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다음가는 최고의 비극
북레터 [주간 인텔리겐치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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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에 런던의 연극은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르네상스의 물결을 타고 젊고 활기 넘치는 재사들이 앞다투어 새로운 형식과 주제의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위대한 극작가와 아름다운 비극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만지드라마는 ‘영국 고전 르네상스 드라마’를 출간하며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균형 있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최고의 비극을 모아 소개합니다.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비극의 최고 걸작, ≪말피의 공작부인≫
이탈리아 아말피에서 공작부인이 가문의 명을 어기고 집사와 비밀리에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가 형제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료는 가문의 명예를 저버린 공작부인을 욕망의 화신으로 묘사했습니다. 재커비언 시대를 대표하는 극작가 존 웹스터는 이 사건을 모티프로 작품을 구상하면서 공작부인을 고귀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려 냅니다. 군주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는 공작부인은 고전 비극의 영웅적인 주인공으로서 손색없는 고결함을 보여 줍니다. 존 웹스터는 ≪말피의 공작부인≫과 ≪하얀 악마≫라는 단 두 편의 비극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며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극작가로 자리매김합니다.
존 웹스터 지음, 이영주 옮김
이너 템플 법학원의 두 재사 토머스 노턴과 토머스 색빌은 크리스마스 축제 때 공연하려고 ≪브리튼 열왕기≫에서 소재를 가져다 비극 ≪고보덕≫을 완성했습니다. 형제간의 왕권 다툼, 백성들의 봉기, 유력 귀족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고보덕 왕가의 몰락 과정을 보여 주며 전제 군주의 대안으로 의회를 제시한 급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정치적·종교적 공세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왕좌를 차지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동안 정치 드라마의 무대 상연을 엄격히 금하던 때에 이런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이듬해 웨스트민스터 궁전 화이트홀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관하는 가운데 공연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무운시 형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드라마이자 고대 그리스 비극, 로마극의 영향은 물론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영향이 두루 엿보이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입니다.
토머스 노턴·토머스 색빌 지음, 허명수 옮김
‘체인즐링’은 요정이 부모 몰래 아이를 바꿔치기 한다는 아일랜드 민간 설화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토머스 미들턴과 윌리엄 로울리가 공동으로 쓴 ≪체인즐링≫은 불륜, 살인, 욕정, 쾌락을 소재로 한 자극적인 치정극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면엔 신분과 계급을 뒤집는 진보적인 정치적 견해가 숨어 있습니다. 외부의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성을 배경으로 성의 주인인 귀족 가문이 성 안의 비밀스런 음모에 의해 타락해 가는 모습은 허위에 찬 귀족 사회에 대한 폭로이며, 그 타락상에 대한 고발입니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누구라도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태도를 잃는다면 천한 인간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런 의도는 귀족 신분의 인물들을 고전 비극에서처럼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추악하고 위선적으로 그린 데서도 드러납니다. ≪체인즐링≫의 과격한 설정과 전개는 현대 독자와 관객에게 ‘마치 어제 술집에서 들은 이야기’ 같은 친숙함으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토머스 미들턴·윌리엄 로울리 지음, 조성관 옮김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 중에서 가장 흥행한 작품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 딸까지 죽음으로 내몬 비정한 유대인 바라바스를 주인공으로 팽배했던 물신주의에 대한 경계를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베니스의 상인≫을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화 속 영웅이나 왕과 같은 고귀한 인물의 추락이 아니라 욕망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비루한 인물의 비참한 몰락을 다뤘다는 점에서 동시대 다른 비극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 때문에 평자들은 이 작품을 비극으로 분류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엇은 이 작품을 두고 “끔찍하게 무겁고 심지어 잔혹하기까지 한 희극적 유머를 지닌 소극”이라 평하기도 했습니다. ≪몰타의 유대인≫은 한마디로 무한한 탐욕을 지닌 한 인간의 파멸을 다룬 새로운 종류의 비극입니다. 말로가 시도한 이런 파격은 이후 극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이희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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