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난폭하고 잔인한 전쟁 같은 이별
스탄과 오드레가 극장 안에 들어서고, 스탄은 “끝이야”라는 말로 길고 긴 모놀로그를 시작한다. “헤어지자” 한마디 말고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지만 아니다. 스탄은 온갖 잔인하고 난폭한 표현들을 복부에서부터 끌어내 오드레에게 쏟아붓는다. 스탄의 공격이 무려 30분 동안이나 이어지고 난 뒤 드디어 오드레가 반격한다. 스탄이 내뱉었던 말들을 다시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보내며, 거칠고 무시무시한 언어를 예리하게 별러 스탄의 온몸에 비수처럼 내꽂는다. 어떤 이별이 이보다 더 잔혹할 수 있을까, 한바탕 전쟁을 치른 두 사람은 극장을 나서면서 상대에 대한 사랑도 완전히 닫아 버린다. 하나였던 세계도 이로써 완전히 분리된다. 알고 보면 처음부터 너무 달랐던 둘은 그 차이에 매혹되어 연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동안 서로 많은 것을 약속했고 둘의 눈빛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고 상대방을 자신의 일부처럼 여겼다. 이별은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다. 모든 걸 속속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한순간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 있는 것, 서로를 향하던 눈빛이 방향을 바꾸는 것, 함께한 약속이 무의미해지는 것, 이 모든 변화를 깨닫고 결국 인정해야 하는 것이 이별임을 스탄과 오드레의 긴 모놀로그가 말해 주고 있다.
파스칼 랑베르만의 언어로 재현된 이별의 속성
‘스탄’과 ‘오드레’는 파스칼 랑베르의 <사랑 닫다> 프랑스 초연 무대에서 남녀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의 실제 이름이다. 파스칼 랑베르는 오랫동안 함께 작업한 배우들을 염두에 두고 희곡을 쓰면서 그들의 말버릇, 고유의 표현을 대사에 그대로 썼다. 문학적 수사가 아닌 배우들의 이 사적인 언어가 이별의 속살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럼에도 파스칼 랑베르의 희곡 전체는 한 편의 문학적인 시다. 파스칼 랑베르는 자신만의 창의적인 어휘를 동원하고 때로는 문법까지 변형해 단어와 문장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반복되고 끊어지고 이어지는 말들은 적절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역자는 파스칼 랑베르의 이런 시적인 언어를 꼼꼼하고 또 조심스럽게 우리말로 옮겼다. 원작의 의도에 따라 2019년 <사랑의 끝> 한국어 초연 때는 출연 배우들의 언어로 각색되었던 대사를 책으로 펴내면서는 원작에 충실하도록 우리말로 옮겼다. 대신 풍부한 주석을 통해 원작의 의도와 맥락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했다. 번역 및 한국어 초연 연습 과정에서 원작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파스칼 랑베르, 한국어 초연 연출가인 아르튀르 노지시엘과 나눈 충분한 대화 덕분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프랑스의 연극 현장에서 10여 년간 활동한 역자의 경력 또한 원작의 작품 세계를 한국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200자평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 이별한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지만 스탄과 오드레는 가장 잔인하고 난폭한 말을 융단폭격처럼 상대방에게 쏟아붓는다. 마침표도 없고 쉼표도 없고, 논리와 이성이 무너져 버린 연인의 중언부언이 한참 이어진다. 파스칼 랑베르는 남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사적인 표현을 그대로 긴 모놀로그에 담았다. 문학적 수사를 걷어낸 거칠고 때론 잔인한 이 언어가 화려한 껍질에 가려져 있던 사랑과 이별의 속살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2019년 아르튀르 노지시엘 연출로 한국어 초연된 연극 <사랑의 끝> 원작 희곡이다.
