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중국 최초의 장편 일기체 기행문
≪입촉기(入蜀記)≫는 육유가 45세의 나이로 기주통판(夔州通判)에 임명되어 이듬해인 1170년 5월 산음(山陰)에서 출발해 10월 27일 기주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적은 글이다. ≪입촉기≫ 이전에도 기행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이 짤막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육유는 구양수가 이릉현령으로 부임하는 여정을 기록한 ≪우역지(于役志)≫의 문체를 계승하되, 단편인 ≪우역지≫와는 달리 장편 일기체의 형식으로 풍부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주관적인 의론을 때로 결합해 나타내었다. 이로 인해 송대의 산문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 범성대(范成大)의 ≪오선록(吳船錄)≫, 명대(明代) 서하객(徐霞客)의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 등 뛰어난 기행 문학의 전통을 낳았다.
멀고도 험난한 입촉도
일찍이 이백은 촉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험난하기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고 노래했다. 그만큼 당시 중국의 중심지였던 강남에서 촉 지역까지는 거리도 먼 데다, 지형이 험난하고 문물도 달라 하늘처럼 멀게 느껴지는 길이었다. 육유가 고향인 산음, 즉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에서 출발해 촉 지역인 기주, 즉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 이르기까지는 자그마치 157일이 걸렸는데, 그중 단 나흘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기로 여정을 기록했다. 이동 경로는 지금 중국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저장성에서부터 쓰촨성까지, 총 6개 성(省), 1개 시(市)를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정이다. 그것도 모두 육로가 아니라 배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이었다.
문학과 역사, 지리, 문화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기록
≪입촉기≫의 가장 특별한 점은 단순하게 자연을 노래하고 명승지를 찾는 여행기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입촉기≫는 아름다운 명승고적에 대한 묘사와 감탄뿐 아니라 여행하는 지역의 지리 풍토, 지리 환경, 역사적 고찰 및 평가, 문화 풍속 등을 비롯해 역사적, 문화적 내용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는 육유가 본래 글에 뛰어나 산천과 풍토에 대해서도 서술이 매우 우아하고 간결하며, 고적(古跡)을 고정(考訂)하는 데에도 특히 주의를 기울였는데,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처럼 풍경에 빠져 자질구레한 것들을 기재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입촉기≫를 높이 평가했다. 육유는 단순히 자연 경치를 보고 지나가지 않고 강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각 지역의 풍토나 역사 유물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평가해 자연과 인문(人文)에 관한 관심을 결합했으며, 여행 중에 접한 현재의 경물을 보면서 옛 시인의 작품을 떠올려 고(古)와 금(今)을 결합하면서 정신적으로 교류하고 공감했다. ≪입촉기≫는 양쯔강 유역의 자연 지리와 인문 지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남송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가치가 있다.
≪입촉기≫는 처음으로 국내에 완역 출간된다. 경북대 이치수 명예교수와 김예주 교수는 첸중롄(錢仲聯), 마야중(馬亞中) 주편(主編)의 ≪육유전집교주(陸游全集校注)≫[저장구지출판사(浙江古籍出版社), 2011] 중의 ≪입촉기교주(入蜀記校注)≫본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본과 ≪사고전서(四庫全書)≫본, 장방(蔣方)의 ≪입촉기교주(入蜀記校注)≫)[후베이런민출판사(湖北人民出版社), 2004] 등 여러 책을 두루 참고해 정확하고도 읽기 쉬운 문장으로 번역했다. 중요한 인명이나 지명, 역사적 사실 등에는 상세히 주석을 달고 지도와 여정표를 통해 육유가 거쳐 간 여정을 독자들이 눈으로 살필 수 있도록 했다.
