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세기 러시아 드라마를 개척한 여성 극작가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테피’의 대표작. 나데즈다 테피는 은세기 러시아 극장에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왕성하게 활동하며 러시아 연극 개혁에 동참했던 작가다. 이름을 딴 향수와 초콜릿이 판매될 정도로 대중에게 사랑받았으며,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와 레닌,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케렌스키가 그녀의 열성 팬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학적 성과와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탈출해 파리로 망명한 이력 때문에 이후 러시아에서 빠르게 잊혔다. 1990년대 후반에야 러시아 내에서 테피와 같은 여성/망명 작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활발히 조명되고 있다.
테피의 작품은 ‘망명’, ‘이주민’, ‘난민’, ‘디아스포라’, ‘여성’이라는 다양한 키워드로 현재적 관점에서도 풍부한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은세기 다른 여성 작가들보다 특별한 평가를 받는다. <운명의 순간>은 테피의 첫 장막극이다. 영웅도 비열한도 아닌 사람들, 일상의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고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도망해 살아가는 러시아 망명자들의 삶을 묘사했다. 재치와 유머로 그려낸 망명지 러시아인들의 삶은 곧 테피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을 향한 테피의 시선은 이해와 연민, 공감으로 가득하다. 1937년 파리 ‘러시아 극장’에서, 이후 1944년 파리의 ‘러시아 드라마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장에서도 상연 요청이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한편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는 한 번도 출간된 적이 없다. 국립러사아문학예술 고문서자료관과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러시아동유럽예술문화 고문서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원고를 연구자 토마스 케이저와 잘츠만이 발굴, 정리해 2020년 학술잡지 ≪러시아 문학≫에 발표했다. 이 책은 이를 원전으로 삼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단행본으로는 세계 최초 출간이다.
200자평
은세기 러시아에서 ‘유머의 여왕’이라 불린 나데즈다 테피의 대표 희곡을 세계 최초로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혁명 전 러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망명 후 자국에서 빠르게 잊혔던 테피의 작품에는 망명, 난민, 디아스포라, 여성이라는 현재적 주제가 특유의 따뜻한 유머 안에 스며 있다.
지은이
나데즈다 테피(Надежда А. Лохвицкая, 1872∼1952)
20세기 초에 활동한 러시아 여성 작가이며, 시인, 극작가이자 저널리스트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유명한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귀족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세 아이 출산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고향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1900년부터다. 시인으로 데뷔했지만 데뷔 후에는 주로 짧은 단편과 펠리에톤을 신문에 게재하며 단편 작가이자 문예 기자로 활동했다. 본명은 나데즈다 알렉산드로브나 로흐비츠카야다. 1910년에 출간한 ≪유머 단편집≫이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책에서 테피는 누구에게나 친밀하고 공감이 되는 주제−사랑, 일, 예술, 돈, 종교 등−에 대해 단순하고 코믹하게 묘사했다. 다음 해인 1911년 ≪유머 단편집≫ 제2권이 발간된 뒤 성공을 굳힌 테피는 “러시아 유머의 여왕”으로 불리게 된다. 1917년 10월 혁명 전 테피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테피’라는 이름의 향수와 초콜릿이 판매될 정도였다. 그녀의 열성 팬 중에는 니콜라이 2세와 레닌,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케렌스키,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이반 부닌, 러시아 은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표도르 솔로구프도 있었다. 1922년에서 1923년 사이 잠시 독일에 머문 것을 제외하면 테피는 인생 후반부를 망명지 파리에서 보냈다. 테피는 파리와 베를린 망명지의 저명한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했고, 스톡홀름, 상하이, 프라하 등 다른 망명지에서도 새로운 작품집을 발간했다. 극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07년 단막극 <여성 문제>를 발표한 이래 네 편의 희곡집[≪여덟 편의 소품(Восемь миниатюр)≫(1915), ≪소품과 독백(Миниатюры и монологи)≫(1915), ≪악마의 손풍금(Шарманка сатаны)≫(1916), ≪희곡집(Пьесы)≫(1934)]을 발표했다. 1952년 10월 6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파리의 러시아인 묘지인 생주느비에브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강수경
부산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학사,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어문학부에서 러시아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부산대학교와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 관심 분야는 20세기 초 러시아 카바레와 미니어처 극장 및 오락 문화, 여성의 독서와 글쓰기, 소비에트 러시아 문학과 일상의 문화 등이다. 주요 논문에는 <러시아 카바레와 미니어처 극장의 기원과 탄생(1): 기원과 문화적 전사의 문제>, <18세기 말−19세기 초 러시아 여성 잡지와 여성 독자/작가의 탄생>, <테피 단막극의 창작과 의미: 희곡집 ≪여덟 편의 소품≫을 중심으로>, <M.A. 불가코프와 키예프 텍스트: <도시-키예프>, ≪백위군≫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결말을 대신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제미그다로프 : (사셴카를 알아본다.) 오, 오, 그녀가 왔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여인이. 정말 소박한 아가씨야. 정말 착한 아가씨지. 그녀는 파리뿐만 아니라 코끼리도 노엽게 하지 못할 사람이야. 자기 아이도 얼마나 사랑하는지.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 아니 자네 그 여자를 알아? 추천할 때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러더니.
제미그다로프 : 물론, 모르는 사이야. 그저 보고 듣기만 했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대답했고, 잠시 작별 인사를 했을 뿐, 전혀 모르는 사이야.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 뭐,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소개해 주지. 인사 안 할 이유가 없지. 그녀를 자네 자리로 초대해. 다만 기다려 봐, 그녀와 그렇게는 안 돼. 내가 먼저 그녀와 이야기하지. (부산을 떤다.) 자네는 저녁에 와. 내가 자네 자리를 맡아 두지. (제미그다로프가 나간다.)
-97-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