 전공했으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원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극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소위원회 위원(2∼3기)을 역임했다. 러시아 연극과 한국 연극에 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공저, 2009), ≪동시대 연극비평론의 방법론과 실제≫(공저, 2009), ≪가면의 진실≫(2008), ≪동시대 연출가론≫(공저, 2007) 등이 있으며, <탈식민적 상황에서의 한국연극의 자기 재현>, <도스토옙스키 연극과 페테르부르크 테마>, <김우진의 ≪난파≫ 다시 읽기>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연극의 역사와 테크닉에 대해
1. 시어터 스튜디오
2. 자연주의 연극과 분위기의 연극
3. 새로운 연극에 대한 문학적 조짐
4. 우슬로브니 연극 수립의 첫 시도
5. 우슬로브니 연극
발라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배우가 연출가의 영혼을 통해 극작가의 영혼과 합쳐진 자신의 영혼을 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희곡 작가가 이미 준비해 놓은 것을 자신이 만들려는 형상으로 취한다는 것이 배우의 창조적 자유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에게 연출가가 부여하는 것도 그의 창조적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