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독일 고전주의의 대가 괴테와 실러의 합작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며 20대의 나이에 일약 스타 작가가 된 괴테는 1790년대에 들어 큰 시련을 겪게 된다. 1795년 초부터 괴테는 실러가 발행하던 잡지 ≪호렌(Horen)≫에 여러 글과 작품을 발표했는데, 시대를 앞서 나간 이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와 비난을 샀다. 이에 괴테는 ‘호렌 비평가들’에게 벌을 주자고 제안했고, 실러가 이를 받아들여 <크세니엔>이 탄생하게 된다.
괴테와 실러가 선택한 방식은 바로 “에피그람”이었다. 격조 높은 고전 시 형식인 에피그람은 2행으로 된 풍자시 또는 격언시로, 위트 넘치고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두 작가에게 딱 맞는 무기였다. 두 사람 다 로마의 에피그람 시인인 마르티알리스를 존경했기에, 그의 에피그람 시집에서 “크세니엔”이라는 제목을 따왔다. 한 사람이 테마를 정하면 다른 사람은 알맞은 형태를 찾고, 한 사람이 시를 쓰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수정하며 위대한 공동 창작물을 완성했다.
검 대신 펜을 들고
“크세니엔”은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괴테와 실러가 선택한 이 “선물”은 “소금을 과도하게 뿌린” 신랄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이 “초석(硝石)과 석탄 그리고 유황으로 빚은” 2행시를 통해 “속물들의 나라”에 “불꽃놀이”를 일으킨다.
두 사람의 예리한 펜 끝은 ≪호렌≫을 비판한 당시 문학잡지와 비평가뿐 아니라,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문학 취향, 독일의 낮은 문화 환경까지도 두루 공격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엄격한 계몽주의, 대안 없이 극단적 파괴를 지향하는 프랑스 혁명, 괴테의 색채론을 배격한 뉴턴의 추종자들, 내용 없는 평범한 문학과 무능한 철학자 모두가 날카로운 풍자시 앞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문단은 발칵 뒤집혔고 사람들은 각각의 작품이 풍자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 시를 쓴 것은 누구인지 알아맞히려 애썼다. 공격받은 이들 역시 같은 에피그람 형식으로 반박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까지 참전하면서 이 “크세니엔 논쟁”은 문학사에 유례없는 독특한 현상이 되었다.
크세니엔의 구성과 변화
두 시인은 서로 원고를 주고받으며 수많은 에피그람들을 창작해 냈지만, 처음 계획과 달리 이 시들을 따로 책으로 엮지 않고 1796년 실러가 발행한 ≪1797년을 위한 문예 연감(Musen-Almanach für das Jahr 1797)≫에 수록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정서한 필사본의 작품이 676편이다. 그러나 실제 ≪1797년을 위한 문예 연감≫의 부록으로 발표할 때 실러는 비교적 평화적인 작품들을 빼고 새로 쓴 2행시들을 추가해 414편의 크세니엔을 연작시로 구성했다. 그리고 남은 작품들을 ≪1797년을 위한 문예 연감≫ 여러 부분에 나눠 실으면서 “스케이트장(Die Eisbahn)”이라는 제목하에 16편, “봉납 현판(Tabulae Votivae)”이라는 제목하에 103편, “많은 여인들에게(Vielen)”라는 제목하에 18편, “어느 여인에게(Einer)”라는 제목으로 19편, 제목을 붙이지 않고 18편을 묶어서 총 588편을 수록했다.
이후 실러는 자신이 쓴 2행시들을 몇몇 <에피그람 그룹>으로 묶어 별도의 에피그람 시집으로 만들어 내면서 새로운 제목을 붙여 자기 시집에 넣었다. 괴테는 ≪크세니엔≫에 수록되지 않았던 2행시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놓았다가 나중에 “봄”, “여름”, “겨울”로 이름을 붙이고, <봉납 현판> 그룹에 넣었던 몇몇 2행시들을 “가을” 그룹에 넣어 정리했다. 그래서 <사계(四季>라는 연작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밖에 19세기의 문헌학 연구가 에리히 슈미트(Erich Schmidt)와 베른하르트 주판(Bernhard Suphan)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178편의 크세니엔을 발굴해 출판했고, 전체적으로 926편의 크세니엔을 모을 수 있었다.
이 크세니엔들은 많은 원고가 남아 있어 수정 원고와 이전 버전을 비교 확인할 수 있고, 괴테와 실러 간의 편지나 출판사, 비서들과 나눈 편지 등이 작품 이해와 정전 확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괴테 시선 IV 크세니엔≫에는 괴테의 ≪바이마르 전집≫에 수록된 926편의 크세니엔들과 그 이후에 실러의 유고에서 발견된 6편의 크세니엔 그리고 괴테와 실러의 편지 교환에 들어 있던 3편의 에피그람 등을 포함해서 총 942편의 지금까지 수집된 모든 크세니엔을 수록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낸 임우영 교수는 정확한 번역과 함께 당시 시대 상황과 작품의 배경, 괴테와 실러의 인간관계, 작품이 풍자하는 대상 등을 자세한 해설과 주석으로 제시해 작품을 좀 더 정확하고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200자평
독일의 시성(詩聖) 괴테의 시를 모은 ≪괴테 시선≫ 그 네 번째는 <크세니엔>으로, 괴테와 실러의 공동 작품이다. 괴테와 실러는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달랐다. 그런 그들이 유일무이하게 성공한 공동 작업이 바로 이 <크세니엔>이다.
