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전대(前代) 완약사(婉約詞)의 장점을 극대화하다
진관은 현존하는 작품이 110수 정도로 유영이나 소식처럼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또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등 문학사적 공로가 큰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전대(前代) 완약사(婉約詞)를 이어받아 그 장점을 극대화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고 함축적이면서도 정(情)과 운치가 뛰어난 신형의 사풍(詞風)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의 사를 감상할 때는 정이 뛰어나다는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단지 연정(戀情)과 염정(艶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세지정(身世之情)과 폄적지정(貶謫之情)도 포함된다. 진관의 사는 ‘신세지감을 염정 속에 합병해 넣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대의 완약사를 능가하게 된 현저한 특징인 것이다.
기존의 낡은 몸뚱이에 수혈한 정(情)
만남·이별·원망의 내용으로 염정을 표현한 초기 완약사는 유영에 이르러 작자의 나그네 심정이 담기며 그 경계가 확장되었다. 이어 진관에 이르러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분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신세와 운명에 관련된 쓸쓸하고 슬픈 감정을 염정의 주제와 결함함으로써 낡은 몸뚱이 속에 새로운 혈액을 주입하게 된 것이다.
장점으로 단점을 보충하고 우아함으로 저속함을 구제하다
짧은 편폭의 소령(小令)에 담겨 있는 ‘뛰어난 운치’도 뛰어나지만, 더욱 주목할 것은 소령의 운치를 만사장조(慢詞長調)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령의 문아함을 이용해 유영 만사의 저속함을 바로잡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소령의 함축성을 이용해 유영 만사의 직설적인 표현을 보완하는 데 성공했다. 장점으로 단점을 보충하고 우아함으로 저속함을 구제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사람과 통속적인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풍격과 미감을 갖춰 완약사의 대표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200자평
유영에 이어 대표적인 완약사(婉約詞) 작가로 꼽히지만,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진관의 사를 소개한다. 전대 완약사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보완해 정과 운치가 동시에 뛰어나면서도 우아한 사람과 통속적인 사람이 함께 즐기는 풍격을 창조한 첫 번째 사인(詞人), 진관의 대표작 35편을 엄선했다.
지은이
진관(秦觀, 1049∼1100)은 자(字)가 소유[少游 : 처음에는 태허(太虛)를 썼으나 37세 때 바꾸었음]고, 호(號)는 회해거사(淮海居士)로 양주(揚州) 고우(高郵: 지금의 장쑤성 가오유) 사람이다. 그는 송(宋) 인종(仁宗) 황우(皇祐) 원년(1049)에 중소 관료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부 승의공(承議公)은 일찍이 남강(南康)에서 관직을 지냈고, 숙부 진정(秦定)은 회계위(會稽尉)·강남동로전운판관(江南東路轉運判官)·지호주(知濠州) 등의 관직을 지냈다.
진관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집 안에서 지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별로 교제가 없었으며, 평시에는 다만 책을 빌려 열심히 읽고 문장을 학습할 따름이었다. 그와 같은 생활은 그의 성격을 유약하게 만들어 급기야 이후의 정치적 풍파와 그의 시(詩)·사(詞) 속에 그러한 성격이 반영된다. 학문을 연마하며 조용하게 성장기를 보낸 진관은 영종(英宗) 치평(治平) 4년(1067) 열아홉 살 때 담주(潭州) 영향주부(寧鄕主簿) 서성보(徐成甫)의 장녀 문미(文美)와 결혼했다.
