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백로(白·露) 시대”의 주역, 미키 로후
일본의 상징주의는 1905년, 우에다 빈이 유럽의 상징시들을 소개한 번역 시집 ≪해조음≫으로 시작된다. 이후 일본 시단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상징시인과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간바라 아리아케의 ≪아리아케집(有明集)≫은 일본 최초의 상징시집이자 메이지 상징시의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아리아케의 뒤를 이어 일본 근대 시단에 상징주의를 확립한 것이 바로 하쿠슈(北原白秋)와 미키 로후(三木露風)다. 일명 ‘백로(白·露)’ 시대의 시작이다. 아리아케로부터 로후는 이지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하쿠슈는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경향을 이어받아 자신들만의 시 세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나가이 가후는 로후가 1909년 도쿄 문단에 진출해 처음 출간한 ≪폐원(廢園)≫에 대해 ‘귀형(貴兄)의 시는 누구보다도 많이 베를렌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찬이 아님을 믿는다’며 극찬했다. ≪와세다 문학(早稲田文学)≫은 로후가 1910년 발표한 ≪적막한 새벽(寂しき曙)≫에 대해 ‘사라져 가는 옛날을 아파하는 목소리, 가을과 겨울의 그리움, 비수(悲愁)에 잠든 자연 등의 제재’를 노래한다고 소개하며 지금의 메이지 시단이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이 시집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있다. 1913년에 발표한 ≪흰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獵人)≫은 사랑을 노래하는 퇴폐와 환락을 섬세한 상징시의 방법으로 감각하고 있어 그의 상징시집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다.
로후의 시 세계
미키 로후(三木露風)의 문학 활동 시기는 크게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기는 로후가 상경하기 이전 고향 효고현(兵庫県)과 오카야마현(岡山県)에서 활동하던 시기로 단카(短歌)나 하이쿠(俳句)와 같은 전통 시가를 짓거나 서정적인 시를 썼던 때다. 중기는 그가 도쿄로 상경한 뒤부터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의 중심적 역할을 하던 시기로 그의 문학적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서구 문학의 영향,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에 매혹되어 스스로 상징주의 시인임을 천명했고 이 시기 발표된 작품들은 대부분 상징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후기는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머물던 때부터 이후 수도원에서 나와 도쿄 미타카(三鷹)에 터를 잡고 살던 시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 로후는 문단의 중심에서는 벗어났지만 종교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꾸준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로후의 작품 세계는 크게 상징주의 문학, 종교 문학, 아동 문학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는 근대 일본 상징시의 선구자로 활약하면서도 종교시와 가톨릭에 관련한 수필집과 연구서를 발표하며 신앙의 전파에 힘썼고, 어린이를 위한 동요 창작 운동을 주도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아름다운 동요를 다수 남기고 있다. 본 시선집에서는 미키 로후의 상징시를 중심으로 종교시와 동요곡 일부를 선정함으로써 로후 시 세계의 넓은 스펙트럼을 공유하고자 했다.
200자평
일본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시인 미키 로후의 시들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와 함께 일명 “백로(白·露) 시대”를 이끌었던 미키 로후는 낭만주의에서 시작해 점차 상징주의로 옮겨 가 일본 근대 문단에 상징주의를 확립했으며, 종교 문학, 아동 문학까지도 두루 섭렵했다.
이 책에는 그의 여러 시풍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총 8개 시집에서 66수를 고루 뽑아 소개한다.
지은이
미키 로후(三木露風, 1889∼1964)는 시인이자 비평가·동요 작가·작사가·수필가로 활약했다. 문학을 비롯해 미술사와 미학 등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어 다양한 이론서를 남겼으며 강의를 통해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는 효고현(兵庫県) 다쓰노정(龍野町)에서 은행원인 아버지 세쓰지로와 어머니 미도리카와 가타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로후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부모가 이혼을 하게 되는데, 어머니는 당시 한 살이던 로후의 동생만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고 로후는 조부모의 집에 맡겨진다.
청소년기에는 수석으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문학에만 관심을 쏟은 탓에 졸업이 어려워 오카야마현에 있는 시즈타니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1905년 진학을 위해 도쿄에 가서도 문학에만 심취해 중학교 편입 시험에 떨어지기도 한다.
1907년부터 소마 교후(相馬御風), 노구치 우조(野口雨情) 등과 함께 <와세다 시사(早稲田詩社)>를 결성하고 그해 9월 와세다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단카(短歌)와 절연하고 시에만 전념했는데 매월 서너 군데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이듬해 그동안의 불안정한 생활로 병을 얻게 되어 와세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결국 귀향해 요양 생활을 한다.
스물한 살에는 ≪폐원(廢園)≫(1909)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1년 만에 다시 ≪적막한 새벽(寂しき曙)≫(1910)을 상재하며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입지를 다진다. 그렇지만 1911년 부모를 대신하던 조부가 사망하자 깊은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흰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獵人)≫(1913)을 발표하며 비로소 완성도 높은 상징시의 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사이조 야소(西條八十), 야나기사와 다케시(柳澤健) 등과 함께 <미래사(未來社)>라는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한다. 이렇듯 공백이 없는 활발한 전성기와 높은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고독과 공허함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고 이로 인해 이 시기 종교에 서서히 빠져들며 신앙과 시작(詩作)을 병행한다.
