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금껏 지하련의 작품 세계는 ‘심리주의’, ‘사소설’,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적 범주들이 맞물린 지점에서 논의되었다. 감수성으로 빚어낸 세밀한 관찰과 탁월한 심리묘사, 경상도 방언과 구어체의 활력에 힘입은 감각적인 문체, 그 안에 녹여낸 체험의 사실성과 의식의 투명성, 그리고 이 같은 체험과 감각의 밀도로 추동되는 내면의 서사. 이것이 지하련의 소설 세계를 요약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하련의 작품 세계는 194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940년대는 파시즘 체제의 파행으로 나라 안팎이 진동하던 시기였음에도,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패배한 이념과 좌절된 이상만을 자조적으로 곱씹으며 만조(滿潮)의 때를 보내고 난 만조(晩照)의 여운 속에 자폐적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이때 지하련은 여성으로 지식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고 점검하는 작가적 태도를 견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별>, <가을>, <산길>은 후대 연구자들이 지하련에게 페미니즘 작가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데 근거를 제공한 작품이다. 이들 소설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탐색하고 ‘신가정(新家庭)’의 실체를 해부함으로써 결혼 제도의 허위와 보수성을 폭로한다. 지하련은 사랑과 신뢰, 평등이라는 근대적 원리에 입각해 이상적으로 추구되어 왔던 근대 가정(home)이 실제로 여성에게 그리 ‘스위트(sweet)’한 공간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세 작품은 ‘모델소설’(백철)로 성격이 규정된 바 있고, 남편 임화에 대한 지하련의 언급 및 임화의 염문설 등이 뒷받침되어 실제 인물들과 소설 속 인물을 오버랩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소설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남편의 연애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인물의 시각, 더 정확하게는 인물 뒤에 숨어 있는 작가의 시선이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연애 사건 자체는 서사의 프레임 밖에 밀려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허위의식, 그리고 결혼 제도의 불합리성을 역설하는 여성 젠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성 젠더의 시선에는 본능적으로 자기 내부를 더듬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향초>, <종매>, <양>, <도정>은 이념적 패배 혹은 전향 이후 지식인들의 내면을 담아낸 소설이다. 카프 해산 이후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즘이 극으로 치닫던 상황에 직면해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추방시키고 내면의 감옥에 유폐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것이다.
<도정>은 해방을 맞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소시민적 지식인의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지하련은 냉소와 방관, 그리고 환멸로 쌓아올린 과잉된 자의식 속에서 사는 것, 이것이 질식할 것 같은 시대를 견디는 방법이며 방황과 탐색이 지식인의 정체성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 <도정>에 이르러 방황과 모색을 멈추고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 또한 지식인의 의무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추방을 허하지 않는” 빛나는 재지로 “빈약한 여류 문단에 큰 기여”를 할 것이란 기대 속에 문학의 도정에 오른 작가 지하련, 그러나 그는 소설 <도정>을 끝으로 짧은 작가적 이력을 마감한다. 월북 문인이라는 전력은 남한의 공식적인 문학사에서 지하련의 이름을 지워냈고, 남편 임화의 비극적 운명에 함께 좌초된 탓에 북한 문학사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부끄럽지 않고 투명한 작가의 눈을 갖고 싶어 했던 지하련의 문학은 궁극적으로 자기 확인 욕망과 자기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 타인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거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는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자기의 내부를 향하고 있었고, 그 예민한 촉수는 결벽증적으로 자기를 점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자조적이되 자폐적이지는 않고, 냉소적이되 비관적이지는 않을 수 있었다.
200자평
세밀한 관찰과 탁월한 심리묘사, 감각적인 문체, 체험의 사실성과 의식의 투명성, 이 같은 체험과 감각의 밀도로 추동되는 내면의 서사. 이것이 지하련의 소설 세계를 요약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하련의 작품 세계는 194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파시즘 체제의 파행으로 나라 안팎이 진동하던 시기에 지하련은 여성으로 지식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고 점검하는 작가적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은이
지하련의 생애는 일관되고 총체적인 자료에 의해 기록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당대 문인들의 기록과 회고록, 카프 비평가이자 시인인 남편 임화(林和)의 생애에 관한 연구 자료, 사소설 성격을 지닌 지하련 소설 등에 의존해 파편적으로 그 삶의 궤적을 좇아볼 수 있을 뿐이다.
지하련(池河連)은 필명이며 호적상의 본명은 이숙희(李淑嬉)다. 소설을 쓰기 전 이현욱(李現郁)이란 이름으로 문단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하련은 1912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탄생, 마산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일본 도쿄 쇼와고녀(昭和高女),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東京女子經濟專門學校)에서 수학했으나, 졸업은 못했다.
