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칙칙한 공장지대의 화려한 변신
조선소·곡물창고·제철소 … 수명 다한 산업유산, 박물관 미술관 쇼핑몰로 재탄생
“사일로가 전시장으로?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사일로는 열린 구조가 아니기에 상상이 불가능했다. 놀랍게도 42개의 실린더로 꽉 찬 내부를 마치 주걱으로 연두부를 뜬 것 같이 부드럽게 들어낸 것이 아닌가. 9층 높이로 둥그스름하게 잘린 콘크리트 벽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들은 전시장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건축가가 누군지 궁금했다.”
‘사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항구에 1924년에 조성된 오래된 곡물창고다. 이 책의 저자인 강동진 교수(경성대 도시공학과)는 2017년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으로 대변신한 이곳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낡고 칙칙한 공장지대가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다. 조선소와 제철소, 곡물창고 등 수명을 다한 산업유산이 박물관 미술관 쇼핑몰로 재탄생하면서 우리 삶에 밀착한 생활유산이자 지역자산으로 거듭나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의 산업지대였던 취리히 웨스트(Zurich-West)에 100여 년 역사를 가진 뢰벤브로이 맥주 양조장은 뢰벤브로이 예술단지로 변했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취리히, 민간 미술관 미그로스 현대미술관과 하우저 앤드 위스 등 총 8개소의 갤러리가 들어섰다. 제철회사의 주물공장을 개조한 풀스5(Puls5)의 크레인과 용광로 사이에는 쇼핑몰과 전시장이 들어섰다. 취리히 응용과학대학과 취리히 예술대학은 아예 폐공장 안에 자리 잡았다. 비아둑트(Viadukt)라 불리는 폐선된 철로 교각 아래에는 친환경을 키워드로 하는 각종 가게와 쉼터들이 줄지어 섰다.
최근 산업유산의 유형 중 가장 힙(hip)한 것은 조선소다. 선박 제조 및 수리공간인 드라이 도크와 넓은 작업장과 창고형 공장들이 있어 활용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조선업의 활성지역이었던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곳곳에서 조선소의 재탄생이 빈번해지고 있다. 헬싱괴르의 덴마크 국립해양박물관이 대표주자다. 스위스 시프바우 폐조선소에는 레스토랑과 공연장, 재즈클럽 등이 들어섰다.
우리에게도 이런 곳이 있다. 2018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청주관)으로 재탄생된 청주 연초제조창이다. 1999년에 문을 닫은 이곳은 2007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의 개최를 시작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 미술관으로 지정받으며 연초제조창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전시장이 되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보이는 수장고’와 가까이서 감상하며 손으로도 만질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를 탄생시켜 어둠에 갇혀 있을 수장고에 전시라는 새 생명을 불어넣었고, 담뱃잎을 말리고 저장하던 동부창고들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용되는 시민예술촌으로 변신했다.
낡은 산업유산 지대가 첨단산업과 IT산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산업유산의 재창조와 업사이클링을 지향점으로 택함으로써 창의와 융합이라는 21세기의 키워드들이 빛을 발하게 했다. 21세기를 선도하는 도시는 원래의 자기 것을 기반으로 혁신에 힘쓰는 도시다. 리사이클링을 넘어 업사이클링으로 나아가며, 숨어 있던 가치를 드러내고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영향력을 경험하는 도시다. 이런 도시 속에서의 산업유산은 새것으로 대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창의적인 자기 혁신 속에서 또 다른 미래를 향한 잠재력의 원천이다.
이 책은 우리 삶과 직·간접적으로 밀착되고 연계된 ‘생활유산’이자 ‘지역자산’인 산업유산의 보존과 변신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산업유산의 가치와 잠재력을 확인한다. 1∼3장에서는 산업유산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된 ‘보존’, ‘협력’, ‘방치’의 이야기를 다룬다. 4∼5장에서는 ‘공간’과 ‘변신’을 주제로 산업유산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본다. 6∼8장에서는 산업유산이 갖추어야 할 콘텐츠로 ‘전시’, ‘공연’, ‘축제’ 등에 주목한다. 9장과 10장에서는 ‘기업’과 ‘시민’을 소재로 산업유산의 작동 요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다.
