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한문학을 통해 망국을 극복하려 하다
하겸진의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1870년 진주(晋州) 사곡리(士谷里)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해 위정척사 운동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후에 회봉은 파리 장서 사건과 2차 유림단 사건에 관여해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도(道)를 부지하고 지켜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망국이라는 시대적 상황 앞에서 회봉은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을 항일과 저술 활동, 후학 양성으로 나타내었으며, 이러한 그의 의식들은 문학에 그대로 녹아들어 한문학의 종장을 갈무리하는 문학적 결정으로 승화되었다.
조선의 선비, 도연명과 화운하다
화도시(和陶詩)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송대 동파 소식이 처음 시도한 시 형식이다. 소식이 화도시를 처음 지은 이후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문인들이 화도시를 창작했으며, 한시의 다양한 형식 속에서 화도시라는 한 영역을 구축하고 그 창작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고려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의고화도(擬古和陶)> 4수에서 시작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상촌(象村) 신흠(申欽),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극원(屐園) 이만수(李晩秀) 등이 화도시를 썼으며, 조선에 들어서는 이황, 김종직, 송시열 등도 그 창작 대열에 합류했다. 이 전통은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에 의해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화도시 120수가 지어졌다.
화도시를 통한 하겸진과 소식의 만남
소식은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고, 그의 지조 있고 청렴한 ‘고궁절(固窮節)’의 삶을 동경했다. 하겸진은 <화도시> 서문에서 자신도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며, 소식이 도연명의 시를 화운한 것을 따라 보고자 화도시를 짓게 되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지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화도시’로 만난 하겸진과 소식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가감 없이 담아내었다. ‘화도시’는 이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 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200자평
한문학의 종식기, 현대 한문학의 불을 밝히다
조선 후기에 태어나 대한 제국기, 애국 계몽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회봉 하겸진. 그는 1700여 수에 가까운 한시를 남겼으며,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시화집이라 할 수 있는 ≪동시화(東詩話)≫를 저술했고 화도시, 수미음(首尾吟), 집자시(集字詩), 회문시(回文詩)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지어 일제 강점기 종식되어 가는 한문학의 장을 풍성하게 했다. 그가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화도시를 모았다. 일제 강점기, 꺼지지 않은 우리 한문학의 자취를 살필 수 있다.
지은이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1870∼1946)은 1870년 진주(晋州)의 사곡리(士谷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적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64∼1919)의 고제(高弟)이며, 남명이 ‘설중한매(雪中寒梅)’라고 기상을 격찬했던 각재(覺齋) 하항(河沆, 1538∼1590)의 문인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1553∼1612)의 11대손이다. 학맥으로는 퇴계의 학풍을 계승한 고제이며, 가학으로는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적전이라는 점은 회봉의 학문적 성격과 위상을 대변한다.
그는 조선과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한 다음 해인 1946년까지 역사상 가장 큰 격변기를 유학자, 독립운동가, 문학가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의 생은 낙수재(落水齋)에서 보낸 학문 수학기(1870∼1917)와 귀강 정사(龜岡精舍)에서 보낸 애국 계몽기(1917∼1930), 덕곡 서당(德谷書堂)에서 보낸 창작 저술기(1931∼1946)로 나눌 수 있다.
학문 수학기에는 낙수재를 중심으로 향리의 동학(同學) 및 집안의 자제들과 함께 학업에 매진하고, 1896년 27세 되는 해인 가을에 거창의 다전(茶田)에서 면우를 알현하고 사사했으며, 후산(后山) 허유(許愈, 1833∼1904),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1845∼1908),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 1870∼1952)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했다.
귀강 정사에서의 애국 계몽기에는 1919년 파리 장서에 서명해 진주와 성주를 오가며 옥중 생활을 했고, 1921년에는 <국성론>을 지어 유학의 가치인 ‘예의(禮義)’를 ‘국시(國是)’로 국민 의식을 고취했다. 1926년에는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하고자 국내에 잠입한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을 도운 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을지문덕·김유신·강감찬·이순신을 대상으로 <명장열전(名將列傳)>, 남이(南怡)와 김덕령(金德齡)을 대상으로 <용장열전(勇將列傳)>을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덕곡 서당의 창작 저술기에는 1934년 <화도시> 120수를 완성하고, 다시 1937년 <수미음> 134수를 완성했다. <화도시>는 망국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갈등과 고뇌의 산물로, 소동파가 그랬던 것처럼 도연명의 시에 모두 화운함으로써 자신의 시재(詩才)도 나타내고, 격변 속에서도 꼿꼿한 절개를 지켜 갈 것임을 밝힌 시다. 그는 또 우리나라 시화사(詩話史)의 마지막 비평집인 ≪동시화(東詩話)≫를 저술했고, 1943년에는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학안인 ≪동유학안(東儒學案)≫을 저술했다. 1945년 8월 노쇠해진 몸으로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고, 다음 해인 1946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이영숙은 경상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에서 <옥계 노진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회봉 하겸진의 화도시와 수미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학들과 함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1∼5를 공역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토대 연구 사업인 ‘금강산 유람록 번역 및 주해’ 사업에 전임 연구원으로 참여해 ≪금강산 유람록≫ 1∼10을 번역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의 역사 인물 문집 100선 사업에 참여해 ≪북애 선생 문집≫을 번역했다.