200자평
중국을 가로지른 157일간의 기록
≪입촉기(入蜀記)≫는 남송의 대시인 육유가 고향 산음(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에서 부임지인 기주(지금의 쓰촨성 지역)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여행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기행록으로, 중국 최초의 장편 일기체 여행기다. 건도 6년(1170) 5월 18일 산음을 출발해서부터 기주에 도착한 10월 27일까지 총 157일간, 지금의 중국 행정 구역으로 보면 6개 성(省) 1개 시(市)를 거쳐 간 장대한 여행의 기록이다. 육유는 특유의 쉽고도 세련된 문체로 각 지역의 지리와 문화, 인물 등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물론, 각 지역과 관련한 문학과 역사 고적을 논평했다. 험하고 기이한 지리 환경으로 유명한 촉 지역으로 향하는 이 여행기는 육유 특유의 쉽고도 세련된 문체로 각 지역의 지리와 문화, 인물 등을 상세히 기록해 마치 그 경치와 사람들을 눈으로 보는 듯 실감 날 뿐 아니라, 그 지역과 관련한 시문학과 역사 고적을 자세히 고찰하고 논평해 학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치수 교수와 김예주 교수가 자세한 주석, 해설과 함께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지은이
육유(陸游, 1125∼1210)는 중국 송대(宋代)의 대표적인 문학가다. 그는 남송(南宋) 시인으로, 일반적으로 북송(北宋)의 소식(蘇軾, 1037∼1101), 황정견(黃庭堅, 1045∼1105) 등과 더불어 송대의 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인(詞人)으로서도 유명하며, 산문(散文)에서도 탁월한 성취를 거두었다. 평생에 걸쳐 금나라의 남침 위협이 늘 존재하는 현실을 통탄하며 꿋꿋이 대항해 잃어버린 중원 땅의 수복을 주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해 항상 시문(詩文)을 통해 비분한 마음을 나타내었기에 ‘애국시인’이라 불린다. 중국 고전시 역사상 가장 많은 시를 남겨 현재 9217수의 시가 전하며 양만리(楊萬里)·범성대(范成大)·우무(尤袤)와 더불어 ‘중흥 사대가(中興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이들 중에서도 제일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동시에 산문에서도 나름대로 괄목할 성취를 거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육유의 산문은 언어가 평이하고 문필이 정련되며 내용이 개성적이고 다채로운 특색을 가지고 있다. 저작으로 ≪검남시고(劍南詩稿)≫, ≪위남문집(渭南文集)≫, ≪방옹사(放翁詞)≫, ≪입촉기(入蜀記)≫, ≪남당서(南唐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등이 전한다.
옮긴이
이치수는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타이완(臺灣) 국립타이완대학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이며, 영남중국어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중국 고전 문학과 문화, 수사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시(詩)·사(詞)·소설·문학 비평·수사법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와 역서로 ≪송대 시학(宋代 詩學)≫(역락, 2020), ≪양만리 시선(楊萬里詩選)≫(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신기질 사선(辛棄疾詞選)≫(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진여의 시선(陳與義詩選)≫(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육유 사선(陸游詞選)≫(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조자건집(曹子建集)≫(소명, 2010, 공역), ≪도연명 전집(陶淵明全集)≫(문학과지성사, 2005), ≪송시사(宋詩史)≫(역락, 2004, 공저), ≪중국 시와 시인−송대편(宋代篇)≫(역락, 2004, 공저), ≪육유 시선(陸游詩選)≫(문이재, 2002), ≪중국 유맹사(中國流氓史)≫(아카넷, 2001), ≪육유 시 연구(陸游詩硏究)≫(臺灣, 文史哲出版社, 1991) 등이 있다. 논문으로 <진후산 시 연구(陳後山詩硏究)>, <방옹 시 연구(放翁詩硏究)−광의식(狂意識)을 중심(中心)으로>, <서현 연보 연구(徐鉉年譜硏究)>, <중국 고전 시가(中國古典詩歌)에 나타난 협(俠)>, <중국 고전 시체(中國古典詩體) 중 육언 절구(六言絶句)의 생성, 발전과 특색 연구>, <당대(唐代) 시학(詩學)의 전개에 있어서 ‘시법(詩法)’ 문제 연구>, <송대(宋代) 시학(詩學)의 발전과 당송시(唐宋詩) 우열 논쟁(優劣論爭) 연구>, <중국(中國) 무협 소설(武俠小說)의 번역 현황과 그 영향>, <<섭은랑(聶隱娘)>에 관하여>, <중한(中韓) 고전(古典) 시론(詩論)의 상관성(相關性) 연구>, <송대(宋代) 시학(詩學) 평담론(平淡論)의 성행(盛行) 배경과 특색 연구> 등 다수가 있다. 한국중어중문학회 학술상(2001)과 우수논문상(2015, 2019)을 수상했으며, ≪송시사(宋詩史)≫가 2005년, ≪송대 시학(宋代詩學)≫이 2020년에 대한민국 학술원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김예주는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치수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문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금오공과대학교 교양교직과정부 소속 강의 교수다.