“크세니엔”은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뜻으로, 에피그람, 즉 2행으로 된 풍자시 모음이다.
괴테와 실러는 이 짤막한 2행시를 통해 당시 학계와 문단에서 성행하던 평범함과 무능함, 허식과 속물근성을 신랄하고도 재치 있게 비판한다.
때로는 지나친 인신공격으로 보이는 시들도 있지만, “작가는 글로 말한다”를 몸소 실천해 공격과 방어조차도 문학의 형태를 취한 이 위트 있는 시들은 두 천재의 날카롭고 재치 있는 유머 감각, 사물에 대한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 눈부신 문학적 재능, 드높은 문학에 대한 이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지은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 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 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 ≪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의사이자 작가이며 역사가이자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는 1759년 11월 10일에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공국의 작은 마을인 마르바흐(Marbach)에서 태어나 군의관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슈바벤 지방의 로르히(1764), 루트비히스부르크(1766)로 옮겨 다니며 성장한다. 1773년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오이겐(Karl Eugen) 공작의 명령에 의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엘리트 사관 학교인 카를스슐레(Karlsschule)에 입학해서 법학을 전공하다가 전공을 의학으로 바꾸어서 1780년에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1781년에 익명으로 첫 번째 드라마 ≪군도(群盜, Die Räuber)≫를 자비로 출판하고, 그다음 해에 이 작품이 초연되면서 ‘질풍노도’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군도≫의 혁명적인 내용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실러는 1782년 9월에 공국을 탈출해서 만하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튀링겐 지방의 바우어바흐(Bauerbach)로 피신해 리터(Ritter)라는 이름으로 의사 활동을 시작한다.
1787년 7월 실러는 바이마르로 가서 괴테의 친구들인 헤르더와 빌란트를 만나고 이들의 영향으로 역사학과 그리스 고전 연구에 빠진다. 1788년 9월에는 드디어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괴테와 만나고 괴테의 주선으로 예나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게 된다. 사회적 신분을 얻게 된 실러는 샤를로테 폰 렝게펠트에게 구혼해 1790년 2월에 결혼한다. 실러는 열정적으로 역사 연구에 매진해 <30년 전쟁사(Geschichte des dreißigjährigen Krieges)>(1791∼1793)를 비롯한 많은 역사 논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1791년 1월에는 심한 발열로 중병이 들어 그해 여름까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상태에 빠진다.
병으로 교수직을 내놓은 실러는 칸트 연구에 몰두한다. 1794년 초에는 예나로 거주지를 옮긴다. 1795년 ≪호렌≫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호렌≫에는 헤르더, 피히테,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요한 하인리히 포스와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같은 쟁쟁한 작가들과 철학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호응을 받지 못하자 괴테와 함께 자신들을 비방하는 문인들을 공격하는 2행시 모음집인 <크세니엔>을 실러가 1796년부터 발행하는 ≪문예 연감(Musen-Almanach)≫에 발표하게 된다.
1797년은 실러의 “발라드의 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많은 발라드(담시)가 나왔다. 그 가운데 <장갑(Der Handschuh)>, <잠수부(Der Taucher)>, <종(鐘)의 노래(Lied von der Glocke)>, <폴리크라테스의 반지(Der Ring des Polykrates)>, <이비쿠스의 두루미들(Kraniche des Ibykus)>이 유명하다.
1799년 바이마르로 이사한 실러는 30년 전쟁(1618∼1648)의 비극적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인 ≪발렌슈타인(Wallenstein)≫과 시 <종의 노래(Das Lied von der Glocke)>를, 1800년에는 ≪메리 스튜어트(Maria Stuart)≫를, 1801년에는 ≪오를레앙의 처녀(Jungfrau von Oréans)≫를 연이어 완성한다. 1802년에는 귀족 칭호를 수여받아 프리드리히 폰 실러로 불리게 되었다. 1803년에 실러는 ≪메시나의 신부(新婦)(Die Braut von Messina)≫, 1804년에 ≪빌헬름 텔(Wilhelm Tell)≫을 차례로 완성하고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작업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끝을 맺지 못한다.
실러가 죽기 몇 달 전부터 실러가 죽었다는 가짜 뉴스가 나돌았다. 실러는 1805년 2월부터 실제로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실러는 5월 1일에 극장으로 가는 길에 괴테를 마지막으로 만났고, 9일에 폐결핵으로 인한 폐렴으로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1805년 5월 12일에 바이마르의 성 야곱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1826년 이장을 위해 발굴한 유골이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1827년 12월 16일 바이마르에서 새롭게 건설된 공동묘지의 ‘군주 묘역(Fürstengruft)’에 매장하지 않고 안치되었으며, 나중에 괴테도 본인의 바람에 따라 실러 옆에 놓이게 되었다.
