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연인이 1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면…
애증과 갈등에 휩싸인 심리 변전을 정신분석학을 동원한 듯 예리하게 묘사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스무 살 마리와 연인 펠릭스, 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내려진다. 불치병, 1년 시한부 인생. 자유분방하고 즐거운 보통의 연인이던 그들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 마리는 펠릭스가 죽는 날 자신도 함께 죽겠노라고 맹세한다. 펠릭스는 처음에는 그녀를 놓아주려고 하지만 이런 관대함과 아량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새 마음은 그녀에 대한 불신과 시기로 차오른다. ‘과연 그녀는 맹세를 지킬 것인가, 내 앞에서만 위장된 연극을 하고 내가 죽은 후에는 자신만의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펠릭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가 더 이상 웃거나 울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짓누른다. 마리는 약속을 지키겠다 다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에서 달아나고픈 본능적 충동은 커져만 간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죽음≫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하지만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면서 시종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두 남녀의 예리한 심리 묘사가 자칫 빠져들기 쉬운 진부의 늪에서 작품을 과감히 끌어낸다. 한 편의 심리학적 학술연구물과도 같이 감상성이 배제된 채 지극히 냉철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불치병을 앓는 펠릭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애증과 갈등 속에 전개되는 두 사람의 심리 변전을 정신분석학을 동원한 듯 날카롭게 그린다.
슈니츨러는 1892년 7월 탈고 후, 10월 작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이 작품을 낭독하고 메모를 남겼다. “예상치 못한 큰 성공. (…) ‘놀랄 만큼 멋진’, ‘대단한’과 같은 말들이 주변에서 울려 나옴.” 고무적인 반응이었다. 이어지는 작품 활동 과정에서 그는 프로이트에게 경탄에 가까운 고백을 받는다. “내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된 작업을 통해 밝혀내야 했던 것을 당신은 직관으로 알아낸다.” 의사이자 작가인 슈니츨러의 작품 특성을 짚어낸 것이다. ≪죽음≫은 냉철하면서도 극적인 전개가 극화하기에 적합해 1971년에 독일 공영 제2TV 방송인 체데에프(ZDF)에서 영화로 제작한 바 있고, 그에 앞서 1965년에는 오스트리아 공영방송인 오에어에프(ORF)에서 라디오방송극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200자평
오스트리아의 의사이자 작가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초기 소설을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한다. 프로이트는 슈니츨러의 작품 세계를 두고 이렇게 경탄했다. “내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된 작업을 통해 밝혀내야 했던 것을 당신은 직관으로 알아낸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펠릭스와 그의 연인 마리의 심리 변전을 정신분석학을 동원한 듯 날카롭게 그린 ≪죽음≫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의 초기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다.
지은이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의 의사이자 소설가 겸 극작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찍이 1880년부터 문학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1888년까지는 빈 대학병원에서 정신의학 및 피부과 의사로 근무했다. 그 후 1893년까지 빈의 외래전문병원 후두과에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면서 의학 관련 기고문과 학술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1890년부터 후고 폰 호프만슈탈, 헤르만 바르, 리하르트 베어ᐨ호프만 등과 문학동아리 ‘젊은 빈’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고, 이때 유명한 정신분석하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알게 되었다. 그의 문학은 주로 죽음과 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분석의 기법을 통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과 충동의 세계를 날카롭게 파헤침으로써 심미적이고 세련된 감각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신 빈파’의 대표적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1931년 뇌출혈로 69세의 삶을 마감하고 빈 중앙묘지의 유대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공주사범대학 독어교육과와 고려대학교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연구했으며, 독일 뮌헨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학과장, 신문방송사 주간, 언어교육원장, 평생교육원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독일 단화의 이론과 실제≫, ≪독일문화의 이해≫, ≪ARD 방송독일어≫, ≪독일의 역사와 문화≫, ≪시사독일어≫, ≪문학 속의 삶≫, ≪나와 신문과 독일문학≫, ≪볼프강 보르헤르트 문학의 이해≫, 번역서로는 ≪인류사를 이끈 운명의 순간들≫(슈테판 츠바이크), ≪붉은 고양이≫(루이제 린저 외), ≪괴테 자서전≫(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윤무≫(아르투어 슈니츨러), ≪톨레도의 유대여인≫(프란츠 그릴파르처), ≪문 밖에서≫(볼프강 보르헤르트) 등이 있다.
차례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아르투어 슈니츨러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태양이 이글거리는 견디기 힘든 여름이 다가와 살갗을 태우는 뜨거운 낮과 탐욕으로 넘실거리는 듯한 미적지근한 밤이 이어졌다. 날마다 낮은 전날 낮을, 밤은 지난밤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시간이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둘뿐이었다.
-50쪽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전혀 존재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이제 내버려두고 떠나야만 하는 주변세계의 삶에 속해 있지 그에게 속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순간에는, 특히 밤에는, 그녀가 청춘의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눈을 꼭 감고 깊은 잠에 빠져 그의 곁에 누워 있을 때면 그는 그녀를 한없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가 더 편안히 잠잘수록, 그녀의 잠든 모습이 세상과 더 동떨어져 있을수록, 그녀의 꿈꾸고 있는 영혼이 그의 깨어 있는 고통과는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질수록 그는 그녀를 더 광적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한번은 밤중에 그녀를 이 달콤한 잠에서 흔들어 깨우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그에게 엄습해 왔다. 그에게는 그녀의 잠이 음흉스러운 부정(不貞)으로 여겨졌다.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외쳤다.
“자기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죽어, 지금 죽어.”
-66~67쪽
그의 침울한 시선은 다시 그녀에게서 벗어나 방금 공원 입구에서 사라진 그 두 남자 가수를 향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잘 알았다. 여기 그의 앞에 그가 가장 죽도록 미워했던 것이 걸어가고 있다.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을 어떤 것 한 조각이, 그가 더 이상 웃거나 울지 못할 때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웃게 될 어떤 것이.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지금 죄의식 속에 전보다 더 꼭 그와 팔짱을 낀 채 서로가 어떤 숙명적 친화관계인지도 느끼지 못하는 생기발랄하게 웃고 있는 젊음 한 조각도 걸어가고 있었다.
-80~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