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다양한 1인 미디어 공간에서 영화를 논하고 있다. 유튜브나 팟캐스트에서도 영화에 관한 순발력 있는 비평장이 형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의 고유한 등뼈와 근육, 힘줄과 핏줄을 세세하게 밝혀내는 건, 결국 글이다. 특히 개별 영화의 고유한 미세 결정과 그 구조를 읽어 내기 위해선 긴 호흡의 글이 필요하다. 이 책은 영화에 관한 치열한 해석을 두고 대화든, 경쟁이든 할 수 있는 사람도, 지면도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의 압력을 견디며 완성한 고품격 영화평론서다.
1부 ‘기억과 고독의 위치’에서는 왕자웨이의 초기작 <중경삼림>, 허진호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허우 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 등의 영화들을 읽어 낸다. 영화 속 인물들은 환경의 변화 안에서 외로움에 질척이는 존재들이다.
2부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에서는 구스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 아쉬가르 파라디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창동의 <밀양>과 봉준호의 <마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등의 영화를 다룬다. 나와 가족과 이웃, 사회를 지지하는 정서적 관계가 허술한 구조물이란 사실을 환기시킨다.
3부 ‘외침과 위반의 시간’에서는 불온한 시대, 음험한 현실 안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물을 정면에서 다룬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 이창동의 <버닝>,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과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을 통해서다.
4부 ‘희열과 숭고의 지도’ 에서는 생에 편만한 아포리아의 다음 순간을 사색한다. 일디코 엔예디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 테런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등의 영화와 함께한다.
5부 ‘이토록 인간적인’에서는 연출 방식에서 매우 뚜렷한 일관성을 보여 온 짐 자무시와 홍상수, 존 카니의 영화를 다룬다. <패터슨>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원스> 등 감독들이 표방하는 영화의 개성 안에서 영화로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200자평
다시 꺼내 봐야 하는 영화가 있다. 오래 음미하고 바뀐 시선으로 다시 마주하면 다른 감정과 새로운 통찰을 선사하는 영화가 있다. 이 책은 우리 삶에 파고들어 심금을 울린 영화뿐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새 삶을 만들어 내는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다.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하면서 수준 높은 평론가로 평가받은 안숭범은 이들 영화의 고유한 등뼈와 근육, 힘줄과 핏줄을 세세히 밝혀낸다.
지은이
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강의한다. 시인(2005)으로, 영화평론가(2009)로 등단한 이래 서사학, 스토리텔링학을 바탕으로 문화콘텐츠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출판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영화학회 학술이사, 인문콘텐츠학회 편집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심사를 맡기도 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SF, 포스트휴먼, 오토피아』(2018), 『북한을 읽는 해외 다큐멘터리의 시선들 』(2018) 등의 학술서가 있으며 시집으로는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2017), 『티티카카의 석양 』(2012)이 있다.
차례
책 머리에: 나르시스를 데려간 이미지
1부 기억과 고독의 위치
01 그 시절의 모든 것은 어긋났지 : <아비정전>, <중경삼림>
02 그 죽음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 <8월의 크리스마스>
03 ‘공간-인물’로 읽는 사랑의 유형학 : <쓰리 타임즈>로 허우 샤오시엔 읽기
2부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
04 이 죽음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 : 구스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
05 관계의 균열, 논리의 우열, 진실의 분열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06 가해와 피해의 미로에 갇힌 엄마들 : <마더>, <밀양>
07 담장 안 현실에 대한 질문 공동체 : <어느 가족>
3부 외침과 위반의 시간
08 변해 가는 것을 향한 밀려나는 자의 응시 : <스틸 라이프>, <세계>
09 저 희미한 기미(機微) : <버닝>으로 이창동 읽기
10 ‘우리’는 가능한가 : <내일을 위한 시간>, <나, 다니엘 블레이크>
4부 희열과 숭고의 지도
11 정동의 현상학, ‘관계맺음’의 형이상학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12 정글, 당신과 나의 어느 심연 : <열대병>
13 한 손엔 꽃을, 한 손엔 언어를, 허나 너무 늦지 않기를 : <영원과 하루>
14 내적 평화의 아파테이아를 향한 우주적 명상 : <트리 오브 라이프>
5부 이토록 인간적인
15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 : <패터슨>
16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17 한 점의 기억, 한 줌의 애도, 포월의 에피파니 : <원스>
책속으로
“어떤 영화는 삶의 여백을 다녀가지만, 어떤 영화는 삶이 된다. 영화 속 어떤 이미지는 단지 기억되지만, 어떤 이미지는 관객의 삶으로 들어가 그와 살아간다. 그런 각별한 영화들이 있다. 내 누추한 문장에 간절히 누이고 싶었던 영화의 순간과 영화 이후의 희열이 있다. 스크린 안에서 점멸하는 삶이 여기로 와 나의 내일을 주무르던 기억들. 이 책은 내가 존재하는 한 연장될 그 순간들에 관한 기록이다.”
