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잠언(箴言’이란 가르치는 말, 훈계하는 말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이 독특한 문학 형태는 17세기 유럽의 살롱 문화와 함께 유행했다. 라 로슈푸코의 ≪잠언집≫은 당시 유행한 잠언집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잠언집은 독특한 방식으로 집필되었는데, 저자가 특정 테마에 대해 살롱에서 발표한 후 살롱 참가자들과의 서신 교류를 통해 이를 다듬고 정리해 출간하는 방식이다. 라 로슈푸코는 당대 가장 인기 높았던 사블레 부인의 살롱을 통해 이 잠언집을 완성했다.
라 로슈푸코의 잠언들은 다분히 염세적이다. 그는 “이기심 혹은 자기애가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인(動人)”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아무리 덕을 쌓고 선행을 해도 그 이면에는 자기애가 작용하기에 결코 이타적일 수 없고 이기적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 로슈푸코는 1664년에 출판된 잠언집 초판의 도입부를 ‘자기애’를 다룬 4개의 잠언으로 시작했고, 1678편에 출판된 5판에서도 두 번째부터 네 번째 잠언까지 3개의 잠언이 같은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기애에 대한 강조는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자기애’ 말고도 세상사를 지배하는 원리가 있다고 제시하는데, 바로 사람마다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기질과 그를 지배하는 운명이다. 이성으로 지배할 수 없는 인간의 기질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후천적인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 운명 역시 인간의 의지대로 바꾸거나 회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것에 끌려가는 사람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그만큼 적다. 그런 맥락에서 내적 기질과 외적 운명에 종속되는 인간의 위상은 제한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라 로슈푸코의 잠언은 당시 유럽 사교계를 뒤흔들었는데, 심지어 저자의 초판이 나오기도 전에 네덜란드에서 해적판이 먼저 발간될 정도였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나선 스위프트는 ≪잠언집≫의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인간관에 대해 잘못은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있지, 라 로슈푸코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옹호했으며,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는 ≪잠언집≫이야말로 프랑스인의 국민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라고 평가했다. 라퐁텐은 1668년에 간행한 ≪우화집≫ 1권 11장을 라 로슈푸코에게 헌정하며 그의 ≪잠언집≫을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과오를 보여 주는 거울이자 물길에 비유했다. 스웨덴 왕국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잠언집≫을 읽고 소감과 견해를 메모했으며, 이 메모는 ≪잠언집≫의 부록으로 전하기도 했다. 인간의 본성과 기질을 요약한 이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비트겐슈타인, 키르케고르, 니체 등 대문호들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자크 트뤼셰 교수가 1977년, 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간행한 라 로슈푸코의 ≪잠언집(Maximes et réflexions diverses)≫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원전에서 ‘성찰(Réflexions diverses)’은 제외하고 옮겼다.
저자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간행한 1678년판에 들어간 504개의 잠언을 옮긴 1부, 1664년에 간행된 초판과 1666년, 1675년 판본에 수록되었으나 이후 개정판에서 삭제된 잠언을 모은 2부, 저자 사후에 간행된 잠언을 엮은 3부, 그리고 1, 2, 3부의 잠언을 옮긴이가 주제별로 정리한 4부로 구성했으며, 번역문과 원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주석과 해설을 더했다.
200자평
17세기 유럽 사교계를 뒤흔든 라 로슈푸코의 잠언을 모았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자기애이며,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운명과 기질이라고 단언한다. 날카로운 지성과 빛나는 센스로 인간과 사회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문구는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제1부에는 저자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간행한 1678년판의 잠언 504개를 수록했으며, 제2부에는 이전 판본에 수록되었다가 개정판에서 삭제된 잠언 74개, 제3부는 저자 사후에 간행된 잠언 61개를 수록했다. 옮긴이 이경의 교수는 그간의 오역을 모두 바로잡았으며, 독자들이 필요에 따라 찾아볼 수 있도록 1∼3부의 잠언을 주제별로 정리한 제4부를 추가했다.
지은이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는 1613년 9월 15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628년 사촌인 앙드레 드 비본과 결혼한 후 1629년 오베르뉴 지방 주둔 부대 연대장에 임명되어 이탈리아 전투에 참가했으며 1635∼1636년에는 스페인 군대와 격돌한 플랑드르 전투에도 참가했다.
1637년 슈브뢰즈 부인과 공모해 당시 홀대받고 있던 루이 13세의 왕비를 궁정에서 납치하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바스티유에 8일간 구금된 후 석방된다. 1643년 루이 13세가 서거하고 도트리슈 왕비가 루이 14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시작하면서 슈브뢰즈 부인과 라 로슈푸코는 마땅한 보상과 예우를 기대했으나 마자랭이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하면서 이 기대는 무산되었다.
