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34년 스웨덴 한림원은 “대담하고 독창적으로 희곡과 무대 예술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해 루이지 피란델로에게 노벨상을 수여했다.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은 그의 대담함과 독창성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은 희곡의 등장인물들이 텍스트를 빠져나와 공연 준비가 한창인 극단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신들의 진짜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달라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를 연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극단 배우’들의 양보 없는 대결이 펼쳐진다. 서로 ‘차이와 가변성’을 인정하지 못해 빚어진 이런 갈등은 실제 삶과 예술에서도 반복된다. 피란델로는 작가로서, 예술가로서 창작 과정에 느꼈던 어려움과 그로 인한 고민을 ‘등장인물’과 ‘극단 배우들’의 대결을 통해 표면화한다. 동시에 그로부터 삶과 예술의 관계, 흘러가는 인생과 완성되어 정지된 형식의 관계, 내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관계라는 자신의 오랜 고민거리를 주제로 삼는다. 피란델로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예술가의 고뇌와 실현’이 놀랍도록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 안에 응축되어 있다.
또한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은 연극 자체를 드라마화한 메타테아트로다. 작가는 상상력의 한계로, 배우는 표현의 한계로, 연출가는 모든 요소를 총체적으로 조율해야 하는 입장에서 소통의 한계로 시련에 직면한다. 피란델로는 작가, 배우, 연출가가 연극을 만들면서 겪는 고뇌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연극이란 예술 자체를 연극으로 재현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복잡한 극 형식을 통해 주제를 절묘하게 교차시킨 피란델로의 극작술이다. 피란델로는 이 작품에서 ‘상상력의 한계’를 다루면서 바로 그 한계를 대담하게 뛰어넘으며 빛나는 상상력을 보여 준다.
다소 복잡한 형식 때문인지 1921년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어렵다”는 비평이 쏟아졌고, 피란델로는 1925년에 ≪코메디아≫지에서 직접 이 극을 해설한 긴 글을 발표했다. “나는 어떻게 왜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썼는가”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이후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책에 계속해서 서문으로 실리게 된다. 이탈리아어를 직접 우리말로 옮긴 이 책에도 원전의 서문을 누락 없이 번역해 실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가 문학작품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사고의 연쇄를 이루었는지, 예술과 삶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연극으로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마치 어제같이 느껴지지만) 나의 예술에 쭉 봉사해 온 아주 잽싼 심부름꾼이 있다. 그것이 하는 일이 항상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그것의 이름은 상상력이라 한다. 이 상상력은 좀 짓궂고 장난기가 있다. (중략) 이 상상력은 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더니 빨강 방울모자 하나를 쓱 꺼내 든다. 그걸 마치 닭 벼슬처럼 머리 위에 척 얹고는 돌연 휙 떠난다. 오늘은 여기로, 내일은 저기로. 그러고는 나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걸 즐긴다. 내가 그 사람들로부터 단편 소설, 장편 소설 그리고 희곡들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남자, 여자, 소년, 소녀 등 세상에서 가장 불만스런 사람들이며 아주 이상한 사건들에 휘말린 채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상황에 처해 있고, 자신들의 희망에 속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는 일이란 사실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나의 이 상상력이 지난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못된 영감을 품어 왔다. 아니 불길한 변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고는 내 집에 어느 한 가족을 몽땅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 가족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이 상상력에 따르면, 그 가족으로부터 내가 매우 대단한 소설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서문’ 중에서
200자평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지 피란델로의 대표작이다. 전통적인 방식을 과감히 벗어난 독창성으로 세계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피란델로는 이 작품을 통해 삶과 예술이라는 이중 차원에서 “불완전한 소통”의 문제,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어려움”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끌어낸다. 주목할 것은 피란델로의 빛나는 상상력과 놀라운 극작술이다. 연극 자체를 연극으로 재현한 메타테아트로 형식 안에 이런 주제를 절묘하게 교차시켜 내고 있다.
이탈리아어 원어를 직접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탈리아어 원전에만 실려 있던 작가의 서문을 누락 없이 수록할 수 있었다. 피란델로가 “작품이 어렵다”는 세간의 비평을 의식해 잡지에 기고했던 이 글에는, “나는 어떻게 왜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썼는가”라는 제목에 걸맞게 작품의 모티프, 창작 과정과 함께 삶과 예술에 대한 피란델로의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지은이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는 시칠리아의 지르젠티(지금의 아그리젠토) 출생으로 신흥 부르주아에 속하는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그가 태어난 마을 카부소(고대 그리스어의 ‘카오스’가 방언으로 변질된 것)는 신비적(神秘的)이고 비교적(秘敎的)인 신화와 의식들을 중요시하는 지역이었다. 훗날 피란델로는 여러 가지 상황뿐만 아니라 태어난 곳의 실제 명칭과 관련해서도 자신이 카오스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카오스’란 뜻의 지명에 깊은 의미를 두었듯 그의 삶 또한 혼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894년 아버지의 동업자인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딸 안토니에타 포르툴라노와 결혼했다. 그러나 1903년 아내와 아버지가 투자했던 졸포 광산이 홍수로 폐쇄되면서 경제적으로 파산하면서 그 충격 때문에 아내는 정신착란증에 걸린다.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란델로는 1904년부터 1919년까지 15년간 광적인 상태의 아내를 곁에서 돌보았지만 아내의 증상이 악화되자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요양원으로 보내게 된다. 1차 대전 동안에는 아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전후 혼란과 데카당티슴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도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인생의 연속적인 고통과 당대 세계의 복합적인 배경은 피란델로 작품세계의 기반이 되었다.