“책 머리에: 나르시스를 데려간 이미지” 중에서
<화양연화>에서 차우[량차오웨이(梁朝偉, 양조위) 분]와 리첸[장만위(張曼玉, 장만옥) 분]이 만나던 호텔방 2046호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사랑에 관한 선언’을 목전에 두고 자기 안팎의 상황적, 도덕적 장애물과 싸우는 남녀의 긴장이 확장된 세계다. 그런데 이는 홍콩의 완전한 중국편입이 예고된 2047년의 시점을 목전에 둔 ‘어떤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2047년은 중국의 정치적, 법적 환경 안으로 홍콩이 실질적으로 귀속되는 중차대한 변곡점이다. 왕자웨이는 홍콩의 역사와 개인사의 진실을 운명적으로 접합한다.
-“01 그 시절의 모든 것은 어긋났지 : <아비정전>, <중경삼림>” 중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는 매우 정직한 멜로드라마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편지>나 <약속> 등과 다른 결을 가진다. 피차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준용한 듯 보이지만, 여기서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파국으로 들이닥치는 극적 소재가 아니다. 영화는 이전부터 죽음과 동행해 온 한 사내가 사랑의 감정을 수용하는 태도를 전시한다. 죽음을 이용해 사랑을 둘러싼 정서를 폭발시키지 않는다. 특별했던 관계의 형성과 소멸 사이에서 인물들의 자기의식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줄 뿐이다.
-“02 그 죽음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8월의 크리스마스>” 중에서
<마더>가 도착했을 때, 잠시 망각했던 질문으로서 <밀양>이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살인이 발생하고 해결을 위해 기억을 소환해야 하며 종국에 가서는 망각을 도모하는 주인공이 전경화된다. 영화가 끝난 이후 영화 속 주인공이 점유한 위치도 미묘하게 연결된다. 어떤 면에서는 <마더>가 끝난 지점에서 <밀양>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효도관광에서 돌아온 혜자(김혜자 분)는 <밀양> 오프닝 신의 신애(전도연 분)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일상의 물리적 거점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끝에 재구되는 것은, 유사적 연상관계로 합치되는 ‘엄마의 일생’이다.
“06 가해와 피해의 미로에 갇힌 엄마들: <마더> <밀양>” 중에서
테런스 맬릭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이미 발생한 비극적 사태의 기원을 물으면서 숨은 신의 뜻을 헤아리거나 변증법적 화해의 세계를 모색한다. 그 세계는 요동치는 정념(pathos)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내적 평화의 아파테이아(apatheia)를 계시한다. 그들은 모두 아포리아적 존재로 구도자의 태도를 숨기지 않으면서 해갈의 세계를 희구해간다. 경험세계에 편재하는 절망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철학 작업을 대리 수행한다. 테런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2011)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연출 태도를 자신의 인장으로 삼아왔다.
“14 내적 평화의 아파테이아를 향한 우주적 명상: <트리 오브 라이프>” 중에서
홍상수 영화 속 남녀가 교감하는 방식을 보면, 일반적인 연인 관계라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대개는 술을 매개로 정서적 친밀감을 충분히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섹스 단계로 진입한다. 사회의 윤리적 규준에서 벗어나는 복수의 ‘불륜’ 관계가 여러 형태로 전시되는 것도 잘 알려진 특징이다.
“16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