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시베리아 지역 소수민족 출신 작가의 작품
예벤크족 출신인 갈리나 켑투케는 러시아 소수민족 출신 작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다. 본명은 갈리나 이바노브나 바를라모바. 필명인 켑투케는 젤툴라 강변에 살았던 예벤크 씨족의 명칭으로 ‘짐승의 추적’을 의미하는 예벤크어다. 소설가인 동시에 예벤크어와 민속을 연구한 언어학자이자, 민속학자였기에 그녀의 작품에는 예벤크족 유목민의 전통 관념, 생활 관습, 의례, 설화 그리고 순록 유목민으로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애환이 간결한 필치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은 아무르주 제야강 유역에서 순록을 유목하는 예벤크인 가족의 셋째 딸의 눈으로 바라보는 유목민의 일상을 나타낸다.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직전과 혁명 이후 유목민 집단화 시기다. 소설 전반에는 예벤크족의 신화와 민담,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일상과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켑투케는 현실세계와 정신세계, 현실과 가상을 별개로 분리시키지도, 대립시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속에 어떠한 이질감이나 모순도 없이 공존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현실 세계이고, 어디부터가 마법의 세계인지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마치 현실의 인물들이 민담의 세계 속 주민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체릭테 할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작가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예벤크어와 민담을 연구하는 박사가 등장한다. 그는 쉬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다가 체릭테 노인을 만난다. 그리고 노인에게서 예벤크족의 민담과 전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채록하게 된다.
<순록 없는 순록 올가미>는 봄나크와 기숙학교라는 공통의 소재로 엮인 단편 모음이다. 봄나크의 기숙학교 시절 이야기와 그곳을 이미 졸업하고 성인이 된 이후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제목 아래 결합되어 있다. 변해 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임과 음주, 실업 등 많은 사회 문제에 직면한 예벤크인들의 불안한 현재 삶의 모습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모든 작품의 밑바탕에는 유목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 삶이 변화하며 겪게 된 예벤크족의 현실 모습이 깔려 있다. 그러한 현재적 삶의 결핍에 대한 부정적 묘사와 동시에 나타나는 예벤크족의 신화와 민담, 전설에 대한 소개는 작가가 제시하는 미래의 비전일 것이다. 현재에 와서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자신들의 정체성 회복과 정립이 그들의 미래와 바로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자평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시베리아 지역 소수민족 출신 작가의 작품집. 예벤크족 출신 작가 갈리나 켑투케는 러시아 소수민족 출신 작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작품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직전과 혁명 이후 유목민 집단화 시기에서 거의 1980년대까지, 순록 유목민들이 겪는 여러 가지 애환을 간결한 필치로 선명하게 그린다. 변해 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사회 문제에 직면한 예벤크인들의 불안한 현재 삶의 모습과 더불어 예벤크족 유목민의 전통 관념, 생활 관습, 의례, 설화 그리고 예벤크족의 신화와 민담,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일상과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있다.
지은이
갈리나 켑투케(본명 갈리나 이바노브나 바를라모바, 1951∼2019)는 예벤크어와 예벤크 문학 분야의 대학자이자, 예벤크족 민속의 의례 장르를 연구한 최초의 민속학자다. 수많은 마을을 방문하여 예벤크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켑투케는 의례와 관련된 민담, 영웅담, 신화, 전승 등 서사적 장르에 해당되는 예벤크족 설화를 수집했다. 그중 일부는 예벤크족 민담 장르, 전통적 세계관, 예벤크족 여성의 공연 전통 등에 관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또 절멸 언어로 분류되는 예벤크어 보존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 예벤크어 교재를 편찬했으며, 예벤크족의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신진학자들도 양성했다.
갈리나 켑투케는 1989년에 최초의 작품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을 발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서 1990년에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체릭테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1991년에 모스크바에서 작품 모음집 ≪작은 아메리카≫가 출판되었다. 몇몇 개별 작품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일본어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극북, 시베리아, 극동 소수민족 대의원 총회는 작품집 ≪작은 아메리카≫를 쓴 켑투케에게 문학 분야의 ‘새벽 여명의 별’ 상을 시상했다.