중국 고전 문학 및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운문과 문학 비평에 관심이 많아 학위 논문도 관련 주제를 연구해 <호응린(胡應麟) ≪시수(詩藪)≫의 시론 연구(詩論硏究)>라는 제목으로 석사 학위를, <남송 초기 시단 연구(南宋初期詩壇硏究)>라는 제목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외에 논문으로 <서부(徐俯)의 시론(詩論)과 시 세계>, <감자(嵌字) 잡체시(雜體詩) 소고(小考)>, <남송(南宋)의 증기(曾幾) 차시(茶詩) 고찰(考察)>, <반중시(盤中詩)와 회문시(回文詩) 비교 분석>이 있다. 그리고 중국어 교육 방면에도 관심이 있어서 ≪한눈에 보는 중국어 관용패턴≫(학고방, 2019)을 출간했다.
차례
입촉기 권1
입촉기 권2
입촉기 권3
입촉기 권4
입촉기 권5
입촉기 권6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8월 14일
새벽에 비가 왔다.
작은 돌산을 지나 꼭대기에서 직경으로 반쯤 가면 여요강(餘姚江) 근처의 촉산(蜀山)과 매우 닮았다. 큰 강물에 배가 운항하는 가운데 우연히 뗏목을 하나 만났는데, 넓이가 10여 장(丈)이 되고, 길이가 50여 장이 된다. 뗏목 위에는 30∼40호의 가구가 있는데, 부인들과 아이들, 닭과 개, 절구 방아를 모두 갖추고 있고, 종횡으로 나 있는 작은 길로 서로 왕래하며, 신사(神祠)도 있었는데, 이것은 평소에 보지 못한 것이다. 뱃사람이 “이것은 오히려 그중에서 작은 것일 따름이고, 큰 것은 뗏목 위에 흙을 깔고 채소를 가꾸거나, 술집을 하기도 하는데, 모두 강의 항구로 다시 들어갈 수 없어 큰 강을 돌아다닐 뿐입니다”라고 했다.
이날, 역풍에 배를 끌고 가서 동틀 녘부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겨우 15∼16리를 갔다. 유관기(劉官磯) 옆에 정박했는데 기주(蘄州)와의 경계에 있다. 아이들이 강기슭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며 “오솔길을 찾으면 산 뒤로 통하는데, 피호(陂湖)에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마름이 매우 풍부하며, 호수를 끼고 목부용(木芙蓉)이 많아요”라고 했다.
해가 질 무렵에 갈대로 엮은 울타리에 띠로 이은 초가집이 몇몇 보이고, 그윽한 정취가 완연하며 사람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큰 배가 있어 사려고 했으나 사지 못했다. 호수 가운데 작은 배에서 마름을 캐는 자가 있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다가가 불러 보려 했으나 마침 길가에 놓인 덫을 보고는 호랑이나 늑대가 있을까 걱정이 되어 결국에는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이른바 유관기는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 161∼223)가 오(吳)에 들어갈 때, 일찍이 이곳에 배를 댄 곳이라 전한다.