지은이
파스칼 랑베르(Pascal Rambert)는 1962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이면서 안무가이기도 한 그는 청소년기(16∼18세)부터 문학가로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플럭서스(Fluxus) 운동과 현대 철학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공연 예술 분야에서 파스칼 랑베르는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 1940∼2009)와 연출가 클로드 레지(Claude Régy, 1923∼2019)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얻었고 파리 샤이오 극장의 연극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프랑스의 저명한 연출가이자 이론가인 앙투안 비테즈(Antoine Vitez, 1930∼1990) 교수에게 연기와 연출을 배웠다. 그는 2007∼2017년 일 드 프랑스의 주느빌리에 극장(T2G-Théâtre de Gennevilliers)의 극장장으로서 지역 공연 문화에 생명력과 다양성을 불어넣었는데, 이 국립드라마센터는 연극, 무용, 오페라, 현대 미술, 영화, 철학 분야의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오페라 연출력도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단편영화들은 팡탱(Pantin), 로카르노(Locarno), 미아미(Miami), 파리(Paris) 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옮긴이
이현주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글로벌 캠퍼스) 입학, 상명대학교 공연예술학과(연기 전공)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연극 학교 ‘Cours Florent’을 졸업했다(연기/연출 실기 전공),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석사(연출사),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박사(공연예술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수원 과학대 공연 연기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옮긴이 일러두기
나오는 사람들
사랑 닫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 의자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응 그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 오드레야
나 갖고 싶은 거 하나도 없거든 근데 그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는 나 줘
그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는 내가 가져갈게
나 아무것도 없어도 돼
우리 책들 네가 다 가져
원하는 거 있음 다 가져가 근데 그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는 안 돼
악보들도 네가 다 가져
같이 산 책들 내가 선물한 책들 물건들 다 가져 그런데 그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는 안 돼
-25쪽, 스탄의 대사 중에서
이건 카오스야 용서해 주라
나도 좋아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속에 있는 것들은 말로 나와야 하잖아 그렇잖아
그게 말로 나오고 있는 거야
말로 해야 하니까
그것들은 말로 표현할 때만 비로소 존재하니까
그것들은
우리가 존재하게 만드는 그것들은
우리는 그것들을 존재하게 했잖아 바로 여기서
그건 계속할 거야 여기서
그런데 밖에 나가면 끝이야 오드레야 끝
여기서는 존재하게 했어 그것들을
우리 작업을 통해 나오는 그것들을
내면에 움츠리고 있던 그것들
갑자기 펼쳐지는 그것들
그래서 우리 눈앞에 현존하는 그것들
메마른 길 침묵의 길을 뚫고 나와서
이 공간에서 응 피어나는 그것들 귀에까지 들려오는 귀를 황홀하게 하는 그것들
너는 그 길의 전문가잖아
모질고 질투 많은 그 길의 전문가잖아 존재하지 않다가 갑자기 존재하는 그 길의 전문가 지하에 있는 것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그 발현(發現)의 전문가
넌 너만의 방식이 있잖아 그것들을 가볍게 하는 그것들을 찾으러 네 마음속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그것들을 우리 눈앞에 살게 하려고 수면 위에 넓은 플랫폼에 우리 앞에 내어 보이는 (너만의 방식이 있잖아)
48-19쪽, 스탄의 대사 중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니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내가 사랑한 건 나 자신이라고?
네 말이 분명히 맞아 난 지식인이 아니야 너는 이론들을 흠숭하고 너는 그 지긋지긋한 이론들을 우리 면전에 던지잖아 너는 그 이론들을 흠숭하잖니 넌 시도 때도 없이 그 이론들을 마구 쏟아 내면서 그걸 흠숭하잖아
너는 이론들을 마구 쏟아 낸다고 근데 나는 아니야 sorry
나는 대변인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대변하는 대변인일 뿐이야
그런 내가 작업을 할 때 뭐를 좋아하냐고?
아마 나 자신은 아닐 거야 작업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은 아닐 거라고
내가 연주하는 이 악보는 그건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있는 거야 내가 아니라
눈물들 기쁨들 그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즐거움은 너한테는 참 미안한데 그건 듣는 사람들의 즐거움 속에 있어
응 너한텐 이게 많이 놀랍지
근데 그런 사람들도 있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내가 사랑한 건 너야
넌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
120-121쪽, 오드레의 대사 중에서
네가 왜 그렇게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가져가
길거리에서 발견했던 그 의자
네가 그랬잖아 가져가자
그것 때문에 공항에서 한참 애를 먹었잖아
수화물 칸에 안 넣겠다고 해서 비행 내내 네 무릎 위에 안고 왔잖아 아기처럼
그런 널 바라보면서 내가 그랬어 씨발 나 쟤 사랑해 나 쟤 너무 사랑해 피렌체 파리 비행 때의 기억 그걸 내가 가져가는 건 괜찮겠니 핑크색 자수 놓인 의자가 아니라 비행 내내 네가 의자를 무릎 위에 올리고 왔던 그 기억
물질적이지 않은 것들만 가져가는 건 괜찮겠니
내 마음속에 있는 것들
그래서 네가 되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
-137-138쪽, 오드레의 대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