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의 오리지널
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안녕하세요. 북레터 인텔리겐치아입니다.
언택트로 가장 답답한 건 예술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온라인에서 중계되는 예술은 모니터만큼이나 차갑고 1920×1080 밖에 안 보이는 듯해 아쉬워요. 오늘은 그야말로 오리지널의 오리지널을 소개합니다. 문학의 기원이며 예술의 시작, 희곡입니다.
그리스 비극 마니아라면 놓치면 안 될 귀한 작품입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이고 특히 여성 캐릭터와 심리 묘사에 탁월했어요. 2500년 전 작품이란 걸 고려하고 당시 발표된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서, 에우리피데스 초기 극작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 보는 맛이 있습니다.
작품명 ‘알케스티스’는 품성과 용모로 명성이 자자한 여성의 이름입니다.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스가 아폴론의 도움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죠. 아드메토스는 역시 아폴론의 도움으로 죽음을 피할 방법을 알게 되는데, 바로 그 대신 죽을 사람이 있으면 됐습니다. 그는 나이 드신 부모님과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에게 대신 죽어줄 것을 부탁하지만 모두 거절당합니다. 아내 알케스티스만이 허락하고 그 대신 죽죠. 마침 그의 집에 머물던 헤라클레스가 이를 알고 저승사자와 싸워 알케스티스를 다시 데려옵니다.
아드메토스는 본인이 죽기 싫어 가까운 이에게 죽음을 요청하고, 안 들어준다며 원망했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정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만, 결국 저 대신 아내를 죽게 한 남자일뿐이고요. 남편 대신 죽는 알케스티스의 희생은 작품에서 숭고하게 칭송받습니다. 2500년 전 작품임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은 사랑도 가족도 신도 모두 뛰어 넘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로맨스 코미디에 니체의 초인 철학을 넣어 흥행시킨 버나드 쇼 “철학적 희극”이란 부제가 붙은 작품입니다. 쇼는 남녀의 삼각 로맨스를 통해 “초인(Superman)”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철학 사상을 전개해 나가며 적재적소에 유머와 농담을 배치해 희극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등장인물들의 기대화 속에 자연과 본성이 추동해 나가는 생명력 있는 삶이 이상 사회를 만들어 낸다는 쇼의 오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여주인공 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지목한 두 명의 후견인 가운데 태너를 자신의 배우자로 낙점합니다. 사랑은 물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경멸하는 태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앤은 갖은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죠. 극 전반을 채우는 냉소적인 유머와 탁구 치듯 경쾌하게 주고받는 대사들이 정말 재기발랄하고 고급스러워요.
태너는 앤에게서 도망치듯 스페인으로 향했다가 숲에서 산적 떼를 만나 붙잡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어지는 꿈속 장면에서는 돈 주안과 석상, 석상의 딸 아나가 등장해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를 주제로 격렬히 토론해요. 꿈에서 깬 태너는 극적으로 앤과 재회하고 결과는 해피엔딩. 주제가 무거워 지루할 것 같다고요? 1905년 영국에서 초연된 <인간과 초인>은 런던의 코트극장에서 176회 상연되었습니다. 참고로 당시 최고 흥행 기록은 <아무도 몰라>(149회)와 <존 불의 다른 섬>(121회)였어요. 쇼는 <인간과 초인>으로 신세대 지식인들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이후 그가 1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젊은이에게 미친 영향은 당대 다른 인기 작가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대단했습니다.
166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연된 <타르튀프>는 초연 즉시 전면 금지됩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급진 가톨릭 비밀결사 성체회가 성행했는데, 이들은 ‘영혼의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각 가정에 상주하며 사생활을 간섭하고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주인공 ‘타르튀프’가 바로 그 역할이었는데. 타르튀프는 집주인의 신앙심을 이용하여 딸과 결혼하고 아내를 유혹하며 재산을 빼앗고 협박을 일삼았거든요.
당연히 교회와 성직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희극’의 본분을 잊고 감히 ‘종교’ 문제를 다루었다는 이유였어요.
몰리에르는 <타르튀프>의 공연을 위해 백방으로 애썼습니다. 루이 14세에게 청원을 넣기도 하고, 내용 일부를 손보고 제목을 바꾸어 다시 올리려고 했어요. 고등법원에 소송도 제기했죠.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충격으로 한동안 극장 문을 닫기까지 했어요. 5년이 흘러서야 해금되었는데, 정치 종교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종교인의 위선을 거침없이 폭로한 몰리에르의 기상을 교회와 고위 성직자들 정말 싫어한, 풍운의 작품입니다. 1607년 발표된 작품인데. 1601년 발표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복수를 위해 연극을 이용하고 복수를 완수한 뒤 주인공이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결말, 복수자가 손에 해골을 들고 독백하는 세부 장면까지 비슷해요. <햄릿>의 후속편이라고 불릴 정도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작품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복수 이후의 미래를 보는 관점입니다. 햄릿의 죽음 이후 덴마크 왕국은 혼란을 수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것처럼 보입니다. <복수자의 비극>에선 악의 축이었던 공작 가문이 멸문한 뒤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오가 폭력과 억압으로 공국을 다스릴 조짐을 보입니다. 주인공 빈디체는 피의 시대를 끝내고자 죄를 자백하며 법에 심판을 맡겼지만, 새로운 통치자 안토니오는 빈디체가 쏘아 올린 반란의 화살이 다시 자신에게 향할까 두려워 성급하게 빈디체를 처형해 버립니다.
토머스 미들턴은 이 작품으로 복수극의 전형을 완성했습니다. 불륜, 살인, 욕정으로 혼탁해진 영국 귀족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곳곳에 풍자 섞인 대사와 장면들을 배치해 웃음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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