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웃음을 주는 짤막한 이야기
파블리오(fabliau)는 12∼13세기 중세 프랑스에서 유행한 ‘웃음을 주는’ 짧은 이야기다. 떠돌이 성직자, 기사, 광대, 음유 시인들에 의해 널리 퍼졌다. 짤막한 모험담에는 도시와 농촌에 살고 있는 장인, 푸줏간 주인, 잡화상 주인, 늙은 재단사, 교활한 뚜쟁이, 억세고 거친 농부, 장애인들, 직업 없이 떠도는 유랑 성직자들, 도둑, 집을 비워 놓고 장터와 시장을 쫓아다니는 상인들, 부르주아들, 본당 신부들, 심술궂은 음유 시인들, 목축업자들, 대장장이들, 하녀들을 동반한 가정주부 등 세련된 궁정풍 문학에선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계층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들에 대한 사실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묘사와 과감한 풍자가 웃음을 유발한다. 캐릭터와 함께 스토리에서도 다른 문학 장르와 구분되는 파블리오만의 개성이 나타난다. 법과 양심에 반하는 부부의 계략, 미인을 꼬드기기 위한 성직자들의 계략, 남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도둑들의 계략, 남편을 속이고 연인과 밀회를 즐기려는 부인들의 치밀한 계략으로 엎지락뒤치락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계략을 꾸미는 주체는 주로 여성이며, 남편은 꾀바른 아내에게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여기에 성적인 농담과 외설스런 장면 묘사가 더해진다. 어느 정도 정형화된 캐릭터, 속임수와 난잡한 정사 장면이 난무하는 이야기 전개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 상스럽다.
종교와 인간에 대한 환상을 거부한 상스럽고 난폭한 이야기
파블리오가 보여 주는 난폭하고 상스러운 세계에서 종교도 신성을 잃는다. 성직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파렴치한 또는 남편 있는 여인을 돈으로 꾀어내려는 호색한으로 묘사된다. 서로 속고 속이는 부부, 이들 사이에서 욕정을 채우려 드는 성직자가 삼각 관계로 얽히고설키며, 이들은 영혼의 교감이 아니라 오직 육체적 사랑만을 탐한다. 파블리오는 종교의 힘이 가장 강력했던 중세 유럽에서 양심과 신념을 저버린 성직자들을 곧장 강력한 풍자 대상으로 삼으며 당대 사람들에게 웃음과 동시에 해방감을 선사했다.
파블리오 이야기꾼들은 인간성에 대한 환상 또한 과감히 버린다. 대신 성적 욕망을 이상화하고 가벼운 사랑의 모험을 흥미로운 색깔로 장식하면서 사회적 금기를 넘고, 욕망에 날개를 달아 주며, 온갖 쾌락의 신화를 전파한다. 다른 문학 장르를 흉내 내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적·종교적 가치를 웃음거리로 만들지도 않고,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 또는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승리를 그리지도 않는다. 세상을 개혁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린다. 결혼을 부정하지도 방탕을 제안하지도 않으며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는 태도도 찾아볼 수 없다. 파블리오 이야기꾼들은 오직 즐겁고 짜릿한 모험을 들려주는 것에 만족한다. 힘이 지배하는 저급한 세계에서 온갖 계략을 통해 스스로 곤경에서 벗어나는 즐거움, 다른 사람을 불행에 빠트리면서 느끼는 즐거움, 웃음을 통해 삶의 불안과 고통을 잠시 잊는 ‘기분 전환’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드러내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상스럽고 난폭하고 우스꽝스런 주인공들을 비난하거나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즐긴다.
서민부터 귀족까지 모두가 즐긴 이야기
이런 파블리오가 거리와 장터, 순례 장소, 교차로 같은 왁자지껄한 공공 장소에서만 공연되었던 것은 아니다. 부유한 평민의 저택에서도 저녁 식사 후에 파블리오가 낭송되곤 했다. 고상한 궁정풍 소설과 무훈시에 박수를 보냈던 계층 역시 파블리오의 청중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파블리오는 평민부터 귀족까지 각계각층이 듣고 즐긴 문학이자 공연이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라 퐁텐의 ≪우화≫가 바로 이 파블리오로부터 탄생했으며, 몰리에르의 걸출한 희극 작품들도 파블리오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200자평
중세 프랑스에서 유행한 파블리오 모음집이다. ‘웃음을 주는 이야기’를 뜻하는 파블리오는 떠돌이 음유 시인들에 의해 길거리, 장터, 궁정에서 공연되며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꾀바른 부인에게 속아 된통 당하는 남자, 탐욕을 부리다 골탕먹는 성직자, 오쟁이 진 남편 등이 단골 소재다. 당대의 만연한 위선과 어리석음을 재치 있게 풍자하지만 권선징악의 결말로 감동을 선사하진 않는다. 대신 한바탕 소동 끝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마라”, “세상이 믿을 사람 없다” 같은 인생의 지혜를 전한다. 이 책은 파블리오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스무 편을 엮은 것이다. 파블리오를 낭송하는 떠돌이 음유 시인들을 그린 8편의 삽화를 함께 실었다. 프랑스, 영국 도서관에서 구한 이 삽화들은 중세 사람들이 파블리오로 일상의 시름을 덜고 웃음으로 삶에 활력을 불어넣던 순간을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옮긴이
김찬자는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코메디아 델라르테≫, ≪이오네스코 읽기≫, ≪대머리 여가수 읽기−존재와 그 부조리한 일상의 풍경≫, ≪우리 시대의 프랑스 연극≫(공저)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프랑스 장터극 선집≫, ≪프랑스 중세 소극집≫, ≪프랑스 희곡사≫, ≪희극, 프랑스 희극의 역사≫(공역),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있고, ≪라 퐁텐 우화≫, ≪흰 티티새 이야기≫ 등의 우화 번역집이 있다. 중세 이후 희극 담론 및 대중적 기원의 서양 연극 형식과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이선형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김천대학교 상담심리치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동화 ≪곰팡이 빵≫(2010), ≪용기 없는 감잎≫(2012), ≪셈 아저씨≫(2015)를 출간했으며, ≪연극·영화로 떠나는 가족치료≫(공저, 2010), ≪프랑스 현대연극의 이론과 실제≫(2007), ≪예술 영화 읽기≫(2005), ≪연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2013) 등이 있고, 역서로는 ≪영상 예술 미학≫(2009), ≪공연 예술의 기호≫(2008), ≪이미지와 기호≫(2004), ≪지하철의 연인들≫(2003), ≪각색, 연극에서 영화로≫(2002) 등이 있다. 연극을 통한 치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임혜경은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동시대 불어권 희곡을 주로 발굴하여 번역하고 공연하는 ‘극단 프랑코포니’(2009년 창단) 대표로서 매년 한 편씩 공연 제작을 해 오고 있으며 연극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불어권 희곡 역서로 ≪고아 뮤즈들≫, ≪유리알 눈≫,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이 아이≫, ≪벨기에 물고기≫, ≪아홉 소녀들≫, ≪단지 세상의 끝≫ 등이 있으며 그 외 한국 문학(시, 소설, 연극)을 불역하여 프랑스에서 출판한 역서가 다수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신인상(1991), 한국문학번역상(2003), 서울연극인대상 번역상(2014)을 수상했다.