작가로서 그의 이력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임화와의 만남과 결혼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지주이면서도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으로 지하련은 일찍이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떴고, 이런 배경에서 임화와는 같은 길을 가는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으로 미래를 기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화는 이미 전처 소생의 자식이 있는 기혼자였지만 이혼 후 1936년 지하련과 재혼했다.
임화와의 사이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고향에서 단란한 가정의 아내로 살아가던 지하련이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남편 임화로 인해 형성된 문학적 분위기와 서정주, 최정희 등 문인들과의 교류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1938년 상경 후 임화의 주위에 몰린 많은 문인들과 접촉하면서 지하련은 문학적 자극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지하련은 폐결핵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친정이 있는 마산으로 내려가 투병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병, 외로움과 싸우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백철의 추천을 받아 드디어 1940년 12월 <문장>에 ‘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단편 <결별>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문단에 나올 때부터 사적인 배경과 재능, 미모로 많은 시선을 모았던 지하련은 1941년 마산 요양 시절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 <체향초(滯鄕抄)>를 필두로 <가을>, <종매(從妹)>, <양(羊)>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열정적으로 소설 쓰기에 몰두한다. 지하련은 해방 후 임화가 결성한 ‘조선문학동맹’(1946년 2월 이후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서울 지부의 소설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대표작 <도정>을 발표했다. 그는 소설 외에도 <일기>(<여성>, 1940. 10), <소감>(<춘추>, 1941. 6), <겨울이 가거들랑>(<조광>, 1942. 2), <회갑>(<신세대>, 1942. 9) 등의 수필과<어느 야속한 동포가 있어>(<학병>, 1946. 2) 등의 시를 남겼다.
그러나 이렇게 촉망받는 작가로 자리를 굳혀가던 지하련은 1947년 좌파 문인에 대한 검거 로 임화가 월북한 뒤 뒤따라 북으로 가게 된다. 1948년에 지하련의 유일한 창작소설집 ≪도정≫(백양당)이 출판되었으며, 정황상 지하련은 그 이전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 측 자료에 의하면 이후 1953년 남로당 숙청으로 임화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만주 땅에서 전해 들은 지하련이 남편의 주검을 찾기 위해 평양 시내를 헤매 다니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지하련의 사망 연도와 관련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평북 희천 근처 교화소에 수용된 후 1960년 초에 병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엮은이
임정연은 이화여자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국어문화원 박사 후 연구원(Post-Doc)과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학위 논문 <1920년대 연애담론 연구−지식인의 식민성을 중심으로>는 ‘연애’라는 미시적 코드를 통해 근대문학의 식민지 근대성을 탐색하고 성찰하려는 시도로, 이후 지식의 유통과 모럴(moral)의 형성, 문화의 소비방식이라는 박사 논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후속 연구를 진행했다. <1930년대 초 소설에 나타난 연애의 모럴과 감수성>, <임노월 문학의 악마성과 탈근대성>, <근대소설의 낭만적 감수성−나도향과 노자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등은 근대소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반영한 연구 성과다.
현재 ‘여행’이라는 테마를 통해 젠더 정체성과 장소 정체성이 맺는 상호관련성을 규명하고 문화번역 텍스트로서 여행서사를 계통적으로 독해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파리’의 장소기억을 통해 본 나혜석의 구미여행의 함의>, <망명도시의 장소상실과 좌초하는 코즈모폴리턴의 초상−주세죽과 상해, 그리고 모스크바>, <1950ᐨ80년대 여성 여행서사에 나타난 이국체험과 장소감수성>, <여성의 해외 거주 경험과 탈경계적 공간 인식−손장순과 김지원의 유학·이민 서사를 중심으로>, <기억의 토포스, 존재의 아토포스−독일 토포필리아와 전혜린의 글쓰기>, <1990년대 여행서사의 문화지형과 젠더 감수성>, <지도 바깥의 여행, 유동하는 장소성−2000년 여행서사의 장소 전유 방식>, <여행서사의 재난 모티프를 통해 본 포스트모던 관광의 진정성 함의>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17년 ≪문학나무≫ 평론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현재 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차례
결별
체향초
가을
산길
도정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는 기철이 주는 붓을 받어, 먼저 주소와 씨명을 쓴 후, 직업을 썻다. 이젠 ‘게급’을 쓸 차레였다. 그러나 그는 붓을 멈추고 잠간 망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투사도 안이요, 혁명가는 더욱 안이었고…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운동자? 모도 맛지 않는 일홈들이다. 마침내 그는 ‘小뿌르조아’라고 쓰고 붓을 놓앗다. 그리고는 기철이 뭐라고 허든 말든 급히 밖으로 나왔다.
−<도정>, ≪지하련 단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