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국 페미니스트 극작가로 잘 알려진 카릴 처칠은 2002년, 인간 복제를 주제로 한 <넘버>를 무대에 올려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영국 정부가 치료 목적의 인간 배아 복제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면서 이를 두고 찬반 논쟁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넘버>는 인간 복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한 카릴 처칠의 반응이자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넘버>는 우선 ‘인간 복제’가 야기할 문제로 인간의 고유성 상실을 짚는다. 아버지 솔터는 작품에서 총 세 명의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한 명은 솔터의 친아들이고, 나머지 둘은 아들의 세포 복제로 태어난 클론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나타나지 않지만 솔터는 친아들을 버려둔 채 복제를 통해 새로운 아들을 얻었고, 병원에서 솔터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스물한 명의 복제 인간을 만들었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는 바람에 극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들 버나드1이 복제 아들 버나드2로, 다시 버나드2가 또 다른 복제 아들 마이클 블랙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존엄을 지닌 인간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처칠은 복제 인간을 그저 여럿 중 하나, ‘넘버’로 부르며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카릴 처칠은 또 ‘인간 복제’를 통한 생식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넘버>는 복제 인간의 출생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클론은 발달된 과학 기술을 통해 모태가 아닌 인공 자궁에서 태어났을지 모른다. <넘버>에서 여성은 임신, 출산, 양육 과정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솔터의 회상 속에 잠깐 등장한다. 그의 아내이자 버나드의 어머니인 한 여성이 결혼 후 불행해 하다 기차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것으로 암시되는 것이다. 작품 속 유일한 여성이 무대에 나타나기도 전에 이렇게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홀로 남은 솔터가 친아들을 버려둔 채 복제 아들을 만들어 새로운 가족을 이루면서 이들 세계에선 모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카릴 처칠은 이런 설정을 통해 모성이 사라진 세계가 얼마나, 어떻게 황폐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며 역설적으로 여성의 존재감과 가치를 드러낸다. 작가의 페미니스트적 관점과 극작 전략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미래에는 어쩌면 <넘버>에서처럼 클론 인간을 구성원으로 한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할지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 구성에서 모성의 역할은 미미하다. <넘버>는 클론 인간이 유일성과 고유성을 잃어버린 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수많은 개체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인간 존엄에 대한 심각한 위협 자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넘버>가 그리는 미래는 꿈꾸던 이상사회는 분명 아니다. 카릴 처칠은 <넘버>에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놓치고 있던 미래 사회의 반전적인 모습을 현실감 있게 보여 주며 독자에게 묘한 공포감을 선사한다.
200자평
인간 복제라는 주제를 논쟁적으로 다뤄 화제를 모은 문제작이다. 인간 복제 기술이 인간 존엄을 해칠 수 있으며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지적은 전부터 있어 왔다. 영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극작가 처칠은 여기에 페미니즘 주제를 더했다. 유전자 복제는 임신과 출산, 양육이라는 생식의 전 과정이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짐을 뜻한다. 인간 복제가 가능해진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성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 부모 자식의 관계는 현재와 어떻게 달라질까? 과학 기술이 상상하지 못한 미래 사회의 이런 반전적인 모습이 <넘버>에서 현실감 있게 재현된다.
국내 초역이다.
지은이
카릴 처칠(Caryl Churchill, 1938∼)은 현재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극작가 중 한 명이다. 1972년 <소유자들(The Owners)>이란 작품으로 런던 로열코트 극장에서 극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70년과 1980년대에는 페미니스트 극의 대모로 명성을 쌓았고 이후 전쟁, 혁명, 환경, 여성 노동, 신자유주의, 팔레스타인 문제 등 당면한 국제적 이슈와 역사적 사건들로 관심을 넓히며 거침없는 창작력을 보이고 있다. <넘버>에서는 인간 복제라는 가장 첨예한 문제를 다루기에 이른다. 심도 있는 지적 탐구를 바탕으로 복장 전환, 언어 실험, 1인 다역, 교차 배역, 그리고 역사 다시 쓰기라는 극작 기법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스타일과 결합되어 처칠만의 독창적인 연극 미학을 구축한다. <클라우드 나인>(1979∼1981), <최고의 여성들>(1982), <엄청난 돈>(1987∼1988), <넘버>(2004)로 오비상을 총 네 차례 수상했다.