실러는 평생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박차를 가했고, 최고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명예심과 열정에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에게 이런 의지를 부여한 것은 뜨겁고 격렬한 감정으로, 더 높이 비약함으로써 헌신과 희생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실러는 비극적 운명을 도덕적 행위나 영웅적 행위 또는 범죄적 행위라도 인간의 위대함을 행해 가는 의지와 현세적 정의의 회복으로 생각되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변증법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비극적 운명은 그의 드라마에서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러는 이 역사적 현실에 의해 운명적인 인간의 삶의 현실을 보여 주려고 했던 위대한 작가였다.
옮긴이
임우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로 있으며,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기획조정처장과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대학생을 위한 독일어 1, 2≫(공저), ≪서양문학의 이해≫(공저), ≪세계문학의 기원≫(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 ≪괴테 시선 1, 2, 3≫, 바켄로더와 티크의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와 ≪예술에 관한 판타지≫,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괴테. 예술작품 같은 삶≫(공역), ≪괴테 사전≫(공저),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낭만주의≫(공역), 라테군디스 슈톨체의 ≪번역 이론 입문≫(공역), 니콜라스 보른의 ≪이별 연습≫, ≪민중본. 요한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 ≪미학 연습. 플라톤에서 에코까지. 미학적 생산, 질서, 수용≫(공역), ≪괴테의 사랑. 슈타인 부인에게 보낸 괴테의 편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독자적 소설로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2018), <1775년 가을에 흐르는 괴테의 눈물−사랑의 고통 속에서 솟아나는 활기>(2016), <괴테의 결정적인 시기 1775−“릴리의 시”에 나타난 스물여섯 괴테의 고민>(2015), <흔들리는 호수에 비춰 보는 자기 성찰. 괴테의 시 <취리히 호수 위에서>>(2014) <괴테의 초기 예술론을 통해 본 ‘예술가의 시’ 연구. <예술가의 아침 노래>를 중심으로>(2013), <‘자기 변신’의 종말? : 괴테의 찬가 <마부 크로노스에게>>(2011), <“불행한 사람”의 노래 : 괴테의 찬가 <겨울 하르츠 여행> (1777)>(2008), <영상의 문자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소설에 나타난 ‘겹상자 문장’ 연구>(2007), <괴테의 ≪로마 비가(Römische Elegien)≫에 나타난 에로티시즘>(2007),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에 나타난 ‘체념(Entsagung)’의 변증법>(2004), <괴테의 초기 송가 <방랑자의 폭풍 노래> 연구. 시인의 영원한 모범 핀다르(Pindar).>(2002), <괴테의 초기 시에 나타난 신화적 인물 연구>(2001), <새로운 신화의 창조−에우리피데스, 라신느, 괴테 그리고 하우프트만의 ≪이피게니에≫ 드라마에 나타난 그리스의 ‘이피게니에 신화’ 수용>(1997) 등이 있다.
차례
크세니엔 Xenien
1796년 7월 모음집 <1>∼<676>
원고 묶음에 있던 크세니엔 <677>∼<727>
바이마르와 예나를 오가면서 쓴 2행시들 <728>∼<763>
편지에서 나온 크세니엔 <734>∼<765a>
≪문예 연감≫에 수록된 크세니엔 <766>∼<881>
≪문예 연감≫에 들어 있던 다른 2행시들 <882>∼<936>
실러의 원고에서 나온 크세니엔 <937>∼<942>
부록
1. ≪1797년을 위한 문예 연감≫에 수록된 크세니엔
1) <크세니엔 Xenien>
2) <봉납 현판 Tabulae Votivae>에 실린 크세니엔
3) <스케이트장 Eisbahn>
4) <많은 여인들에게 Vielen>
5) <어느 여인에게 Einer>
6) 소제목 없이 묶어서 ≪문예 연감≫에 수록된 크세니엔
2. ≪괴테 전집≫의 <사계(Vier Jahreszeiten)>에 수록된 크세니엔
사계
크세니엔 찾아보기
원어 찾아보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열쇠
그대 자신을 인식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아라.
그대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대의 마음을 들여다보아라.
고난의 시대
철학자들은 언어를 망치고 있고, 시인들은 논리학을 망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오성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
친구는 내게 소중하지만, 나는 적을 이용할 수도 있다. 친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적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저들이 정당을 만든다. 이 무슨 불법 시작이냐!
그러나 우리의 정당은, 반면에, 당연한 일이다.”
여러 공화국들을 나는 보아 왔는데, 그중에서 최고의 공화국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이익을 주진 않는다.
에피그람 한 편이 너무 짧다고, 뭔가 내 마음을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여보시게, 입맞춤은 훨씬 더 짧지 않은가?
응석받이
우리는 남의 자식을 결코 자기 자식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착각이지만, 자기 자식이 우리 가슴에 훨씬 가까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