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는 스페인 현대 연극사에서 꼭 언급되는 중요 작가다. 스페인에서 연극인에게 수여되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로페데베가상’을 비롯해 국가연극상(1957, 1958, 1959), 마리아 롤란드상(1956, 1958, 1960), 레오폴도 카노상(1968, 1972, 1974, 1975)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어느 계단 이야기> 등이 한국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동명 회화를 모티프로 한 희곡이다. 벨라스케스와 <시녀들>에 얽힌 비화를 극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웅장한 스케일의 사극으로 완성했다. 벨라스케스는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펠리페 4세의 총애에 힘입어 그림 그리는 일 외에도 궁정 안내, 왕의 의상과 개인 집무실 관리 등을 맡아 했다. 최고 시종장인 식부장관에 임명되어 궁정의 모든 의전과 축제를 지휘하고 궁 장식을 위해 회화나 조각품을 제작 또는 구입하는 일을 가독했다. 한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특이한 구도로 흥미를 유발한다. 화폭 한가운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시녀들이 어린 공주의 시중을 들고 있다. 그 옆에 붓을 들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화가가 꽤 비중 있게 그려져 있다. 궁정을 드나들던 난쟁이들과 개도 등장한다. 반면 왕실 최고 권력자인 국왕 내외는 가운데 벽 거울 안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어 자세히 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신분 격차가 큰 인물들을 한 화폭에 담아낸 데다 화가 국왕 부부보다 화가 자신을 더 크게 그려 넣은 이 무례한 구도는 왕의 두터운 신임이 없었다면 감히 궁 안에 걸리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예술가 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반향과 재해석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에게도 연극적 상상력을 부어 주었다. 부에로 바예호는 벨라스케스 서거 300주년이 된 1960년에 <시녀들> 창작 당시 스페인 궁정을 배경으로 한 희곡 <시녀들>을 선보였다. 부에로 바예호는 역사적 기록을 사실적으로 극화하는 대신 그림의 모델들을 인물로 등장시켜 당시 있었을 법한 일, 허구의 사연을 무대화한다. ‘벨라스케스에 대한 판타지’라는 부제에서 보듯, 그 과정에서 화가는 역사 기록보다 이상화된 인간으로 묘사되었다.
부에로 바예호는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광활한 내면세계에 매료되어 벨라스케스에 대한 판타지를 구상했다. 다시 말해 희곡 ≪시녀들≫은 단순히 벨라스케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수없이 찾아가 골똘히 바라보며 흠뻑 빠져들었던 경이로운 그림과 그 화가에게 헌정하는 극작가 부에로의 사모곡이다.
200자평
20세기 스페인 연극사의 한 흐름을 주도한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가 벨라스케스 서거 300주년이 된 1960년에 발표한 희곡. 벨라스케스와 동명의 회화를 모티프로 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작가가 벨라스케스에게 바치는 사모곡이다.
지은이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Antonio Buero Vallejo, 1916∼2000)
상징적인 사실주의를 표방한 스페인 극작가. 어려서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다. 1934년에는 가족이 마드리드로 이주하자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미대에 해당하는 베야스 아르테스 학교(Escuela de Bellas Artes)에 진학했다. 하지만 내전이 터져서 인민전선 진영에 가담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정권을 잡은 반란군에 의해 공산당을 위해 싸웠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8개월이 지나 사형은 면하게 되었지만 이후 6년 반 동안 여기저기 감옥을 떠돌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감옥에서도 부에로는 동료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나름대로 미술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서는 붓 대신 펜을 들기로 하고 스스로 경험했거나 바라보고 성찰했던 인간의 고통과 불행, 희망의 주제들을 캔버스가 아닌 원고지에 펼쳐 나갔다. 미술에 대한 애정은 희곡에서도 이어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고야의 <이성이 잠들면> 같은 작품이 연극적 서사로 확장되었고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무대 위의 등장인물로 소환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에로는 20세기 스페인 현대 희곡에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던 매우 상징적인 작가다. 부에로는 연극이 재미있고 관객에게 교훈을 주거나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의 증인이 되기를 바랐다. 더 나아가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시대와 사회에 대해 질문하고, 인간의 보편적 실체와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 조명하기를 희망했다.
옮긴이
김재선
김재선은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La tortuga de Darwin)≫(2009), ≪영원한 평화(La paz perpetua)≫(2011), ≪하멜린(Hamelin)≫(2012), ≪천국으로 가는 길(Himmelweg)≫(2013), ≪맨 끝줄 소년(El chico de la última fila)≫(2014), ≪비평가/눈송이의 유언(El Crítico / Últimas palabras de Copito de Nieve )≫(2016),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Cartas de amor a Stalin)≫(2018), 라파엘 알베르티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낸 전쟁의 밤(Noche de guerra en el Museo del Prado)≫(2017), 알레한드로 카소나의 ≪봄에는 자살 금지(Prohibido suicidarse en primavera)≫(2019), ≪바다 위 일곱 번의 절규(Siete gritos en el mar)≫(2020), 이그나시오 아메스토이의 ≪마지막 만찬(La última cena)≫(2021)을 번역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부
제2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벨라스케스 : 음란한 그림에 대해 자네가 뭘 안다는 거지?
니에토 : 그 주제나 벌거벗음으로 인해 불순함이 작동할 수 있습니다.
벨라스케스 : 그렇다면 벌거벗은 모든 그림이나 조각들을 금지할 건가?
니에토 : 물론입니다.
벨라스케스 : 그렇다면 앞에서는 궁만 언급했는데 이제 교회를 말할 수밖에 없군요.
니에토 : (놀란다.) 무슨 뜻입니까?
벨라스케스 : 거룩한 우리 종교의 가장 위대한 형상이 남자의 벗은 몸이라는 걸 잊었습니까?
니에토 : (왕에게) 왕이시여, 불쌍히 여기소서! 전하, 돈 디에고가 이런 거룩한 것들을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 주옵소서!
벨라스케스 : (소리친다.) 전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그냥 이전 일을 말씀드린 겁니다, 전하. (사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교회들에 대해서 잊어버렸습니다.
-206-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