라 로슈푸코는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콩데가의 3형제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1646년 첫째인 롱그빌 공작 부인과 내연의 관계가 시작된다. 1648년 고등 법원이 프롱드의 난을 주도하자 라 로슈푸코는 콩데와 함께 왕실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마자랭 타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1650년 콩데와 콩티 형제가 구금되자 라 로슈푸코는 반란을 주도한다. 그의 활약 덕분에 1651년 콩데와 콩티 형제가 석방되어 저항 세력을 통솔해 파리 진입을 시도하지만,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한 대공들의 프롱드는 결국 실패하고, 중상을 입은 라 로슈푸코는 베르퇴유 성관으로 낙향한다.
긴장을 유지했던 왕실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되자 라 로슈푸코는 지방의 영지를 떠나 파리에서 체류하고 사교계도 출입하기 시작한다. 1656년 파리에 있는 리앙쿠르 공작의 저택으로 이주한 후 1658년부터는 사블레 부인과 교류하며 잠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662년 라파예트 부인과의 교류를 시작했으며, 1663년 ≪잠언집≫ 해적판이 작가의 허락 없이 네덜란드에서 간행되자 1664년 ≪잠언집≫ 초판을 간행한다. 이후 1666, 1671, 1675, 1678년에 걸쳐 2~5판이 간행되었다.
역사가 600년이 넘는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젊은 시절을 전쟁터와 정치적 음모의 소용돌이에서 보냈던 라 로슈푸코는 인생 후반에 세상을 관조하는 모럴리스트로 변신해 사색과 성찰, 사교와 집필에 몰두하다 1680년 3월, 67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사망하는데, 당대를 대표하는 성직자이자 문인이었던 보쉬에가 그의 임종 현장에서 종부 성사를 집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옮긴이
이경의는 1962년 인천 부평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중·고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서강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며 연극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파리 4대학에서 프랑스 고전극 연구를 시작해 몰리에르 연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과정과 박사 준비 과정을 이수한 데 이어, 1994년 <17세기 프랑스 희극에 등장하는 바르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부터 경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프랑스 문학사를 비롯해 프랑스 동화와 영화, 파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강의를 맡고 있다.
차례
제1부 1678년에 간행된 잠언
제2부 저자가 삭제한 잠언
초판(1664)에 포함되었으나 이후 삭제된 잠언
두 번째 판본(1666)에 포함되었으나 이후 삭제된 잠언
네 번째 판본(1675)에 포함되었으나 이후 삭제된 잠언
제3부 저자 사후(死後)에 간행된 잠언
리앙쿠르 필사본에 들어간 잠언
서신을 통해 확인된 잠언
1664년에 간행된 네덜란드 판본에 들어간 잠언
1693년에 간행된 ≪잠언집≫에 추가로 들어간 잠언
작가의 동시대인들이 확인해 준 잠언
제4부 옮긴이가 재구성한 주제별 잠언
1. 인간의 자기애와 자존심
2. 인간의 운명과 행운
3. 인간의 기질과 취향
4. 인간의 열정과 광기
5. 인간의 정신과 육체
6. 인간의 미덕과 악덕
7. 인간의 장점과 단점
8.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심리와 행동
9. 특정한 인간의 성향
10. 사랑과 우정에 대해
11. 죽음에 대해
12. 화술과 대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견해보다 취향이 비난받을 때 더 자존심이 상하는 법이다.
사소한 데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큰일을 못한다.
행복은 취향에서 나오지 다른 데 있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취해야 기쁘지 남이 좋아하는 걸 가졌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지성은 감정에 항상 속는다.
세상에서 아무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지만,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착각이다.
야심이나 사랑이 모든 열정 가운데 가장 격렬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나태는 아주 무기력해서 대단치 않게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계획과 행동을 침해해서 당사자도 모르게 그가 가진 열정과 미덕을 파괴하고 좀먹는다.
최고의 우정은 자신의 결점을 친구에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친구로 하여금 그의 결점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밖에서도 찾을 수 없다.
농담은 그것을 하는 사람이 즐기는 거지 조롱의 대상이 된 사람이 좋아할 수는 없다. 농담은 허영심이 만들어 낸 재치를 뽐내는 경연(競演)이기에, 그것을 계속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농담으로 자신의 결점을 지적받은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모욕적 패배로 받아들이게 된다. 농담은 우정을 끊고 증오를 부추기는 독(毒)이 될 수 있지만, 재치를 발휘해 상대방이 듣기 좋게 칭찬에 가까운 농담을 하면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도 있고, 기존의 우정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나 약자에게는 되도록 농담을 절제해야 한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의 환심도 사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불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