정의진은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에서 몰리에르 시대의 단막 소희극(1650∼1673)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희대 강사로 재직했다. 논문으로는 <프랑스 중세 소극과 고전 소희극>, <장-폴 벤젤의 일상극>, <프랑스 소극의 구조와 특성> 등이 있고, 저서로 ≪우리 시대의 프랑스 연극≫(공저)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프랑스 중세 소극선≫, ≪희극, 프랑스 희극의 역사≫(공역) 등이 있다. 서양 희극의 기원 및 프랑스 고전 희극의 작가와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차례
콩피에뉴의 세 장님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프로뱅의 부아뱅
에튀라
머리 타래
염색된 사제
꿩
에스토르미
옹트의 가방
사제와 알리송
당나귀를 모는 농부
바이열의 농부
에메와 바라
브뤼냉, 사제의 암소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 관리 수도사
당나귀의 유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
의사가 된 농부
해설
편역자에 대해
책속으로
1.
“염료를 좀 볼까. 오늘 손님이 주문한 예수 수난상에 색감이 잘 입혀졌는지. 경건한 마음으로 꺼내 봐야지. 자네는 불을 좀 세게 지피게나. 불을 좀 올리라고.”
사제는 이 말을 듣고 들킬까 두려워 머리를 염료 속에 집어넣었어요. 피콩 씨는 아내와 하인들과 함께 통 쪽으로 가서 뚜껑을 열었죠. 그리고 그 안에 나무나 돌로 만든 물건처럼 널브러져 있는 사제를 발견했어요. 사람들은 사제의 두 발과 허벅지와 두 팔을 잡아 아주 높이 들어 올렸어요.
피콩 씨가 말했어요.
“아이고, 엄청 무거운데! 이렇게 무거운 예수 수난상은 처음 봐.”
사제는 말대꾸로 응수할 수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힘들여 사제를 겨우 통에서 꺼냈어요.
2.
이 파블리오는 몽펠리에에서 일어났던 어느 한 농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농부는 당나귀 두 마리와 함께 자기 땅에 거름을 주기 위해 퇴비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당나귀에 퇴비를 싣고 “이랴” 소리를 지르며 당나귀를 몰고 시내로 들어섰어요. 그는 마침내 소년들이 절구에 향료를 빻고 있는 향신료 거리에 도착했지요. 그런데 향신료 냄새를 맡자마자 이상하게도 그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는 곧바로 기절해 쓰러졌고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말했어요.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여기 이 죽은 사람을 보살펴주소서.”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당나귀들은 길가에 조용히 서 있었지요. 당나귀는 채찍질하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한 양반이 다가와서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누가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나요? 그럼 제가 헐값으로 한번 치료해 볼까요.” 그때 한 상인이 말했습니다.
“당장 살려 보시오. 내가 스무 냥을 드리겠소!”
3.
집으로 돌아온 주임신부는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기다렸습니다. 아 맙소사! 어떻게 신부가 교미하는 말보다 더 크게 성기를 세울 수가 있나요. 그는 숫처녀에게 멋지게 봉사하겠다고 신에게 맹세했습니다. 그는 짧은 치마와 짧은 가죽 재킷 위에 긴 겉옷을 걸치고 은화 돈주머니를 들고 다시 마오 부인 집으로 갔어요.
마오 부인은 파티를 하는 것처럼 꾸며 놓고 주임신부를 자기 옆에 있는 화덕 앞에 앉혔습니다. 화덕 위에 올려놓은 꼬챙이에는 거세된 수탉 두 마리와 살찐 거위 한 마리 그리고 여러 마리의 수컷 오리와 청둥오리가 꿰어져 있었습니다. 수아송의 백포도주와 최고급 밀가루로 만든 케이크도 준비되어 있었지요. 각자 음식을 배불리 먹었어요.
식사가 끝나자 마오 부인은 주임신부에게 물었어요.
“제 딸에게 줄 것이 뭐가 있나요?”
주임신부가 대답했지요.
“아, 난 배신하지 않아요. 옷을 가져왔지요. 여기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난 거짓말을 안 해요. 약속은 꼭 지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