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비극을 통해 시민계급의 보수성과 무능함을 비판하다
<마리아 마그달레나>는 헤벨의 이전 작품 <유디트>나 <게노베바>와는 다른 성격을 띄고 있다. 성경이나 전설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다. 헤벨은 뮌헨에서 공부할 때 목수인 안톤 슈바르츠의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 집 아들이 경찰에 잡혀가서 전 가족이 전전긍긍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소)시민계급의 특성, 즉 전통적인 가부장적 관습과 관념을 고수하는 보수성 그리고 꼬인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 등으로부터 비극성이 나오는 시민 비극을 만들려는 구상을 한다.
헤벨은 실러와는 달리 계급 간의 대립이란 모티프를 버리고 (소)시민계급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이 좁은 세계에 갇혀서 자신들의 문제를 타개하지 못하는 인간들로부터 비극성을 도출해 낸다. 헤벨이 소시민의 세계를 제대로 그려낸 데에는 그가 바로 그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사실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시야가 좁고 독선적인 도덕관을 가진 작은 마을을 잘 알았다. 그런 도덕관을 가진 사람은 설령 본성이 선할지라도 마이스터 안톤 같은 옹고집이 될 수 있다.
가부장제에 대한 반성적인 시선
<마리아 마그달레나>도 시민 비극의 다른 대표작들처럼 부녀 관계를 축으로 한다. 목수 안톤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졌지만 소시민적 편협성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집안의 명예와 체면이다. 가장으로서 그는 가족 가운데 누구라도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죽음보다 꺼린다. 딸이 자살한 뒤에도 그는 깨달음을 얻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일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가장에게 지배권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가정 구조 때문에 딸이 도덕적 의무감에서 자살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가정을 지배하고 세상에 대해 아내와 자식들을 대표하며 전 가족의 명예를 책임지는 가정 구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 비극은 보여준다.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집안의 명예를 지켜야 하고 절대로 불명예의 치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가장의 지나친 체면 의식이 비극의 원인이다. 안톤은 가족의 생각이나 양심, 또는 자식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보다는 식구들의 시민적 명성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안톤이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는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역지사지하지 못한다. 이것이 비극적 파국을 초래하는 그의 한계이고, 헤벨은 이것을 설득력 있게 그린다.
사랑하는 딸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죄의식은 고사하고 내적인 동요조차 일으키지 않는 의연함을 견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운명을 꿋꿋하게 견뎌내는 영웅적인 면모와 함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고루한 편협성의 징후가 보인다. 이 양자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1848년 3월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시기의 독일 사회에는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헤벨은 가정에 든든한 윤리적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이 사회 제도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민계급의 돌처럼 굳어버린 도덕규범을 비판한다. 이로써 헤벨은 입센이나 하우프만의 자연주의적 테마를 선취한다.
200자평
≪마리아 마그달레나≫는 독일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의 희곡작품이다. 헤벨은 도덕과 사회적인 체면을 중시하는 아버지와 정절을 잃은 딸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서 시민계급의 경직된 도덕관념과 위선을 비판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 부권과 딸, 개인과 사회처럼 끊임없이 갈등하는 이항 대립의 양상은 독자로 하여금 삶에 내재한 근원적인 비극성을 되짚어보게 한다.
지은이
헤벨은 1813년 3월 18일 독일 북부 홀슈타인 지방의 베셀부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난다. 15살 때 교구 사무장 모어 밑에 들어가 22살 때까지 서기로 일한다. 이때 모어의 장서를 이용해 독학으로 교양을 쌓는다. 1831년, 아말리에 쇼페는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에 헤벨의 시를 싣는 것을 계기로 헤벨의 후원자가 된다. 1835년, 쇼페의 도움으로 함부르크로 이주해 뒤늦게 대학 공부를 준비하는 행운을 잡는다. 이 시기에 알게 된 8살 연상의 재단사 엘리제 렌징이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1836년, 헤벨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입학해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지만 곧 법학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한 학기 뒤에는 거처를 뮌헨으로 옮겨 독학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으면서 그리스 비극, 실러 등 위대한 비극 작품들의 공부에 열중한다. 엘리제가 돈을 더 대주지 못하게 되자 그는 1839년 함부르크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이 이루어진다. 1840년 6월, 최초의 비극 <유디트>가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에는 <게노베바>를 완성하고 1842년에는 최초의 시집을 발간한다. 1842년 말, 헤벨은 분위기를 전환하고 적당한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간다. 일자리는 얻지 못하나 당시 헤벨이 살던 지역의 군주인 덴마크 왕으로부터 2년간 여행 장학금을 받는다. 함부르크로 돌아와 희곡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희곡에 관한 나의 견해>를 쓰고 <게노베바>를 출간한 후 견문을 넓히고 예술에 관한 지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파리로 여행한다. 거기서 하이네를 만나 교류한다. 아들의 사망으로 인한 엘리제의 고통을 고려하여 정식으로 혼인할 생각도 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마리아 마그달레나>를 탈고한다. 1844년, <희곡에 관한 나의 견해>를 보완한 것을 에를랑겐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여행하다가 1845년 돈이 떨어져서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빈에 들른다. 저명한 극작가 그릴파르처 등을 만나고 정착 가능성을 타진하나 쉽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그를 작가로서 존경하고 환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자신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고 사생아를 나아 기르고 있는 국립극장의 전속 배우 크리스티네 엥하우스를 알게 되어 생각을 바꾼다. 그들은 이듬해 혼인한다. 이 행복한 결혼은 헤벨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된다. 헤벨은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잇달아 작품들을 발표한다. 이제 헤벨은 <마리아 마그달레나>의 분위기, 청년기에서 벗어나 대작으로 눈을 돌린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여파로 일어난 3월혁명의 와중에서, 군대가 빈을 포격하는 혼란 속에서 헤벨이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헤로데스와 마리암네>(1848)가 태어난다. 헤벨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대작 <니벨룽겐>은 <각질 피부를 가진 지크프리트>, <지크프리트의 죽음>, <크림힐트의 복수> 등으로 구성된 3부작으로 1855년 10월에 집필을 시작하나 다른 일 때문에 중단하다가 1859년에 다시 시작해 1860년 초에 탈고한다. 만년에 헤벨은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그의 작품들이 여러 주요 극장에서 상연되는 영예를 누린다. 헤벨은 러시아 역사에서 소재를 얻어 집필을 시작한 비극 <데메트리우스>를 탈고하지 못하고 1863 12월 13일 빈에서 눈을 감는다.
옮긴이
윤도중(尹度重)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뮌헨 대학교, 본 대학교, 마인츠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주한독일문화원, 전북대학교를 거쳐 현재 숭실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레싱, 괴테, 실러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레싱: 드라마와 희곡론≫(2003), 역서로는 ≪레싱: 필로타스, 미나 폰 바른헬름≫(1991), ≪레싱 희곡선: 현자 나탄, 에밀리아 갈로티≫(1991), ≪괴테 고전주의 대표희곡선집≫(1996), ≪카를 추크마이어: 쾨페닉의 대위≫(1999), ≪독일대표희곡선집 I(근대편)≫(공역, 2001), ≪레싱 전설≫(2005), ≪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2008)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로선 도저히 이 세상을 더는 이해하지 못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