저녁에 큰 자라가 물속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8월 18일
아침 먹는 시간에 비로소 배가 출발해 오후 늦게 황주(黃州)에 도착했다. 황주는 특히 궁벽하고 낙후해 사건도 많지 않으니, 두목(杜牧)이 “평생에 잠을 가장 충분히 자는 곳, 운몽택의 남쪽 고을이라네(平生睡足處, 雲夢澤南州)”라고 말한 곳이다. 그러나 두목과 왕우칭(王禹偁)이 황주로 가서 각기 자사(刺史)와 지주(知州)를 지내고, 또 동파 선생과 장뇌가 폄적되어 여기에 살면서부터 마침내 유명한 곳이 되었다.
임고정(臨皋亭)에 정박하니, 일찍이 동파 선생이 거주하던 곳이고, 진관(秦觀)에게 보낸 편지에 “문밖에 몇 걸음 걸어가면 바로 큰 강(門外數步即大江)”이라고 쓴 곳이 바로 여기다. 강 표면에 물안개가 아득하고 대기는 넓게 탁 트였다. 지주 우조봉랑(右朝奉郎) 직비각(直祕閣) 양유의(楊由義)와 통판(通判) 우봉의랑(右奉議郎) 진소복(陳紹復)을 만났다. 지주의 관청 소재지는 아주 협소해 관아에는 몇 명의 손님만이 겨우 용납되고, 통판이 거주하는 곳은 조금 낫다.
저녁에는 배를 죽원보(竹園步)로 옮기니, 대체로 언덕 주변에는 파도가 심해서 저녁에는 배를 댈 수 없다. 황주와 번구(樊口)는 바로 마주 보고 있는데, 동파가 말한 “무창의 번구는 매우 조용한 곳(武昌樊口幽絕處)”이다.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가 동오(東吳) 노숙(魯肅)의 책략을 받아들여, 당양(當陽)에서 악현(鄂縣)의 번구(樊口)로 진군해 주둔했는데 바로 여기다.
8월 21일
쌍유협(雙柳夾)을 지나 고개 돌려 강 위를 바라보니, 먼 산이 중첩되어 심원하고도 수려하다. 황주를 떠나면서부터는 배가 비록 강의 항구 사이로 다니고 있으나, 역시 모두 넓고 아득하다. 지형이 점점 높아지니 콩과 좁쌀, 메밀 같은 종류를 많이 심는다. 저녁에 양라보(楊羅洑)에 배를 정박하니, 큰 제방에는 키 큰 버드나무가 있고 거주민들은 빽빽하게 모여 살며, 생선이 흙만큼이나 싸서 100전으로 20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게다가 모두 큰 생선이다. 작은 생선을 찾아서 고양이에게 먹이려고 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10월 8일
새벽 3시에서 5시가 다 되어 갈 무렵 배가 출발해 하뢰관(下牢關)을 지났다. 장강의 양안에는 수천수만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어떤 것은 경쟁하듯 올라와 있고, 어떤 것은 홀로 우뚝 솟아 있고, 어떤 것은 무너져 내리누르는 것 같고, 어떤 것은 위태해 곧 떨어질 것 같고, 어떤 것은 횡으로 갈라졌고, 어떤 것은 직각으로 쪼개졌고, 돌출된 것도 있고, 팬 것도 있고, 틈이 벌어진 것도 있고, 기괴함이 일일이 다 형용할 수 없다. 초겨울이지만 초목이 온통 초록빛이어서 시들지 않았고, 서쪽으로 바라보면 중첩된 산이 궁궐 같으며, 강물이 그 사이를 흘러가니 하뢰계(下牢溪)라고 한다. 구양수의 <하뢰진(下牢津)> 시에 “협곡으로 접어드니 강물은 점차 굽이지고 여울을 돌아드니 산이 더욱 더 많아지네”라고 했는데, 바로 이곳이다.