옮긴이
이지훈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올버니캠퍼스에서 연극학 석사, 동아대학교에서 <King Lear와 Lear의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희곡집 ≪기우제≫(평민사, 2006), ≪셰익스피어와 사랑에 빠지다≫(북스힐, 2001, 편저), 역서로는 ≪카릴 처칠 희곡집 : 비네가 탐/클라우드 나인≫(평민사, 1997), ≪꾀뜨미네의 사흘≫(일월서각, 1985), ≪벨 자≫(고려원, 1983), ≪운전 배우기≫(지만지, 2012), ≪빨래≫(지만지, 2016), ≪이 집에 사는 내 언니≫(지만지, 2017) 그리고 ≪포럼으로 가는 길에 생긴 재밌는 일≫(지만지, 2018)이 있다. 논문에는 <King Lear의 모성 부재>, <‘베니스의 상인’의 시간과 공간>, <꿈과 생시 : 최인훈의 ‘둥둥낙랑둥’> 등이 있다. 미국 UCLA대학, 브라운대학,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창원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다.
<기우제>로 1994년 여성신문사에서 수여하는 희곡 부문 여성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영미 여성주의 극의 번역과 무대화에 주력해 왔다. 카릴 처칠의 <비네가 탐>, 팸 젬스의 <두자, 피시, 스타스 그리고 비>,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의 <진흙>, 자작극 <그 많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나?>, 웬디 케슬먼의 <빠뺑 자매는 왜?>를 연출했고 그 외 부조리극으로 해럴드 핀터의 <방>, 베케트의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아라발의 <장엄한 예식>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2012년 극단 TNT레퍼토리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폴라 보글의 <운전 배우기>를 국내 초연으로 연출한 바 있으며, 2015년 한국여성연극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올빛상(극작)을 수상했다.
자작극 <나의 강변북로>를 연출하고 출판했으며(평민사, 2020), 2020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대본 공모에 <여로의 끝>이란 작품이 선정되어 출판되었다(독서학교, 2020).
극단 TNT레퍼토리(1982년 창단) 대표이며 2017년부터 드라마 연구소 ‘D Forum’을 열고 연극인과 일반인을 위한 “희곡 읽기 세미나” 강좌와 창작에 주력하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넘버
부록 : 옮긴이 노트와 시놉시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솔터 : 나만큼 후회하는 사람은 없어 예견할 수 없었던 걸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게 날 더 화나게 해 하지만 그때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또 선물이었어. 완전히 다른 아이를 가질 수도 있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아이를 원했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난 널 다시 원했어 그건 네가 최고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B1 : 그래도 그건 내가 아니야.
솔터 : 그래, 하지만 똑같은 기본 똑같은 자료 그건 완벽했어. 넌 최고로 예쁜 베이비라고 모두가 말했어. 좀 커서도 넌 여전히 아주 예뻤고, 정말 아주 예뻤어
-31쪽
B2 : 날 전혀 안 닮았어
솔터 : 안 닮았어
B2 : 조금은 닮았어 닮았어 하지만 똑같진 않아
솔터 : 똑같진 않아 아니야
B2 : 내가 놀란 건 얼마나 다르냐였기 때문에
솔터 : 나도 놀랐어
B2 :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솔터 : 그럼 그럼 전혀 아냐 첫눈에 아니란 걸 바로 알았어
B2 : 나보다 나이가 들긴 했어 나도 만일 나이가 든다면
솔터 : 그래도 넌 다를 거야
B2 : 난 똑같진 않을 거야
솔터 : 그럼 그럼 전혀 아냐, 넌 달라
-37쪽
마이클 : 우린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99퍼센트 동일한 유전자를 가졌어요. 우린 침팬지와 90퍼센트 동일한 유전자를 가졌고요. 우린 상추와 30퍼센트 동일한 유전자를 가졌어요. 이 사실이 당신에게 위안이 될까요? 전 상추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내가 어디에 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솔터 : 걔가 너무 그리워. 걔들 둘 다 모두 그리워.
마이클 : 아직 열아홉 명의 우리가 남아 있어요.
솔터 : 그건 똑같은 게 아니야.
마이클 : 물론 아니죠, 농담이었어요.
솔터 : 너 행복하다고 했지? 자기 인생도 좋아하고?
마이클 : 네 그럼요, 미안하지만.
-68∼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