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브라이언 프리엘, 살아서 전설이 되다
브라이언 프리엘이 오스카 와일드와 조지 버나드 쇼를 잇는 아일랜드 최고의 극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루나사에서 춤을>의 대성공 덕분이었다. 1980년대에 이미 전성기를 맞은 대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은 1990년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이 흥행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평소 아일랜드의 문화와 민속, 언어를 작품에 풍부하게 담아내며 아일랜드 대중과 문화예술인, 지역사회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 왔던 프리엘이었지만, <루나사에서 춤을> 이후 세계적인 극작가로 발돋움하면서 그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 곳곳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와 기획 회고전이 열렸으며 2015년에는 제1회 루나사 국제 프리엘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이 행사의 주요 후원자였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프리엘의 작품을 두고 ‘전 세계인에게 선사한 아일랜드의 보물’이라 극찬했다. 살아 있는 전설이던 브라이언 프리엘은 생전에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를 안고 그해에 영면에 들었다.
<루나사에서 춤을>, 브로드웨이를 사로잡다
프리엘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억’, ‘역사’, ‘가족’이다. <루나사에서 춤을>에는 프리엘의 이런 주제의식이 종합되어 있다. ‘기억극’이라고도 부르는 이 작품은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936년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먼디 자매의 삶이 어린 마이클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극적 사건과 그녀들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갈등의 배경에는 전후 아일랜드의 역사가 도사려 있다. 가장 프리엘 답고, 가장 아일랜드적인 작품인 것이다. 이처럼 아일랜드 색이 짙은 작품이지만 ‘역사’와 ‘가족’, 그에 대한 ‘기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는 세계무대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시즌 최고의 흥행작이 된 것이다. 여성과 여성 연대를 묘사한 그의 관점 또한 시류에 부합하며 작품의 장기 흥행을 이끄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먼디 자매, 여성 연대의 힘을 보여 주다
<루나사에서 춤을>에서 브라이언 프리엘은 여성 연대의 힘에 주목하고 있다. 작품이 발표된 1990년대는 아일랜드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여성의 역할 변화와 권리 신장이 두드러지던 때였다. 아일랜드에서는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루나사에서 춤을>은 이런 사회 변화상을 반영하듯 여성 인물들의 자립과 연대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매들은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미혼모인 크리스와 지적 장애를 가진 로즈도 예외가 아니다. 크리스와 로즈를 대하는 이웃들의 편견 어린 시선도 자매들은 서로에 대한 지지와 굳은 연대로 이겨 낸다. 루나사 축제를 앞두고 먼디 자매가 다 함께 춤추는 모습에서 그녀들의 내적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프리엘은 이들 자매를 통해 여성에게 생각보다 남성의 존재가 크게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200자평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영어권 극작가로 평가되는 브라이언 프리엘의 대표작이다. ‘기억극’이라고도 부르는 이 작품은 마이클이라는 인물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의 기억을 좇아 진행된다. 1936년 전후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산업화라는 사회 변혁에 적응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자매들의 고달픈 삶이 따뜻하게 그려진다. 1990년 아일랜드에서의 초연이 대성공하면서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시즌 최고의 연극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이후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국내 개봉했다. 이 책은 충실한 번역과 해설로 원작의 감동을 전한다. 더불어 아일랜드의 민속과 문화, 언어를 작품에 풍부하게 담아내며 아일랜드의 삶에 천착했던 브라이언 프리엘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본격 소개한다.
