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내재 의지”의 시적 발현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인 인간의 내재 의지의 실행은 바로 하디의 작품을 염세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주요 요인이다. 그의 시에는 슬프고 우울하고 어둡고 절망적이고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인간 상황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무관심한 우주 속에 무력하게 있는 인간 상황에 대한 인간인 자신의 적나라한 응시나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인간의 자문자답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내재 의지는 초도덕적인(unmoral)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들의 조그마한 행위 뒤에 파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혹은 절대자의 도덕성을 설정하고, 그 이면에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는 삶 자체를 설정하는 하디의 재능은 그의 모든 문학 작품을 통해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에서 얻는 의미
하디는 망각의 세계로부터 일어나는 기억들과 현존하는 사물에 남겨진 죽은 자의 흔적·조상·유전·기념비 같은 것에 주목한다. 이로써 하디에게 죽은 자들은 사실상 죽음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추억과 회상에 의해 살아 있는 존재로 귀환하는 존재가 되며, 이는 사후의 불멸성과 연계성을 갖는다. 말하자면 하디에게 죽은 자는 죽음과 고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죽음 속의 현존을 역설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하디가 죽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경험한 감정의 범위를 탐색하고 사후의 세계가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영원히 예술이나 기억 속에 간직하기를 소망했던 시인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런 하디에게 죽음은, 불행한 삶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존재로 환영을 받는다. 죽음은 고통이 불가피한 세상에서 고통을 중단시키는 유일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디는 늘 시간과 기억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며 이에 강박적이지만, 그에게 죽음은 늘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현재의 주체인 삶을 조망하는 데 필요한 객체다. 그러므로 그는 늘 삶 속에서 죽음을 보고 죽음 속에서 삶을 보는 이중적인 관점을 지니고 이들을 영원과 연계시킨다. 하디에게 삶은 늘 죽음과 그 의미를 소통하는 존재이고, 무한대라는 죽음의 시간대에 놓인 현상적인 흐름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하디에게 이 세상에 끝없이 반사되는 영원의 시간대는 끊임없이 인간의 삶 속에 침투하며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그에게 죽음의 체험이나 이미지는 시간관과 인생관을 대변하는 시적 장치의 일부지만, 그 이면에 놓인 영원의 이미지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투영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조각된 목조 그릇”
하디는 그의 시에서 의도적으로 거칠게 한 운율과 기발한 언어를 즐겨 사용해 사물을 하나의 일상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독자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때로는 야무진 언어의 분절화로 역설을 창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은근하고 때로는 신랄한 대비와 반어 기법을 통해, 풍자와 의인화, 극적 발화 등의 장치를 동원한다. 그는 다양성과 모순성을 지닌 다채로운 언어, 운율·분위기와 같은 시적 특징과 결부해 독특한 시각을 통해 삶의 일반적인 상황으로부터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 묘사하기도 하고, 마치 빛을 찾아 헤매는 소박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사소한 것을 면밀히 검토하기도 하고, 이에 반해 우주적인 규모로 사색하기도 함으로써 그의 모순되고 양면적인 까다로운 감수성을 표출한다.
이야기하는 시
하디의 시는 시골의 구비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전통 발라드를 채록한 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소설을 썼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짧은 회상이나 특정 상황의 소묘, 서정적이며 고백적인 자기 토로의 시를 보여 주기도 하고,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연애시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사적인 목소리는 지나치게 개인의 감정을 토로한다는 점에서 몰개성 이론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개인의 정서를 저속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신랄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하디의 시에서 단점으로 지적받은 평범한 개개인의 삶의 과정과 지나친 개인사의 토로가, 어떤 독자에 의해서는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감동적인 특징을 부여하는 하디의 개성으로 찬사를 받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그 매력을 한껏 발휘하는 것이다.
200자평
토머스 하디는 반어·역설·풍자·의인화 같은 기법들을 사용해 인간 세상의 다양한 일화를 재치 있게 표현하면서도 시간을 초월한 인간의 가치와 당대 핵심 문제를 제시한다. ≪하디 시선≫에 그의 대표작 72편을 실었다. 특유의 직설적이고 냉소적인 표현들은 현대 시의 성격을 다소 지니고 있어 현대인들과도 정서적인 일치가 가능하다. 하디가 최근 재조명되고 각광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다.
