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쉬지 스토르크는 살면서 한 번도 “노(No)”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며 무언가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쉬지 스토르크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상황에 떠밀려 육계공장에 취직했고, 거기서 앙스 바시리 크러즈를 만나 자연스럽게 결혼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 뜻에 따라 임신했고, 연달아 세 아이를 낳은 뒤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고 있는 주부다. 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도무지 해가 저물 것 같지 않던 어느 여름날, 이 순종적이기만 한 쉬지 스토르크의 뇌리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매일 아침, 나는 누구를 위해 눈뜨는가?”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잠에서 깬 적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 손엔 젖먹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식사를 차리면서 가족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 왔지만 오랫동안 이 분주한 아침 시간 가운데 정작 쉬지, 자신을 위한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쉬지는 이 자각의 순간 이후 삶에 대한 한 줌의 열정까지도 잃어버린다.
<쉬지 스토르크>는 현대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가부장제 아래서 결혼한 여성은 출산, 육아, 가사에 대한 의무를 과중하게 짊어지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편 결혼한 남성 역시 사회 통념에 따라 가부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과도한 책임감을 떠안은 채 많은 걸 포기하며 살아간다. 마갈리 무젤은 남녀 모두의 삶을 불행에 빠트리는 이런 사회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우리를 둘러싼 불합리한 사회적 조건들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평범했던 주부 쉬지 스토르크의 한순간 실수가 불러 온 끔찍한 비극이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 어느 누구에게라도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0자평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 마갈리 무젤의 희곡. 현대 여성이 직면해 있는 결혼, 출산, 육아, 경력 단절 문제를 논쟁적으로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모성은 여성의 본성인가” 하는 질문을 전면에 내세우며 가부장 사회에서 제시해 온 바람직한 여성상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가한다.
지은이
프랑스 신예 여성 극작가 마갈리 무젤(Magali Mougel)은 1982년 독일과 근접한 프랑스 보주 지방에서 태어났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2008년, 연극 학교로 유명한 리옹의 국립 무대예술전공학교(ENSATT) 극작과를 졸업(석사)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공연예술학과에서 여러 해 동안 강의했고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 출판부에서 편집인으로 일하다 2014년부터는 극작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여성, 자연, 정치라는 세 가지 주제로 집약되고 있다. <바르바라 에세 1>과 <워터릴리 에세 2>로 ‘2007극작가들의리용에서의나날들’ 상을 수상했으며 그 외 국립연극 센터의 창작지원금을 비롯한 여러 창작 기금을 수혜작과 수상작을 다수 발표했다. 현재는 여러 극단의 연출가와 예술가들(무용, 미술)과 활발한 협업을 통해 수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쉬지 스토르크>를 비롯해 <Elle pas princesse Lui pas heros>, <Poudre noire>, <Je ne veux plus>, <Coeur d’acier>, <Erwin Motor devotion>, <Penthy sur la Bande>, <The Lulu Projekt> 등이 있다.
옮긴이
임혜경은 숙명여대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후 프랑스 몽펠리에 제3대학에서 로트레아몽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서 30여 년간 재직 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극단 프랑코포니’(2009년 창단) 대표로서 매년 한 편씩 공연 제작을 해 오고 있으며, 번역가, 연극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신인상(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1), 한국문학번역상(한국문학번역원, 2003)을 공역자 카티 라팽과 공동 수상한 바 있으며, 서울연극인대상 번역상(서울연극협회, 2014)을 수상했다.
프랑스어 역서(카티 라팽과 공역)로는 윤흥길의 소설 ≪에미≫, ≪장마≫와 ≪김광규 시선집≫을 비롯해 최인훈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윤대성 희곡 ≪신화 1900≫, 이현화 희곡 ≪불가불가≫, 이윤택 희곡 ≪문제적 인간-연산≫, ≪이윤택희곡집≫ 등이 있다. 이외에도 ≪한국 현대 희곡선≫, ≪한국연극의 어제와 오늘≫, ≪이현화 희곡집≫ 등 한국 문학과 한국 희곡, 한국 연극 연구서를 프랑스에서 출판했다.
우리말 역서로는 불어권의 동시대 희곡인 ≪고아 뮤즈들≫, ≪유리알 눈≫,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동물 없는 연극≫, ≪두 한국의 통일≫, ≪이 아이≫, ≪벨기에 물고기≫, ≪아홉 소녀들≫, ≪단지 세상의 끝≫, ≪쉬지 스토르크≫ 등이 있다. 그 외에 피에르 볼츠의 ≪희극, 프랑스 희극의 역사≫(공역), 카티 라팽의 시집 ≪그건 바람이 아니지≫와 ≪맨살의 시≫(공역)를 번역, 출간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프롤로그
시퀀스 1
시퀀스 2
시퀀스 3
시퀀스 4
시퀀스 5
시퀀스 6
시퀀스 7
시퀀스 8
시퀀스 9
시퀀스 10
시퀀스 11
시퀀스 12
에필로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쉬지 스토르크 : 아침마다 난 일어나.
잠을 충분히 자서도 아니고.
눈이 저절로 떠져서도 아냐.
몸을 펴고 싶어 못 견디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냐.
아침마다 난 일어나.
그리고 모든 게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모든 일을 해.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나는 당신을 깨우지.
애들 하나하나 깨워.
로이크를 제일 먼저 깨우고.
둘째는 두 번째로.
그러고 나면 애기가 울어.
그러면 젖을 갖다 대 줘.
내 팔이 올라가는 동안
커피 머신을 켜
내 팔이 올라가는 동안
토스터를 켜
내 팔이 올라가는 동안
양말 한 켤레, 깨끗한 팬티를 찾아 줘, 지저분한 로이크 건 빼고
그리고 빨래 더미 속에서 당신이 요구한 티셔츠를 찾아 줘.
그리고 난 모두에게 미소를 지어.
그리고 난 당신들이 집을 나서는 걸 쳐다봐.
그리고 난 혼자 남아
-25~26쪽
앙스 바시리 크러즈 : 누가 자기를 위해 일어나.
누가?
난 아이들 유치원 데려다 주려고 일어나고
녀석들이 유치원 가는데 가져가야 할 게 없는지 확인하느라 일어나고
제시간에 출근하려고 일어나고
봄철 맥주 첫 배달 전에 회사에 도착하려고 일어나고
그게 날 위해 일어나는 거야?
-26쪽
쉬지 스토르크 : 조산원이 되려면 출산을 해 봐야 해요? 고무젖꼭지를 팔려면 출산을 해 봐야 해요? 그럼 제가 레즈비언이면요?
앙스 바시리 크러즈 : 당신이 레즈비언이라고?
쉬지 스토르크 : 내가 출산 욕망이 없다고 해서 뭣 때문에 내가 고무젖꼭지를 판매할 수 없을 거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