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세기 초 헝가리 농촌의 소외된 현실과 하층민의 억눌린 삶
코스톨라니 데죄와 더불어 헝가리 단편소설 작가를 대표하는 모리츠 지그몬드는 1942년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기에 따른 굴곡 없이 꾸준히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병행해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기법을 통해 20세기 초 헝가리 사회의 구석진 모습들, 농촌의 소외된 현실과 하층민의 억눌린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소재나 분위기가 다소 어둡고 암울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리츠가 비관주의자거나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도 그가 지향하는 바는 희망과 사랑이며 행복과 유머다. 이를 흔히 모리츠의 양면주의 기법이라 칭하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을 통해서도 그의 이러한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번역에 사용된 텍스트는 엠에르테크 출판사(M-ÉRTÉK Kiadó)에서 2005년에 출판된 ≪Móricz Zigmond Novellák≫다. 총 서른여덟 편의 단편소설 중 현재까지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고 작품성이 뛰어나 모리츠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는 열 편의 작품을 발표 연대 순서에 따라 소개했다. 이 책을 통해 모리츠의 초기(1908∼1919), 중기(1920∼1930), 후기(1931∼1942)의 문학관과 세계관, 그리고 문학적 기법의 차이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코스톨라니 데죄와 더불어 헝가리 단편소설 작가를 대표하는 모리츠 지그몬드의 단편집이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모리츠가 헝가리 봉건주의 사회의 병폐와 모순, 고통받는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단편 10편을 수록했다. 전체적인 소재와 분위기는 어둡고 암울하지만 그럼에도 작품 가운데 희망과 인간의 선함을 놓치지 않는다.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각박한 현실 속에서 힘겨워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지은이
모리츠 지그몬드(Móricz Zsigmond, 1879∼1942)는 1879년에 헝가리 동부에 위치한 서트마르(Szatmár) 주(州)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난 모리츠는 어려서부터 가난에 찌든 생활을 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비참했던 삶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또한 훗날, 모리츠는 민요 수집을 위해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헝가리 봉건주의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사실적으로 그린 리얼리즘 작품들과 주변 환경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파괴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철저하게 해부한 자연주의 작품들을 쓸 수 있었다.
모리츠의 작품 활동 시기는 자연주의 기법에 의거해 농민의 삶을 열정적으로 그려냈던 초기(1908∼1919), 자신의 어린 시절과 역사적인 사건, 그리고 19세기 귀족 사회의 모습을 그린 중기(1920∼1930), 다시 농민들의 처절한 삶을 객관적으로 그린 후기(1931∼1942)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모리츠는 1908년 문학잡지 <뉴거트(Nyugat)>에 단편소설 <일곱 개의 동전(Hét krajcár)>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들어섰다. 극도로 가난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한 가정을 그린 이 작품으로 헝가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10년 봉건주의 체제에서 고통받는 소작농의 죽음을 그린 <비극(Tragédia)>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헝가리 문학계에 확실히 각인했다. 역시 같은 해에 발표된 <순금(Sárarany)>에서는 허영에 들떠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농부의 삶을 통해 20세기 초 헝가리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중기 작품으로는 모리츠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며 어린 시절의 아픔을 그린 소설 <끝까지 착하거라(Légy jó mindhalálig)>(1920)와 사흘간의 술잔치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한 사람이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신사의 여흥(Úri muri)>(1927), 헝가리 상류사회의 인맥을 통한 부정부패와 배신을 그린 <친척들(Rokonok)>(1930)이 있으며 <끝까지 착하거라>의 후편 격인 <포도주가 끓는다(Forr a bor)>(1931) 등이 있다.
후기 작품으로는 1932년에 발표된 단편집 ≪야만인들(Barbárok)≫이 대표적인데, 이 책에 소개된 <돼지치기의 가장 더러운 셔츠>와 <야만인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야만인들>은 모리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1941년에 발표한 소설 <아르바츠커(Árvácska)> 역시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버림받은 소녀의 비인간적이고 처절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이 외에도 <행복한 사람(Boldog ember)>(1935), <내 삶의 소설(Életem regénye)>(1935)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모리츠는 63세가 되던 1942년에 뇌출혈로 부다페스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헝가리 최고의 문학잡지 <뉴거트>의 제1세대 작가들 가운에서도 특히 뛰어난 작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현재 헝가리에서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옮긴이
유진일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헝가리어과를 졸업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대학교(ELTE)에서 헝가리 <뉴거트> 3세대 작가인 로너이 죄르지(Rónay György)의 아들인 로너이 라슬로(Rónay László) 교수 밑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헝가리어과 대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헝가리어과에서 강의한다.
주요 논문으로는 <헝가리 신화의 아시아적 모티프>, <헝가리 정형시 율격의 구조와 특징>, <좌우 정권 교체에 나타난 중부유럽의 정치문화 갈등>, <케르테스 임레 소설의 구조적 특징 : 순환·반복구조와 단절구조>, <턴도리 대죄의 탈전통시 시도−네오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중심으로> 등 다수가 있다. 저·역서로는 ≪Kagylóhéjak≫, ≪Atigris és a nyúl-Koreai mesék és történetek≫, ≪책으로 읽는 21세기≫(공저), ≪동유럽 영화 이야기≫(공저), ≪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공역) 등 다수가 있다.
차례
유디트와 에스테르
예쁜 사람과 착한 사람
양 구유
허무주의자
인간은 진정 선하다
돼지치기의 가장 더러운 셔츠
이해할 수 없는 일
거짓말쟁이
치베
아르바츠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키 작은 금발의 유대인 부인이 바구니와 저울로 열심히 일하는 이 특별한 광경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녀 안에 있는 선한 영혼이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이 계속 일하고 있었다. 이 키 작은 불쌍한 유대인은 이런 작고 선한 신념 때문에 골고다를 걸어야 했다. 선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십자가를 지지 않았겠는가? 그 키 작은 과일장수가 석탄 바구니 밑에 쓰러지듯 그분 역시 십자가 밑에 쓰러지지 않았는가….
왜, 도대체 그들은 왜 죽어가야 했을까? ‘사람들은 선하다’는 데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은 선하다. 그러나 그들이 건강하고 삶이 잘나갈 때면 그들의 힘은 이 사실을 인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인간은 진정 선하다>에서
“자네들은 신이 내린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겠군…. 아이에게는 약이 필요한 것이야…. 어떻게 애가 죽지 않겠어…. 추운 봄에 땅 속에 아이를 묻고 감기 든 아이를 맨바닥에 그것도 돼지치기의 제일 더러운 옷 위에 눕히다니. 그러고서 아이가 낫기를 바라다니. 참, 생각도 못할 이런 미련함이란….”
그 엄마는 분노와 증오에 차 부인을 바라보았다.
“원인은 마님 때문이에요. 마님은 양심의 가책도 없으시지요! 3일 동안 피라미 새끼처럼 활기찼단 말이에요! 그렇게 생기가 넘쳤는데 이렇게 죽다니! 마님께서 신의 뜻을 거슬렀단 말이에요!”
“그런 사악한 말은 두 번 다시 하지도 말게!” 부인도 당황해서 소리를 쳤다.
“멀쩡한 애를 죽여 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다니. 부끄러운 줄 알게!”
부인은 눈물 맺힌 눈으로 조그만 일꾼 집에서 나와 자신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바람 한 점 없이 해는 쨍쨍 내리쬐고 모든 자연이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 아이는 불쌍하게 작은 주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아이는 주인집 베개를 베고 축 늘어진 채 문명의 십자로 위에 하나의 슬픈 기념물로 누워 있었다.
<돼지치기의 가장 더러운 셔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