지은이
브라이언 프리엘(Brian Friel, 1929∼2015)은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영어권 극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960년부터 극작에 전념했다. 인간 욕망의 한 형태로서 가족 간의 유대, 의사소통, 신화 만들기, 그리고 서사와 역사, 국적 사이에서 마구 뒤얽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를 통해 아일랜드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에 천착했다. 일상에 내재된 삶의 의미와 인간 정서를 탐색해 간다는 점에서 프리엘은 흔히 ‘아일랜드의 체호프’ 또는 ‘에메랄드 체호프(Emerald Chekhov)’로 불리기도 한다. 2006년 아일랜드 예술원 최고 영예회원(Saoi) 직에 선출되었으며 2011년 ‘2010 도네갈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2015년부터 매년 루나사 국제 프리엘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다. 이렇듯 브라이언 프리엘은 문학가로서 최고 영예를 누리다 2015년 8월에 영면에 들었다. 그의 희곡들은 현재 아일랜드와 영국뿐만 아니라 뉴욕 브로드웨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옮긴이
조태준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앙토냉 아르토의 연극 이론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객원교수를 거쳐 배재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2년 미국 루이지애나 대학교(ULL) 커뮤니케이션학과 방문교수를 지냈다. 연극 이론 및 극작술, 공연미학에 관련한 논문과 칼럼을 여러 편 썼으며,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연극≫(천재교육, 2018)을 공동 집필했고, ≪골고다의 딸들≫(한웅출판, 1992), ≪바람의 전쟁≫(열린세상, 1996> 등의 번역 소설과 번역 희곡 ≪유령소나타≫(지만지, 2014)와 ≪바다에서 온 여인≫(지만지, 2015), ≪로칸디에라≫(지만지, 201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지만지, 2018), ≪헤다 가블레르≫(지만지, 2018), ≪건축가 솔네스≫(지만지, 2019)를 펴냈다. 또한 연극 현장에서 극작가 및 연출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고 현재 극단 인공낙원 대표, 극단 하땅세 상임 연출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창밖의 앵두꽃은 몇 번이나 피었는고>, <3cm>, <푸른 개미가 꿈꾸는 곳> 등이 있으며, 연극 <유령소나타>, <루나사에서 춤을>, <목소리>, 뮤지컬 <포비든 플래닛>, <애랑연가>, <규방난장>, 오페라 <류퉁의 꿈> 등을 연출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배경, 무대 장치, 의상
1막
2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마이클 : 제 마음이 1936년 그 여름으로 되돌아갈 때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밀려옵니다. 그해 여름 우리 집에 처음으로 무선 수신기− 그래요, 일종의 라디오 수신기라는 게 생겼죠.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때가 막 8월이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에 매기 이모는− 매기 이모는 우리 집 웃음 제조기셨죠− 이모는 이 물건에다 이름을 붙여 주자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옛 켈트족이 모시던 추수의 신 이름을 따서 그것을 ‘루’라고 부르길 원하셨죠. 옛날엔 8월 1일이 라 루나사(Là Lughnasa)라고 해서 이교도 신인 루를 찬양하는 축제일이었거든요. 또 이날 이후 이어지는 몇 날 몇 주의 추수 절기를 사람들은 루나사 축제라고 불렀죠. 하지만 케이트 이모는− 아, 케이트 이모는 국립학교 교사로 아주 고상한 분이셨습니다− 이모는 생명이 없는 물건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두고 이교도 신을 들먹이는 것은 사악한 짓이라 하셨어요. 그래서 우린 그걸 그냥 마르코니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수신기에 그렇게 새겨져 있었거든요.
-7쪽
잭 : 결혼한 적이 없단 말이니?
크리스 : 없어요.
매기 : 우리 다 마찬가지예요, 오빠. 오빠가 우릴 위해 남자들을 구해 오셔야죠.
잭 : (크리스에게) 그럼 마이클은 사생아구나?
크리스 : 그게− 네− 그런 셈이죠….
잭 : 애는 착하던데.
크리스 : 네. 못되진 않았어요.
잭 : 그 애가 있으니 넌 운이 좋은 거다.
아그네스 : 우리 모두 운이 좋은 거죠.
-99쪽
마이클 : 가장 자주 떠오르는 루나사 때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의 주변에서 나를 매혹하는 건 그것이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 속에서는 분위기가 실제 사건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모든 것이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환상적인 것이 되죠. 그 기억 속에서, 또한 공기는 1930년대 음악과 함께 향수에 젖어듭니다. 그것은 저 멀리 어디에선가부터 흘러들어오죠− 음악의 신기루− 실제로 들리기도 하고 상상이기도 한 꿈의 음악 말입니다. 그 음악은 그 자체이면서 그것의 메아리이기도 하죠. 소리가 너무나도 매혹적이고 황홀해 오후 내내 마법에 걸려 있기도 하고 넋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참으로 이상한 건 모든 사람들이 타인들과 완전히 유리된 가운데, 그 감미로운 소리 위에 붕 떠다니면서, 리듬을 타며 나른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박자보다는 음악의 분위기에 호응하면서 말이죠.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서 전 춤을 춘다는 건 바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