≪환상의 전원(幻の田園)≫(1915)을 출간한 이후에는 홋카이도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Trappist Monastery)에 머물며 그 체험 중에 쓴 시를 바탕으로 종교시집인 ≪양심(良心)≫(1915)을 발표한다. 이후 두 차례 더 수도원에 체재한 뒤 1920년 5월에는 문학 개론 및 미학론의 강사직을 제안받아 정주(定住)하기에 이른다. 이후 약 5년간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로후는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창작을 이어 간다. 그러나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급격히 변모하는 시단의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워 서서히 문단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1924년 수도원에서 나온 로후는 지금의 도쿄 미타카(三鷹)에 터전을 잡고 문학 활동과 후학의 양성에 힘쓴다. 이 무렵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종교와 관련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고 강연을 하며 포교 활동에 힘썼는데, 이에 1927년 일본 최초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훈4등급(勳四等) 훈장인 성 세퓔크레 기사장(Chevalier Saint Sépulcre)과 홀리나이트(Holy Knight)의 칭호를 받는 영예를 얻는다.
1964년 12월 21일 로후는 미타카 자택 근처의 우체국 앞에서 택시에 치이는 사고로 치료를 받던 중 12월 29일 76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다. 12월 31일 장례식 이후 다마(多摩) 화장터에서 화장했고, 다음 해 1월 18일 가톨릭 기치조지(吉祥寺)교회에서 고별식을 거행했다. 그의 묘는 미타카시 다이세이사(大盛寺) 별원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옮긴이
노윤지는 고려대학교 중일어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고려대학교 중일어문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전공 분야는 일본 근현대 문학이다. 2003년 문부과학성 초청 국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어·일본 문화 연수 유학생으로 도쿄가쿠게이대학교(東京学芸大学)에서 수학했다.
2014년 일본 종합 문예지 ≪구자쿠센(孔雀船)≫에 한국 시 5편과 수필 3편을 번역했고, 2015년 12월 대산문화재단의 외국 문학 번역 지원 사업으로 근대 작가인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시골 선생(田舍教師)≫을 번역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연구−만선의 행락(満鮮の行樂)을 중심으로−>,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국가주의 이상 연구−<일병졸(一兵卒)>과 ≪시골 선생(田舍教師)≫을 중심으로−>, <미키 로후(三木露風) 시 연구−상징주의 시를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 후기 국경 기행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여름 여신(夏姬)≫
어린 배 열매
봄밤
벚꽃 핀 달밤
이름만큼은…
죄악이라고…
≪폐원(廢園)≫
서시
망각의 노래
슬픈 입맞춤
달밤의 비애
숲에 와서
가스 불빛
황혼의 단조
떠나가는 5월의 시
길 잃은 물새
‘사랑’과 ‘고독’
어둠으로
창백한 마음의 탄식
어두운 문
추이
키스 후에
황혼빛
비 갠 때
≪적막한 새벽(寂しき曙)≫
신과 물고기
늪가
헤어지는 그대 눈
잠들기 전의 시
흔들리는 작은 배
실망
욕망
산 것
그늘의 정거장
쾌락과 태양
나의 우수
≪흰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獵人)≫
흰 손의 사냥꾼
스러지는 목소리
뻗어 가는 꿈
잿빛 여자
불꽃과 바람
현신
멀구슬나무
발자국 소리
죽어 가는 사랑
오래된 달
길가
달과 거미
담쟁이덩굴
≪환상의 전원(幻の田園)≫
비의 마음
호수 인상
어롱
길 위에서
돛대에 매어 놓은 줄
≪양심(良心)≫
가을이 온다
아침에 부는 바람
개에게
울리지 않는 종
외양간
≪갈대 사이의 환영(蘆間の幻影)≫
자화상
환각의 푸른 요단강 물
초록 숲
산양 파수꾼
붉은 동백꽃
≪작은 새의 친구(小鳥の友)≫
고추잠자리
고향의
진주 섬
강아지와 꽃
코스모스와 나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서시
무성한 잡초 사이로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고
창백한 빛 속에서
활기 있는 것들은 가고 오지 않는구나−
序詩
はびこれる惡草のあいだより
美なるものはほろび去れり
靑白き光の中より
健げなるものは逝けり――
흰 손의 사냥꾼
태양은, 반짝이는 비단에 싸여
마지막 미소는 하얗게 달아올랐네.
그것은 우리 위로,
풀과 나무와 사랑 위로.
몸은 깊은 시름 속에 둘러싸여
흐느끼는 풍경의,
빛의 그늘을 헤맸네.
아 너는 흰 손의 사냥꾼,
너의 손은 무엇을 찾는가.
정 많은 가슴 흐트러진 풀숲에,
황금 풀숲에.
너의 손은 이렇게 말하리,
“백합으로 만든 새장 속
보석의 가슴은 찢어지고
상처 입은 작은 새는 그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이제, 태양은 마지막 숨을 쉬네.
우리들 들판에 난 작은 길로,
날은 아름다운 영혼처럼 다시 또.
白き手の獵人
太陽は、 かがやく絹につつまれ
終のほほゑみは白く熱したり。
そは我らの上、
草木と戀との上に。
身は深き憂の中につつまれて
すすり泣く風景の、
光の陰をさまよひたり。
あ〻君が白き手の獵人よ、
君が手は何か探りし。
優しき胸のみだれたる草叢に、
黃金なす草叢に。
君が手はかくも告げなん、
『百合がつくりし塒の中
寶石の胸やぶれて
傷きし小鳥はそこに死したり』と。
かくて今、 太陽は終りに呼吸す。
われらが野よりの小徑に、
日は美はしき靈魂の如くにま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