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요새감옥의 죄수들 이야기
초록눈과 르프랑, 모리스는 요새감옥의 감방에 수감된 죄수들이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수감된 사형수 초록눈은 감옥 내 모든 죄수들의 우상이다. 모리스는 초록눈의 마음을 얻고자 애쓰고, 르프랑은 그런 둘을 비난하면서 내심 초록눈을 동경한다. 한편 죄수들의 세계인 이 요새감옥에서 르프랑은 하찮은 조롱거리다. 좀도둑인데다가 죄수답지 않게 글을 읽고 쓸 줄 알기 때문이다. 요새감옥 세계에서 말하자면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르프랑은 일인자가 되어 보는 상상으로 자족한다. 그러나 르프랑의 소심한 반란은 <하녀들>의 하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실패한다. 죄수들의 감옥 생활로 비유된 ‘소외된 사람들’의 ‘소외된 세계’는 현실 사회의 주류 세계와 그 모습이 놀랍도록 닮았다.
20년 만의 공연과 출판
장 주네의 첫 희곡은 <하녀들>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먼저 <엄중한 감시>를 완성했다. 나중에 전집을 출간하면서 장 주네는 “이 작품을 언제, 왜 썼는지”도 모르겠다며, 작품이 절대 공연되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뒤인 1985년, 주네는 직접 이 작품을 손봐 미셸 뒤물렝 연출에게 맡긴다. 그리고 이후로는 이 개정본이 출판, 공연되기를 바랐다. <하녀들>보다 먼저 썼지만 나중에 개정되어 공연된 연유로 창작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20년 뒤 주네의 수정을 거친 작품은 극의 구조로 보나 그 내용으로 보나 <하녀들>과 상당히 닮았다. 배경과 등장인물만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같은 작품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주네의 무대 미학을 온전히 살린 번역과 해설
배우의 대사는 아무리 일상의 어법을 따른다 해도 자체로 완벽한 음악성을 지녀야 한다. 어법에 맞으면서도 관객들이 최고의 음악성을 느낄 수 있도록 음표를 찍은 대사, 원작이 그러하다면 번역도 그러해야 한다. 장 주네로 학위를 받고 장 주네 작품을 꾸준히 무대에 올려 온 순천향대학교 오세곤 교수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무대화에 어색함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몰입을 높이는 음악적인 대사들을 번역했다. 여기에 직접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한 경험을 녹여 대사 하나, 소품 하나에 담긴 주네의 의도와 그 적용을 주석에서 친절히 설명했다.
200자평
장 주네는 전집에 실린 <엄중한 감시> 앞머리에 초고 정도로 간주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절대로 공연하지 말 것”이라는 단서를 달아 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뒤, 주네는 직접 초고를 손봐 작품이 공연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최종 개정 원고로만 작품이 출간, 공연되길 원했다. 주네의 바람대로 최종 개정판을 우리말로 옮기는 동시에 초고와 달라진 점을 주석에서 밝혔다. 소외된 자들의 소외된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하녀들>과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지은이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는 1910년 12월 19일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22세의 가정부였던 어머니는 생후 7개월 된 주네를 빈민구제국에 넘긴다. 이후 주네는 모르방의 한 농가에서 좋은 위탁 부모 아래 성장한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직업학교를 탈출한 뒤 자잘한 절도와 부랑 등 일탈을 일삼다 16세 때는 결국 감화원에 들어간다. 감화원에서 출소한 뒤로도 절도 등 자잘한 범죄로 수감된다. 그러다 1942년 감방 동료의 도움으로 첫 시집 ≪사형수≫를 출판하는데 이를 계기로 장 콕토를 후원자로 만난다. 콕토의 후원에 힘입어 ≪꽃의 노트르담≫, ≪장미의 기적≫ 등 소설 출판이 성사되었고, 1947년에는 루이 주베 연출로 ≪하녀들≫의 초연, 그리고 1949년에는 ≪엄중한 감시≫와 ≪도둑 일기≫의 출판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계속된 범죄 등으로 종신형과 유배형에 처해졌고 그때마다 콕토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구명 노력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마지막 유배형 위기 때 콕토, 사르트르, 피카소 등의 탄원으로 대통령 사면을 받아 냄으로써 기나긴 범죄 이력을 끝맺는다. 이후 꽤 긴 공백기 끝에 1956년 ≪발코니≫, 1958년 ≪흑인들≫, 1961년 ≪병풍들≫을 차례로 발표한다. 이후 주네는 작품 발표보다는 현실 참여에 적극성을 보인다. 미국의 쿠바 개입이나 베트남 전쟁, 남아공 인종 차별 정책을 비난하고, 68 학생 시위 때는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한다. 1970년 11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아라파트를 만나 아랍에 체류하다 1986년 유작 ≪사랑에 빠진 포로≫ 교정 작업 도중 파리의 작은 호텔에서 생을 마쳤다.
옮긴이
오세곤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해 현대 희곡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논문: 장 주네의 희곡 연구)를 마쳤다. ≪배우의 화술≫, ≪예술강국, 문화대국≫, ≪연기화술클리닉≫ 등의 저서를 집필했고, 연극 분야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발과 ≪연기≫, ≪연극의 이해≫, ≪무대 기술≫, ≪연극≫ 등 여러 종의 고등학교 연극 교과서 집필을 주도했으며,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과 <엄중한 감시>, 시집 ≪사형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왕은 죽어가다>, <살인놀이>, <알마의 즉흥극>, <신부감>, 장 아누이의 <반바지>, 스트린드베리의 <줄리 아씨>, 하벨의 <청중>,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 등 여러 작품을 번역했고, <왕은 죽어가다>, <우리 읍내>, <체홉의 수다>, <술로먼의 재판>, <갈매기>, <보이첵>, <가라가라>, <가라자승>, <타이터스>, <오 행복한 날들>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1996년 가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9년 순천향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2020년 8월까지 연극무용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2020년 9월부터는 같은 대학교 명예교수이다. 2007∼2008년 한국연극교육학회 회장과 2005∼2012년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 한국연극교육학회 산하 분과학회로 한국화술학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무대 장치, 몇 가지 지시 사항
엄중한 감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리스 : 나? 진작 말하지. 방해되면 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나야 벽 뚫고 다니기 명수 아닌가. 어이, 뚜, 소설 쓰지 말고, 솔직히 아줌마가 좋아서 그랬다 그래. 그럼 믿지.
르프랑 : (격하게) 너 때문에 더 나빠지잖아. 네 장난 때문에. 나쁜 놈의 자식.
모리스 : 망설이지 마. 내가 제일 약하잖아. 분풀이해. 일주일째 싸움을 거는데, 시간 낭비야. 나랑 초록눈 사이는 끄떡없다고.
-21∼22쪽
(르프랑은 못에 걸린 상의를 집는다.)
모리스 : 그거 네 거 아냐. 초록눈 거야.
르프랑 : (다시 걸며) 그래, 잘못 봤어.
모리스 : 자주 그랬어. 다섯 번, 아니, 여섯 번째야.
르프랑 : 그럼 좀 어때? 비밀도 없는데. 주머니도 없고. (사이) 야, 네가 초록눈 옷 감시인이냐?
-36쪽
모리스 : 넌 절대 그렇게 안 돼. 척 보면 알아. 그렇게 생기질 않았어. 물론 무죄라는 건 아냐. 강도질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정말 범죄는 다르다 이거지.
르프랑 : 네가 뭘 알아?
-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