19∼20세기 한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회봉 하겸진의 작품에 대한 번역과 연구는 그 관심의 방향이다. 연구 논문으로 <경로를 통한 금강산 유람의 변천 고찰>과 <17세기 이전 금강산 유람의 경로 및 특징> 등 금강산 관련 논문과 근대 전환기 영남 지역의 유림에 대한 연구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영물시(詠物詩) 일고찰(一考察)>, <모계(某溪) 김홍락(金鴻洛)의 한시 창작 양상과 함의(含意)> 등이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공동 연구 과제로 진행한 연구 논문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의 현실 인식과 단성 농민 항쟁>,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현실 대응 양상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고문헌과 문집에 전하는 문학을 연구하며,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정서는 시공간을 초월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과거의 인물에 대한 이해가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되고, 현재를 사는 우리의 고민을 해결하는 해법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차례
화도시서
<머문 구름>에 화운하다 4수
<사계절의 운행>에 화운하다 4수
<방 참군에게 답한 시>에 화운하다 5수
<농사를 권하며>에 화운하다 6수
<육체가 그림자에게 주다>에 화운하다
<그림자가 육체에 답하다>에 화운하다
<신석>에 화운하다
<중구일에 한가로이 있으며>에 화운하다
<전원의 집으로 돌아오다>에 화운하다
<이사>에 화운하다 2수
<옛집으로 돌아오다>에 화운하다
<기유년 9월 9일>에 화운하다
<술을 마시다>에 화운하다 20수
<술을 끊다>에 화운하다
<고시를 본뜨다>에 화운하다
<잡시>에 화운하다 11수
<가난한 선비를 읊다>에 화운하다 7수
<두 소씨를 읊은 시>에 화운하다
<삼량을 읊다>에 화운하다
<형가를 읊다>에 화운하다
<산해경을 읽고>에 화운하다 13수
<도화원>에 화운하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농사를 권하며>에 화운하다 서문
우리나라는 예부터 농국(農國)으로 불렸는데, 국운이 바뀌고 난 뒤에는 이른바 농사를 장려한다고 하는 것이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더구나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날로 많아져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고 기아에 허덕이다 떠돌며 해외에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몇천, 몇백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이 시에 화운해 이런 상황을 애도한다.
怳與我娛吾邦古稱農國 自革運之後 所謂奬勵農作者 適所以撓之而已 加以徵求日煩 民不矧子高標聊生 飢餓轉徙 以糊口於海外者 歲歲不知幾千百人 余爲和此詩以哀之
<농사를 권하며>에 화운하다 제5수
큰 쥐가 밭에 난 싹을 먹어
어찌 우리를 궁핍하게 하는가
항아리엔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태평함을 어찌 바라겠나
밖에 나가면 입에 풀칠이라도 하니
멀어도 이르지 못할 곳이 없네
잠깐이라도 연명할 것만 생각하니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나
和勸農 六首
碩鼠食苗 胡使我匱
甔石無儲 砥京奚冀
糊口于外 無遠不至
思延須臾 寧不內媿
<육체가 그림자에게 주다>에 화운하다
나 살면서 얼굴도 못생긴 데다
의관 또한 유행과 어긋났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지목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 떠나갔네
그대는 어찌 내게 꼭 붙어서
항상 이처럼 행동하는가
어둑한 밤에 보이지 않다가도
달이 뜨면 약속한 듯 나타나네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자 하나니
차마 멀리할 생각 두지 않았네
기쁜 일 있으면 함께 기쁘게 웃고
근심이 닥치면 같이 눈물 흘렸네
다만 한낮이나 해가 기울 땐
길었다 짧았다 의심스럽네
그대가 어찌 진짜 내가 아니랴
그대는 한마디 말이나 해 주게
和形贈影
我生貌不揚 衣冠亦乖時
所至人指目 望望皆去之
子胡苦相守 動靜恒如玆
夜陰或不見 月出如有期
一二二而一 不忍有遐思
喜至俱欣笑 憂來共悽洏
獨於日中昃 長矮或乃疑
子豈非眞我 請子下一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