지은이
토머스 하디는 1840년 영국의 남서부에서 석공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이웃에 사는 시인 윌리엄 반스(William Barnes)와 함께 공부를 했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 공부는 물론, 성경, 셰익스피어, 그리고 에우리피데스, 호라티우스, 루크레티우스 등을 비롯한 많은 고전 작가들에게 몰두해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시를 써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에설버타의 손(The Hand of Ethelberta≫, ≪얼간이(A Laodicean)≫, ≪탑 위의 두 사람(Two on a Tower)≫, ≪사랑하는 사람(The Well Beloved)≫, ≪캐스터브리지의 시장(The Mayor of Casterbridge)≫, ≪숲속에 사는 사람들(The Wood- landers)≫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마지막 두 편의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와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가 세상 사람들의 신랄한 비평을 받자 그는 낙담하게 되었다. 이후 소설 쓰기를 단념하고 시 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1898년 출간된 첫 시집 ≪웨섹스 시편과 기타 시편들(Wessex Poems and Other Verses)≫을 비롯해, 서사시 ≪제왕들(The Dynasts)≫, 이후 ≪시간의 노리개들과 기타 시편들(Time’s Laughingstocks and Other Verses)≫, ≪상황의 풍자(Satires of Circumstance)≫, ≪통찰의 순간(Moments of Vision)≫, ≪후기 서정시와 그 이전의 기타 시편들(Late Lyrics and Earlier with Many Other Verses)≫, ≪인간의 모습들, 먼 환상들, 노래와 하찮은 것들(Human Shows, Far Phantasies, Songs and Trifles)≫, ≪다양한 분위기와 운율로 쓴 겨울의 말(Winter Words in Various Moods and Metres)≫ 등의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장시 ≪제왕들≫을 제외하고도 거의 1000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 작품을 출간했다. 1928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윤명옥은 충남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존 키츠의 시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캐나다와 뉴질랜드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다. 국제계관시인연합 한국위원회 사무국장과 한국 시 영역 연간지 ≪POETRY KOREA≫의 편집을 맡았으며, 충남대학교, 홍익대학교, 인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영미 시와 캐나다 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전공 저서로 ≪존 키츠의 시세계≫, ≪역설·공존·병치의 미학 : 존 키츠 시 읽기≫가 있고, 우리말 번역서로 ≪키츠 시선≫, ≪디킨슨 시선≫, ≪내 눈 건너편의 초원≫, ≪나의 안토니아≫, 영어 번역서로 ≪The Hunchback Dancer≫, ≪Dancing Alone≫, ≪A Poet’s Liver≫ 등이 있다. 또한 허난설헌 번역문학상, 세계우수시인상, 세계계관시인상을 수상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말 시집(필명 : 윤꽃님)으로 ≪거미 배우≫, ≪무지개 꽃≫, ≪빛의 실타래로 풀리는 향기≫, ≪한 장의 흑백사진≫, ≪괴테의 시를 싣고 가는 첫사랑의 자전거≫가 있고, 미국에서 출간된 영어 시집(필명 : Myung-Ok Yoon)으로 ≪The Core of Love≫, ≪Under the Dark Green Shadows≫가 있다.
차례
10월의 마지막 주
그녀
어스름 속의 개똥지빠귀
그녀의 비밀
반짇고리
아마벨
차이
지위가 낮은 이들
1967
유전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날씨
우리는 밭일하는 여자들
통찰의 순간
중간 색조
런던의 아내
어둠 속에서
깨진 약속
산책
미망인이 된 그녀, 꿈이라고 생각하네
스스로를 보지 못함
황소들
비바람 몰아치는 동안
즐기리
성급한 결혼식에서
자연의 질문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
우연
아, 당신이 내 무덤을 파고 있나요?
크리스마스: 1924
가장 사랑하는 사람
새해 전야
인간에게 부치는 호소문
삶은 웃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네
그녀는 폭풍 소리를 듣는다네
상황의 풍자: 교회에서
북 치는 병사 호지
그가 죽인 사람
목소리
유서 깊은 집
냉소주의자의 묘비명
해 뜰 무렵의 삶과 죽음
염세주의자에 관한 묘비명
폭포 아래서
신나는 것들
의문의 연회
로잔
존재에 관한 어느 젊은이의 풍자시
애도의 시
둘 다 기다림
타락한 처녀
집안의 명사
둘의 합일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경솔한 신부
우리가 아는 그분
“기억에 바쳐진 것”
웨섹스의 산봉우리들
캐럴라인 왕비가 손님들에게
킹스 힌톡 공원의 가을
떠돌이 여인의 비극
평온한 사람의 묘비명
벽난로의 장작
감지하지 못하는 자
그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라들의 멸망”이 오는 시간에
전쟁 기간 중의 새해 전야
아주 다양해
해협의 함포사격
훗날
권주가(勸酒歌)
마지막 숨을 거둔 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기약하지는 못한단다,
얘야, 너무 많은 것을 기약하지는 못해,
그저 중간 색조의 우연 같은 정도지”,
그대는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지.
그대의 신용을 지키는 현명한 경고였지!
그 경고를 받아들인 덕택에 나는
해마다 할당되는 고통과 아픔을
견딜 수 있었지.
염세주의자에 관한 묘비명
나는 육십여 살 된, 스토크의 스미스,
젊었을 때부터 줄곧 여자 없이
살았다, 나의 아버지도 제발
나와 똑같이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