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매춘업소에서의 사흘 밤낮
1905년 ‘피의 일요일’을 주동한 가폰 신부(Г. Гапон, 1870∼1906)의 살해를 주도한 사회혁명당원 루텐베르크(П. М. Рутенберг, 1879∼1942)가 안드레예프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 준다. “거사를 앞둔 한 혁명가가 형사들에게 쫓기다 매춘업소에 몸을 숨기려 찾아든다. 매춘을 하는 아가씨는 손님으로 온 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나 영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부드럽게 보살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둔감하고 현학적인 영웅은 그녀의 마음에 도덕적 설교로 답한다. 마음이 상한 그녀가 그의 뺨을 때린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여자의 손에 키스한다.” 루텐부르크의 이 이야기가 ≪어둠≫의 기본 줄거리가 되었다. 소설은 단 사흘간의 일을 묘사하며 급격하게 전개되지만 주인공의 심경 묘사가 장면 장면 눈앞에 펼쳐지듯 묘사되어 독자들을 소설의 세계 속으로 흡입하며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천재적이거나 혐오스럽거나
1900년대 초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에는 반동 정치가 시작되며 사회 전반에 배신과 밀고가 만연해 있었다. 작가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당시의 상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삶을 모두 바쳤던 이상을 포기하고 어둠 속 침잠을 선택하는 이 책의 주인공에게 이런 작가의 고뇌가 잘 투영되어 있다. 출간되자마자 각계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문제작으로 떠올랐다. 상징주의 시인 블로크(А. Блок, 1880∼1921)가 안드레예프를 천재 작가라 칭하며, “그의 작품 중 가장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평하는가 하며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누었던 고리키는 이 작품을 두고 루텐부르크가 겪은 실제 사건의 의미와 형식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했음을 지적하며 “혐오스럽고 더러운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이제 이 작품을 새롭게 평가할 시간이다. 국내 처음으로 소개한다.
200자평
러시아 대문호 고리키의 극찬을 받으며 등단한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짧은 소설이다. 이틀 뒤 거사를 앞둔 한 혁명가가 경찰을 피해 어느 매춘업소에 찾아 든다. 이곳에서 매춘부 류바를 만난 주인공은 그간의 신념을 꺾어 버리고 거사를 포기한다. 단 사흘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동안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작가의 고뇌가 그대로 녹아 있는 문제작이다.
지은이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1871년 러시아 중부 도시 오룔에서 태어났다. 지독히도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안드레예프는 이 시절의 기억을 훗날 작품에 녹여 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생활고가 가중되자 그림을 팔고 개인 교습을 해 주면서 생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비싼 수업료를 낼 형편이 못 되어 제적당하고 만다. 신문과 잡지의 법률 담당 통신원으로 일하던 1892년, 단편 <가난과 부>를 최초로 발표하고, 이어 1898년 단편 <바르가모트와 가라시카>를 발표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빈곤에 시달리며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 하급관리, 기술자, 부랑자, 거지, 도둑, 창녀의 삶을 그리고 있다. 막심 고리키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안드레예프의 재능을 알아본 인물이다. 고리키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안드레예프가 문학그룹인 지식파(派)에 가입하고 작품 ≪침묵≫(1901)으로 등단하도록 돕는다. 1901년에 출판된 첫 단편집에 실린 단편 <옛날 옛적에>가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는다. 잇달아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는데, 1902년에 발표한 <심연>, <안개 속에서>는 대담한 성(性) 묘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논란 속에서도 안드레예프는 자신만의 독특하면서도 재능 넘치는 작품들을 여럿 발표하며 부와 명성을 쌓아 나간다. 또 극작가로서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대표작으로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스토리친 교수>, <생각>, <따귀 맞는 이>, <개의 왈츠> 등이 있다.
안드레예프는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의 실패를 모든 사회사상의 실패로 인식했다. 그는 인간과 사회의 조화란 불가능하며, 애초부터 세상은 숙명적으로 조화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1917년 10월 혁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그해 핀란드로 망명한다. 그러나 1919년 9월 12일 핀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길지 않았던 삶을 타향에서 마감한다. 1930년에 판금 작가로 분류된 이후 안드레예프의 작품은 소련에서 절판되었고, 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 들어서야 복권되고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때야 마침내 그의 유해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안장되었다.
옮긴이
이수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하고 제1호 러시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막심 고리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이후 건국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동화·한국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러시아 문학, 아동 판타지와 영화, 그림책 등이다. 막심 고리키, 아동 문학, 그림책 등에 관한 논문이 있으며, 저서로 ≪판타지 문학의 비밀≫, ≪러시아 문학 감상≫, 역서로 ≪시의적절치 않은 생각들 : 혁명과 문화. 1917년 소고≫, ≪시의적절치 않은 생각들 : 혁명과 문화에 대한 소고≫, ≪마부≫, ≪곱사등이 망아지≫, ≪가룟 유다≫, ≪붉은 웃음≫, ≪인간의 삶≫, ≪사제 바실리 피베이스키의 삶≫, ≪러시아 현대 소설 선집 1≫ 등이 있다.
차례
어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불쌍한 류바.”
“그래서?”
“손을 줘.”
아가씨를 한 인간으로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다소 강조하며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입술에 갖다 댔다.
“나한테 하는 거야?”
“그래. 류바, 너한테.”
감사하다는 듯이 아가씨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꺼져 버려! 여기서 꺼져, 쓰레기 같은 놈!”
그는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나가! 여기서 나가. 꺼져 버려.”
그녀는 말없이 성큼성큼 방 안을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 흰 셔츠를 가져다 마치 가장 더러운 걸레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겨운 표정으로 그에게 내던졌다. 말없이 거만하게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는 침착하고 천천히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격렬하게 비명을 지르며 류바가 그의 말끔하게 면도된 뺨을 세게 때렸다. 셔츠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