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지막 만찬>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지역색이 두드러지면서도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를 통해 보편성을 얻고 있는 희곡이다. 혈육이지만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이 마침내 식사 자리에 마주 앉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바스크 지역 출신인 이그나시오 아메스토이는 주요 장면마다 스페인 현대사의 쟁점들을 배치하고, 바스크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경험을 녹여 스페인, 특히 바스크라는 지역의 개성을 풍부하게 드러낸다. 바스크는 스페인에 속해 있지만 언어와 풍습, 인종이 달라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스페인 정부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특히 프랑코 체제하에서 정부 탄압으로 바스크의 독립을 주장하던 운동가들이 무수히 처형당한 일은 바스크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마지막 만찬>의 두 주인공 이니고와 하비에르도 바스크의 이런 굴곡진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버지 이니고는 온건주의 작가로, 아들 하비에르는 급진주의 무장 단체의 일원으로 삶의 노선을 잡으면서 둘은 완전히 갈라선다. 하비에르는 집을 떠났고, 가족들이 모두 떠나간 빈 집에 이니고만 홀로 남았다. 그리고 무려 12년 만에 하비에르가 집에 돌아온다. 이니고는 현관문을 열어 놓고 아들을 기다린다. 부자가 대화의 물꼬를 트고 극적인 화해를 이룰 순간이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어색하게 식탁에 마주 앉은 부자의 대화는 여전히 평행선을 그린다.
스페인의 현대사를 접했다면 이 작품에서 이니고가 사회노동당(PSOE)을 지지했고 하비에르가 바스크 독립 투쟁 단체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의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는 이런 사실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사회 갈등이 세대 갈등, 가족 갈등으로 이어지는 바스크의 상황은 특정 지역에 사는 일부가 아닌 어느 사회에 속한 누구에게든 재현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니고와 하비에르의 대화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와 무력 투쟁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본주의의 잔인함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 시대를 거울처럼 비춰 준다. 더 나아가, 실존과 불멸, 혁명, 유토피아, 예술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의 글을 여러 번 인용하면서 독자와 관객이 이에 대해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200자평
이그나시오 아메스토이의 희곡에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난다. 독자적인 언어와 풍습을 가진 곳으로 오래전부터 스페인에서 독립해 자치 국가를 수립하려는 저항 운동이 지속되어 온 곳이다. <마지막 만찬>은 이런 바스크 지역을 배경으로 오랫동안 반목했던 부자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다. 긴 시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부자가 겨우 함께 하는 식사가 ‘마지막 만찬’이란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그 이면엔 스페인과 바스크 지역의 화합 또한 요원한 일임이 암시되어 있다. 스페인 최고 연극상인 ‘로페데베가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이그나시오 아메스토이의 대표작이다.
국내 초역이다.
지은이
이그나시오 아메스토이 에기구렌(Ignacio Amestoy Egiguren, 1947∼)은 빌바오에서 태어나 나바라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기자로 활동했다. 프랑코 독재 시기에 바스크 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이곳저곳을 취재하고 글을 썼다는 것은 아메스토이에게 바스크에 대한 애정과 독재에 대한 저항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았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아메스토이는 저널리즘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관심과 열정은 연극에서도 이어졌다. 아메스토이는 바스크의 역사를 연극화해 많은 주목과 사랑을 받았다. 바스크를 소재로 한 아메스토이의 대표작으로는 1981년에 발표한 <에데라(Ederra)>, 1986년에 발표한 <도냐 엘비라, 상상해 봐요 에우스카디를(Doña Elvira, imagínate Euskadi)> 등이 있다. 현재는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다큐와 연극을 접목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보이며 도전하고 있다. 기자와 극작가 외에도 주요 잡지사와 일간지 편집, 방송국 드라마팀 총괄, 축제 기획 등 저널리즘과 연극과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열정적으로 펼쳤고 마드리드 왕립드라마예술학교(Real Escuela Superior de Arte Dramático de Madrid)에서 교수로 30년 이상 재직하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옮긴이
김재선은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La tortuga de Darwin)≫(2009), ≪영원한 평화(La paz perpetua)≫(2011), ≪하멜린(Hamelin)≫(2012), ≪천국으로 가는 길(Himmelweg)≫(2013), ≪맨 끝줄 소년(El chico de la última fila)≫(2014), ≪비평가/눈송이의 유언(El Crítico / Últimas palabras de Copito de Nieve )≫(2016),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Cartas de amor a Stalin)≫(2018), 라파엘 알베르티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낸 전쟁의 밤(Noche de guerra en el Museo del Prado)≫(2017), 알레한드로 카소나의 ≪봄에는 자살 금지(Prohibido suicidarse en primavera)≫(2019), ≪바다 위 일곱 번의 절규(Siete gritos en el mar)≫(2020)를 번역했다.
차례
<마지막 만찬>의 한국 출간을 축하하며
나오는 사람들
초연 정보
1. 열린 문
2. 선고
3. 제물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하비에르 : 아버지는 형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어요. 형만큼 나도 많이 미워하시죠?
이니고 : 어제, 네가 올 거라고 나한테 말했을 때까지…, 너는 페드로처럼 죽어 있었어.
하비에르 : 하지만 모르고 계셨잖아요…
이니고 : 12년 전부터… 10년이 아니라 네가 이 집을 떠난 12년 전부터… 12년 전부터 나한테 너는 죽어 있었어.
하비에르 : 12년…
이니고 : 너는, 사실, 그전에 죽었지… 훨씬 전에…
하비에르 : …
-22쪽
이니고 : 너는 돌아온 탕자야… 오레스테스나 오이디푸스처럼 너는 외국에서 왔잖니…
하비에르 : 나는 계속 죽어 있는 건가요? 아버지가 나를 다시 살리지 않잖아요!
이니고 : 너는 외국에서 왔으니까… 그래서 네가 없는 동안 네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넌 몰라…
하비에르 : 안녕히 계세요! 이런 제기랄!
이니고 : 오레스테스처럼! 오이디푸스처럼!
하비에르 : 요즘 내 나라에서 벌어지지 않은 일을 난 알아요!
이니고 : 네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비에르 : 맙소사! 내 나라잖아요!
이니고 : 내 나라이기도 해! 아닌가? 우리나라지… 난 이미 진저리가 나고 있어… 이미 진저리가 났다고!
-23쪽
이니고 : 그게 현실이야, 난 너를 무서워했어.
하비에르 : 지금도 그러세요?
이니고 : 네가 가진 총을 봤을 때…
하비에르 : 내가 아버지를 죽이러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니고 : 아니…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을 거 같다.
하비에르 : 난 아버지 아들이에요.
이니고 : 너를 알아보기가 힘들구나… 네 엄마가 죽기 전부터… 나한테 넌 낯선 사람 같았어… 넌 천생 문인이었고 난 우리가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네가 문과대학을 그만두고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을 때, 네 형 영향으로 말이야, 난 이미 너를 잃었지…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도 너를 이해한 적이 없어… 나중에, 네가 조직원이…
하비에르 : 나 여기 있어요, 아이타(아버지).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