진관은 당시 구양수(歐陽修)에 이어 문단의 영수로 떠오른 소식을 흠모해 그의 문하로 들어가 배우기를 희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희령(熙寧) 7년(1074) 27세 때 소식이 항주(杭州)에서 밀주(密州)로 가는 도중 양주(揚州)에 들른다는 말을 듣고 그가 묵을 절의 벽에다 미리 시 한 수를 적어놓았다. 소식은 그 시를 보고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나중에 손각이 와서 진관의 시와 사 수백 편을 보여주자 크게 감동해 “절의 벽에 시를 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군요”라고 하고는 진관과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원풍(元豊) 원년(1078) 진관은 경사(京師)에 가서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해 귀가했다. 이것이 벼슬길에 있어서 첫 번째 좌절이었는데, 그 실패로 말미암아 <엄관명(掩關銘)>을 짓고 한동안 집 안에 들어앉아 독서로 소일했다. 얼마 후 그는 소식을 경모하는 마음에 팽성(彭城)으로 가 그를 방문했다. 그때 소식은 서주의 수재(水災)를 다스리고 나서 황루(黃樓)를 지은 참이라 그에게 <황루부(黃樓賦)>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작품을 완성하고 보여주자 소식은 그를 칭찬해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진관은 당대의 대문호요 정치가였던 소식과 왕안석의 인정을 받았지만 과거 시험에 누차 낙방한 탓에 의기소침해서인지 1085년, 마소유(馬少游)라는 위인에게 공감해 자(字)를 소유(少游)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해에 진관은 뜻밖에도 과거 시험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이후 당파 싸움으로 소식이 실각됨과 동시에 항주(杭州), 침주(郴州), 횡주(橫州), 뇌주(雷州) 등지로 좌천되었다가,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돌아오는 도중에 등주(藤州)에서 죽었다.
고문(古文)과 시에 능하였고 특히 사(詞)에 뛰어났다. 시문집 ≪회해집(淮海集)≫(40권)과 그 ≪후집(後集)≫(6권), 사집(詞集)으로 ≪회해장단구(淮海長短句)≫(3권) 등이 있다.
옮긴이
송용준(宋龍準)은 1952년에 태어나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고전 시가를 전공해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군사관학교 중국어 교관, 영남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와 중국사회과학원 등에서 연구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중국 고전 시가를 강의하고 있다. ≪송시사(宋詩史)≫(공저), ≪송시선(宋詩選)≫(공편), ≪중국시율학(中國詩律學)≫, ≪도화선(桃花扇)≫(공역), ≪소순흠시 역주(蘇舜欽詩譯註)≫, ≪진관사연구(秦觀詞硏究)≫, ≪당송사사(唐宋詞史)≫(공역), ≪유영사선(柳永詞選)≫, ≪진관사선(秦觀詞選)≫, ≪고계시선(高啓詩選)≫, ≪중국어 어법 발전사≫(공역), ≪현대 중국어 문법의 제 문제≫ 등의 저·역서와 <당시 형성과정 연구>, <송시 형성과정 연구>, <북송사론 연구>, <이색(李穡) 시의 송시 수용과 그 극복>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1. 사랑의 슬픈 추억과 아픔
그리움은 봄과 함께
봄날 이별한 여인
이별의 슬픔
사사(師師)를 생각하며
못 잊을 그때의 그녀
가슴 아픈 이별
순수한 사랑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 때문에 상심하여도
고통스런 이별
고독한 밤에
그녀가 떠난 새벽에
임을 기다리는 여인
2. 좌천과 유배의 고통, 절망
서울을 떠나와서
지나간 날들이여
이별의 슬픔
나그네의 우수
유배지의 고독과 슬픔
나그네의 한
역사(驛舍)의 밤 추위
보이지 않는 그 사람
3. 흘러만 가는 세월
가을의 한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저무는 봄이 애석하여
봄날 아침의 적막과 우수
아름다웠던 지난날
진회(秦淮)를 지나가며
4. 잊을 수 없는 광경과 여인들
양주(揚州)를 회상하며
못 잊을 그녀
<조소령(調笑令)> 10수(首)와 시(詩)
-왕소군(王昭君)
-반반(盼盼)
5. 애정의 갈등
얄미운 그대
뾰로통한 그녀
6. 꿈속의 환상 세계
꿈속에 보는 신선 세계
꿈속의 환상 세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유배지의 고독과 슬픔
안개 자욱하여 누대는 사라지고
달빛 희미하여 나루터 보이지 않아
도원(桃源)을 바라보아도 찾을 길 없구나.
외로운 객사에 갇혀 봄추위를 어찌 견딜까?
두견새 소리에 석양은 저문다.
역말에 매화를 부쳐왔고
물고기에 글월을 전해왔건만
쌓이는 이 한 수없이 겹쳐진다.
침강은 본래 침산을 끼고 흘렀거늘
누구 때문에 소상으로 흘러가는가?
踏莎行
霧失樓臺, 月迷津渡, 桃源望斷無尋處. 可堪孤館閉春寒, 杜鵑聲裏斜陽暮.
驛寄梅花, 魚傳尺素, 砌成此恨無重數. 郴江幸自繞郴山, 爲誰流下瀟湘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