배를 매어 놓고 아이들 및 요증(了證) 스님과 삼유동(三游洞)에 올랐는데, 돌이 많은 비탈길을 밟으며 2리를 걸어가니 험한 곳은 발을 디딜 수조차 없다. 삼유동은 세 칸 방의 크기와 같고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구멍이 있으나 음험하고 험준해 더욱 무섭다. 산 중턱을 돌아 몸을 숙이며 암석에서 내려오는데, 삼유동 앞에 와서 간신히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래에는 계담(溪潭)이 있고, 석벽의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며 물소리가 공포스럽다. 또 하나의 구멍은 뒤에 벽이 있어 거주가 가능하다. 종유석(鍾乳石)이 오랜 세월 동안 땅에 드리워 기둥 같은데, 마침 구멍의 문과 딱 마주하고 있다. 위에는 “황대림(黃大臨)과 동생 황정견(黃庭堅)이 신대방[辛大方, 자(字)는 굉자(紘子)]과 함께 소성(紹聖) 2년 3월 신해(辛亥)에 와서 놀다”라고 새겨져 있다. 옆의 석벽에는 “경우(景祐) 4년 7월 10일 이릉(夷陵)의 구양영숙(歐陽永叔)”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뒤에 한 글자가 빠졌다. 또 “판관정(判官丁)”이라 했는데, 뒤에 또 몇 개의 글자가 빠져 있다. ‘정(丁)’은 정보신(丁寶臣)을 가리키는데 자는 원진(元珍)이다. 지금 ‘정’ 글자 뒤의 두 글자는 또 어렴풋이 볼 수 있지만, ‘원진’이라는 글자와는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또 구양수는 ‘이릉’이라고만 했지, 현령이라 하지는 않았다. 동굴 밖 계곡에는 또 무너진 바위가 땅에 엎어져 있는데, 거기에는 “황정견과 동생 황숙향(黃叔向), 아들 황상(黃相)과 조카 황경(黃檠), 도사 당리(唐履)가 함께 와서 노니는데, 신해의 옛글을 보니 꿈속의 일만 같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 3월 경인(庚寅)”이라 새겨져 있다. 생각건대, 황정견이 처음 검남(黔南)으로 좌천되어 소성 2년에 이곳을 지나갔는데, 그해는 을해(乙亥)이니, 지금 ‘신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석패협(石牌峽)에 정박했다. 석굴 안에 있는 돌은 마치 노인이 낚싯대를 들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인데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10월 14일
역관(驛館)에 머물렀다. 저녁에 작은 배로 강남을 건너고, 산에 올라 강독남묘(江瀆南廟)에 갔다. 새로 수리를 했으나 아직 다 끝내진 못했고, 비석이 하나 있는데 비문은 진사과에 합격한 증화단(曾華旦)이 지은 것이다. 비석에 적혀 있기를, 산이 무너지고 돌이 막히면서 이 여울이 생겨났고, 망가지는 배가 셀 수 없이 많아서 10월부터 2월까지 배가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귀주(歸州)의 지주(知州)인 상서도관원외랑(尚書都官員外郎) 조성(趙誠)이 이런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막힌 곳을 틔우고 파내어 공사를 80일 동안 한 후에 여울에서의 재해가 없어지니, 이때가 인종(仁宗) 황우(皇祐) 3년(1051)이었다. 대체로 인종 천성(天聖, 1023∼1032) 연간에는 강을 항행하는 것이 금지되고, 이때에 이르러 다시 통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울에서의 사고를 지금까지 다 없애지는 못했는데, 만약 12월과 정월에 물이 낮아져서 돌이 모두 드러나는 때를 이용하면 또한 함께 힘을 다해 날카로운 돌을 파내어서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울의 거주민에겐 파손된 배가 모두 이익이 되어 선판(船板)을 싸게 팔고 이곳에 머물면서 매매했으니, 반드시 이 공사를 어지럽히고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석공에게 금품을 주어서 돌을 제거하지 말라고 했다.
모름지기 이 일은 과단성을 가지고 반드시 행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 또 배가 훼손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짐을 실어서 그런 것이다. 마땅히 큰 글씨로 돌비석에 새겨서 역 앞에 설치해야 하니,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스스로 뉘우쳐 경계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마땅히 당국에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