피란델로는 시인, 소설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16년쯤부터 1936년 사망하기 전까지 20여 년간 극작가로 활동한다. 특히 희곡을 통해서는 혁신적 극작법을 발휘해 자기만의 주제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심화시켰다. 피란델로는 전통적인 극 형식을 거부하고 등장인물의 의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심도 있게 파헤친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1918)를 필두로 일련의 희곡들이 1920년대에 그를 세계적인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메타테아트로 형식을 통해 인생(차이와 가변성)과 예술(창작과정의 고뇌)에 대한 주제를 동시에 실현해 낸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로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
피란델로는 20세기 연극계에 브레히트, 베케트, 뒤렌마트, 이오네스코, 오닐, 아라발 등 대가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 연극에 기여한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옮긴이
장지연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학 이탈리아어과와 동대학원(희곡)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드라마 전공)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경대학교 인성교양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골도니의 ≪여관집여주인≫,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엔리코 4세≫, ≪피란델로 희곡선2≫(항아리, 증명서, 바보, 입에 꽃이 핀 남자, 선신제 수록), 다리오 포의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이 있다. 저서로는 ≪동시대연출가론≫(공저), ≪장면구성과 인물창조를 위한 희곡 읽기≫1편과 2편(공저) 등이 있다.
차례
서문
나오는 사람들
주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해설
지은이에 대해
루이지 피란델로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연출가 : (화가 나 벌떡 일어서며) “우습다고! 우습다고!” 낸들 어쩌란 말야? 프랑스에서 우리한테 좀 더 좋은 희극이 안 들어오니까 부득이하게 피란델로 극을 무대에 올리게 된 걸. 이 사람 작품을 이해하면 정말 똑똑한 거야, 배우도 비평가도 관객도 아무도 만족 못하게 작품을 일부러 이렇게 썼어! (배우들이 웃는다. 그는 일어나 남자 주연에게 가서 소리를 지른다.) 그러니까 이봐, 요리사 모자를 쓰라고! 그리고 달걀을 휘저어! 당신은 달걀을 그렇게 휘저으면서, 그러고 나면 손에 뭐 남는 게 있을 거란 생각 안 드나? 들 리가 없겠지! 당신은 당신이 휘젓는 그 달걀 껍질을 표현해야 하는 거야! (배우들,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서로 조롱조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한다.) 조용! 내가 설명을 할 땐 들어요! (남자 주연에게 다시 돌아서서) 그러니까, 이봐요, 달걀 껍질은 이성의 빈 형식이야, 눈먼 본능이라는 내용물이 들어 있지 않다고. 여기 당신들한테 주어진 역할들의 놀이에서 당신은 이성이고 당신 부인은 본능이야. 맡은 역할들의 놀이에서 당신 역할을 연기하는 동안, 당신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하는 거라고. 이해하겠나?
-48-49쪽
연출가 : (다시 화가 나서) 나 지금 연습 중이잖소! 연습 중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거 잘 알잖아! (객석 구석 쪽으로 몸을 돌리며) 댁들은 누구요? 무슨 일이오?
아버지 : (앞으로 나오고, 다른 사람들도 뒤를 따른다. 두 계단 중 한 군데까지 와서) 우리는 작가를 찾으러 여기에 왔습니다.
연출가 : (어처구니없고 화가 나서) 작가? 무슨 작가?
아버지 : 누구든 작가요, 선생.
연출가 : 여긴 작가라고는 없소. 그래서 우리가 새 연극을 연습 못하고 있잖소.
의붓딸: (쾌활하고 생기 있게, 계단을 매우 급하게 오르며) 더 잘됐네요, 더 잘됐어. 그럼, 선생님! 우리가 여러분의 새 연극이 될 수 있겠네요.
-54쪽
아버지 : 바로 여기서 모든 불행한 일들이 생겨요, 말들 속에서! 우린 모두가 자기 내부에 온갖 사물들에 대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요. 각자 자기 나름의 세계를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우릴 서로 이해할 수 있겠어요. 선생, 내가 하는 말 속에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다면, 한편 듣는 사람 쪽에선 불가피하게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로 그 말들을 받아들일 텐데 말이죠? 우린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봐요, 내 연민이, 이 여자에 대한 (어머니를 가리킨다) 나의 연민이 이 사람 쪽에서 볼 때는 잔인한 짓 중에도 가장 고약한 짓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거요.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