옮긴이
김민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노어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러시아 치타국립대에서 철학인간학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러시아인과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신앙과 의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투르게네프 단편집≫, ≪레스코프 중단편집≫, 니키타 톨스토이의 ≪언어와 민족문화≫, 블라디미르 보고라스의 ≪축치족: 신앙≫, 바츨라프 세로셉스키의 ≪야쿠트인: 구비전승과 신앙≫ 등 전통문화와 신앙 관련 번역서를 출판했다.
어건주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대학원 노어노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에는 ≪러시아인을 위한 한국어 문법(Пособие по грамматике корейского языка)≫(2007), 역서로는 ≪러시아어 어원론≫(2007), ≪민담 형태론≫(2009)이 있고, <문화, 언어 그리고 텍스트 분석>, <로트만 기호학>, <이중주격문에서 주어의 문제> 등 다수의 논문을 썼다.
차례
작가의 말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
체릭테 할아버지의 이야기
순록 없는 순록 올가미
봄나지야
곱슬곱슬한 오솔길
나쁜 피
롬치하
올붓칸
순록 없는 순록 올가미
작은 아메리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빠는 이번에는 하루가 아니라 타이가 더 멀리 며칠의 일정을 가신다. 엄마는 아빠가 빠트리고 가는 게 없는가 살펴본다. 그 후 아빠는 순록에 올라타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사냥을 나가는 사냥꾼은 배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사냥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가는 길에 대해 말하거나 어느 곳에서 사냥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사냥을 떠나는 것을 그저 일상의 일로 여겨야 한다. 불필요한 대화나 쓸데없는 소란은 행운을 막을 수 있다.
-11~12쪽
“그래, 무슨 일인데?”
“이제는 채금장에 갈 때 순록들의 뿔에 붉은색 천을 매야 돼.”
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뭐 하러 그렇게 하는데?”
“그건 이제 붉은 정권이 들어서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정권이 옷 색깔로 정해진다는 거야?”
“어,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다만 이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붉은 사람들이라고 불린다는 것만 알아. 크고 붉은 사람들. 아마 이제는 높은 사람들이 붉은색 옷을 입을 거 같아. 그런데 크고 붉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는다는데, 작고 붉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
-70쪽
하늘에 사는 아이이히트 여신이 영혼의 새 오미를 땅으로 내려보내 주면 사람이 태어난다. 그 영혼의 새 오미가 아기의 영혼이 된다. 저기 하늘의 아이이히트 여신이 있는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자라는데, 그 나무에 수많은 둥지가 있다. 그 둥지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영혼인 오미 새들이 살고 있다. 아기가 자라게 되면, 아기의 영혼 오미는 어른의 영혼인 헤얀이 된다. 영혼 헤얀은 항상 사람과 함께 있는데,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해가 비칠 때 그 영혼의 반영을 볼 수 있다. 아이이히트 여신이 바로 해다. 여신이 땅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람은 그림자 모양의 자신의 영혼 헤얀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 헤얀이 몸을 떠나 영혼 묵디가 되어 저승으로 간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경우, 영혼 헤얀이 영혼 묵디가 되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지도 못한다. 영혼 헤얀은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영혼은 유령이 되어 이 땅에서 헤매게 된다. 그런 유령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251~252쪽
나는 어떤 사람이 샤먼이 되어야 한다면 그에게 미래의 보조령인 새들이 다녀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새는 거위, 오리, 백조, 백학, 뻐꾸기 등 다양하다. 그 새들은 샤먼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도와주게 된다. 동물들 가운데 물고기도 보조령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거부를 해도, 보조령들은 계속해서 그가 샤먼이 되게 만든다. 무병이라고 하는 병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넋이 나가 타이가를 헤매고 다니게 된다. 우리 아빠는 어떻게 될까? 샤먼이 될까 아닐까? 샤먼이 되는 것은 이제는 좋지 않다. 그렇지만 샤먼이 되지 않는 것은 더 나쁘다. 화가 난 보조령들이 넋을 돌려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