200자평
낡고 칙칙한 공장지대가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다. 조선소와 제철소, 곡물창고 등 수명을 다한 산업유산이 박물관 미술관 쇼핑몰로 재탄생하면서 우리 삶에 밀착한 생활유산이자 지역자산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들은 변화가 중지된 화석화된 문화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진행형 유산’이다. 산업유산은 끊임없이 변한다. 쇠퇴하여 폐허로 변하기도 하고, 알찬 기획이나 투자로 환골탈태하기도 한다. 원형 그대로 동결보존 해야 하는 사적급 산업유산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대부분은 개조, 수선, 수복 등의 리모델링 기법이 적용된 다양한 변신이 시행된다.
지은이
강동진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역사환경 보전에 중심을 둔 도시설계를 배웠다. 2001년에 부산에 정착해 산업유산, 근대유산, 세계유산 등을 주제로 하는 각종 문화 운동과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ICOMOS 한국위원회 이사,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 등을 역임하고 있고, 지역에서 다양한 자문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부산학: 거의 모든 부산』(공저, 2021), 『녹슮에서 빤짝임으로: 경북산업유산이야기』(2019), 『오래된 도시, 새로운 도시디자인』(2018), 『부산을 알다』(공저, 2015), 『황금빛 양동마을, 그 풍경 속에 담긴 삶』(2012), 『빨간벽돌창고와 노란전차: 산업유산으로 다시 살린 일본 이야기』(2008) 등이 있으며, “근대산업경관으로서 천일염전의 현재적 가치와 보전방안”(2021), “노면전차, 19세기 대중교통수단의 진화와 발전”(2021), “Sustainable Conservation of a Difficult Heritage in South Korea: Mapping the Conservation Resources of Sorok-do Island”(2020), “소록도 100년의 변천과정과 특성 도출”(2018), “근대관련 세계유산의 등재 경향 분석”(2017), “지속가능한 다크 투어리즘의 개념 정의와 경향 분석”(2017) 외 6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차례
산업유산, 미래를 향한 잠재력의 원천
01 산업유산과 보존
02 산업유산과 협력
03 산업유산과 방치
04 산업유산과 공간
05 산업유산과 변신
06 산업유산과 전시
07 산업유산과 공연
08 산업유산과 축제
09 산업유산과 기업
10 산업유산과 시민
책속으로
폐산업시설이 산업유산으로 인정받으려면 철거나 파괴의 논리를 능가하는 특별한 가치가 규명되어야 한다. 그 가치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산업사적 관점에서 해당 산업과 시설에 최초, 최대, 최고 등의 말을 붙일 수 있거나 외견상 인지되는 물성의 위상이 탁월해야 한다.
_“01 산업유산과 보존” 중에서
폐산업시설은 오염과 낡음을 이유로 쉽게 포기의 대상이 된다. 산업유산에서는 방치가 필요할 때가 있다. 유산을 다룰 지혜와 기술, 그리고 재원의 부족함이 인정될 때다. 여기에서 방치는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며 그때까지 그 어떤 변화도 허용치 않겠다는 포부와 다짐의 뜻도 가진다. 이론적으로 ‘계획적 방치’라고 부르는데, 기다림의 시간 중 산업화로 훼손된 여러 상흔이 회복되어 상상치 못했던 유산으로 빛을 발하기도 한다.
_“03 산업유산과 방치” 중에서
레트로든 뉴트로든 간에 산업유산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변신의 개념은 재활용으로 번역되는 ‘리유즈(reuse)’다. 재활용이 제대로 이루어진 산업유산은 유산 자체의 가치 증진과 함께 해당 지역의 경제문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이것은 산업유산을 단순히 퇴보한 산업의 결과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지역성 강화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장치물로 보아야 함을 암시한다.
_“05 산업유산과 변신” 중에서
“사일로가 전시장으로?”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사일로는 열린 구조가 아니기에 상상이 불가능했다. 놀랍게도 42개의 실린더로 꽉 찬 내부를 마치 주걱으로 연두부를 뜬 것 같이 부드럽게 들어낸 것이 아닌가. 9층 높이로 둥그스름하게 잘린 콘크리트 벽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들은 전시장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건축가가 누군지 궁금했다.
_“06 산업유산과 전시” 중에서
산업유산 중에서 본격적으로 축제의 장으로 소환된 최초 사례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본전시장인 아르세날레(Arsenals)다. 이곳은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대를 꽃 피웠던 베니스공화국의 조선소 및 병기창으로 사용되었다. 비엔날레의 역사는 1895년에 시작되었지만 아르세날레가 비엔날레의 장소로 사용된 것은 1980년부터다.
_“08 산업유산과 축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