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고는 계산이라는 관점’의 효시
홉스는 인간을 자연체와 정치체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자연체로서의 인간은 수많은 세포들이 기계론적 인과법칙에 따라 하나의 통일체(single unity)를 이룬 것으로, 자기 보존 및 욕망의 실현과 확장을 그 목적으로 삼는 주체다. 이는 기계론적 인과법칙에 따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자연물의 일부다. 홉스에 따르면 각종 감각 기관의 반응이 신경망을 통해 두뇌에 전달되고, 두뇌는 인과적이고 기계적인 반응에 따라 전달된 정보를 처리해 신체가 외부 자극에 반응하도록 한다.
여기서 이성주의자들이나 유심론자들이 말하는 신체와 독립적인 영혼, 또는 순수한 정신의 작용은 없다. 인간 정신의 사고 능력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일종의 계산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홉스의 철학을 ‘사고는 계산이라는 관점(the computational view of thought)’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홉스가 인간의 정신 작용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격과 절대군주제
한편 정치체로서의 인간은 사회라는 인위적 구성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자적 존재다. 이 정치체로서의 인간을 개인의 고유한 권리와 사회적 책임의 주체로서 인격(persona)이라고 한다. 이때 인격은 자연 상태에서는 안전하게 향유할 수 없는 권리를 국가라는 사회로부터 보장받는 동시에 책임을 수반하는 사회적 존재다.
흔히 홉스가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사실이지만, 그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유럽 문화사에서 절대군주제가 적극적으로 옹호된 것은 교회 중심의 중세적 신분 세습제가 해체되고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한 시기의 과도기적 현상이다. 따라서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것은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군주의 권력을 지지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또 홉스는 군주의 절대적 권력도 평등한 개인의 자연권을 계약에 의해 위임받은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권력의 기반이 사회 구성원 개인의 자연권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사회 체제에 일방적으로 예속되었던 중세의 신민 개념과는 전혀 다른 근대적 인간 개념의 원형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론≫을 읽는 방법
토머스 홉스의 ≪인간론≫은 그의 철학 체계를 대표하는 3부작 ≪철학의 원리들≫ 중 하나로 ≪시민론≫, ≪물체론≫과 함께 구상되었다. 홉스의 인간 개념은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기계론적 인간관과 자연권을 갖는 근대적 개인관을 대변한다. 여전히 중세 유럽의 전체주의적 요소가 곳곳에 남아 있기 하지만,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근대적 개인의 모습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와 현재의 학문적 성과의 차이를 고려하면 홉스의 설명 중 일부는 조잡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홉스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맥락은 좁은 의미에서는 철학사나 과학사일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문화사일 수도 있다. 고전을 읽다 보면 다양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을 보게 된다. 기존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생각과 같다고 박수 치고, 다르다고 일방적으로 물리치기보다는, ‘왜 이런 사상들이 출현했지?’ 하고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읽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적으로 책을 읽는 방법 중 하나다.
이 책은 홉스의 ≪De Homine≫(1658)의 영역본 ≪On Man≫과 ≪De Cive≫(1642)의 영역본 ≪On Citizen≫(1651)을 합본으로 간행한 ≪Man and Citizen≫(translated by Charles, T. S. K. Scott-Craig, and Bernard Gert, The Anchor Books edition, 1972) 중에서 ≪On Man≫을 완역했다.
영역본은 원문의 1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을 생략했는데, 1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물학을 언급하고 있고, 2장부터 9장까지는 광학을 다루고 있어 인간에 대한 직접적 논의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영역본에 따라 이 책에서도 ≪On Man≫의 10∼15장을 번역했다.
200자평
토머스 홉스의 ≪인간론≫은 그의 철학 체계를 대표하는 3부작 ≪철학의 원리들≫ 중 하나다. 인간을 자연체와 정치체로 구분해서 설명한 홉스의 인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홉스는 인간의 정신 작용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며, 개인의 고유한 권리와 사회적 책임의 주체로서 인격 개념을 정초한다. 근대 유럽의 기계론적 인간관과 근대적 개인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지은이
토머스 홉스는 1588년 4월 5일 맘스베리 근처의 웨스트포트에서 하릴없이 도박이나 즐기던 무능한 목사 토머스 홉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영국 사람들은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침공한다는 소문 때문에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공포감에 짓눌려 홉스를 칠삭둥이로 조산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농담을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 농담은 외부의 공격 가능성에 언제나 대비해야 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안정과 평화를 위해 인간에게는 국가라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본 그의 인간관을 암시하기도 한다.
처절할 정도로 지독했던 가부장적 기독교 문화권에서 도박을 즐기다 가족마저 등진 무능한 아버지를 둔 홉스는 가난한 집안의 칠삭둥이였지만, 부유한 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열네 살의 나이에 옥스퍼드의 매그덜린 홀(Magdalen Hall)에서 5년간 공부하며 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체계에 대한 강의를 지겨워했다. 당시 지식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를 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학문 활동을 했듯이, 홉스도 캐번디시 가의 가정교사로 지내면서 그 집안의 후원으로 유럽 여행을 하며 폭넓은 학문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629년부터 1631년 사이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 기하학의 논증적 방법을 자기 학문의 주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1608년부터 1610년 사이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고 또 그 뒤로도 베이컨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했지만,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비난하는 것에 그쳤을 뿐 베이컨의 귀납의 방법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홉스가 기하학의 논증적 방법을 학문의 근본 방법으로 택했다고 하더라도 사실 문제에 관한 한 지식의 기원을 경험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인간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외부 대상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운동한다고 함으로써, 인간의 경우에 의식의 기원은 경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런 이유로 홉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많은 신학 용어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한다. 정신이라는 용어도 무의미할 수 있다고 하면서 미묘하고 유동적인 물체라고 새롭게 정의하기도 했다.
그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와 갈등을 빚었고, 보일의 실험주의를 비판했다. 또 보일의 진공 실험을 비난하며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기도 했는데, 이 일로 결국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절대군주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당시 영국에서 장기의회가 결성되자, 프랑스로 도피해 생활하기도 했다.
90세의 나이에도 저서를 출판할 만큼 만년에도 왕성한 학문 활동을 했다. 1679년 12월 초순, 대학을 졸업한 후 망명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의지했던 캐번디시 가의 한 저택에서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옮긴이
이준호는 동의대학교 철학과와 경북대학교 철학과 석사 과정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문학 박사)을 졸업했다. 서양근대철학회 부회장, 동아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데이비드 흄≫(살림출판사), ≪공학윤리≫(공저, 철학과현실사), ≪흄의 자연주의와 자아≫(박사 학위 논문, 울산대출판부) 등이 있고 역서로는 데이비드 흄의 ≪오성에 관하여≫(서광사), ≪정념에 관하여≫(서광사), ≪도덕에 관하여≫(서광사), 토머스 홉스의 ≪시민론≫(서광사) 등이 있다.
차례
헌사
X. 언어와 학문
XI. 욕구와 혐오, 만족과 불만 그리고 그 원인에 관해
XII. 정념, 또는 정신의 동요에 관해
XIII. 기질과 태도에 관해
XIV. 종교에 관해
XV. 인공 인간에 관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물을 욕망하고 회피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인 것이 많을 수밖에 없듯이, 우리에게 선인 것이 우리 적에게는 악이다. 따라서 선과 악은 욕망함과 회피함 등과 서로 관련이 있다. 공통의 선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 공통적으로 선한 것, 즉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거나 국가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때로는 건강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떤 것을 전적으로 선이라고 할 수 없다.(21∼22쪽)
더욱이 각자에게 가장 선한 것은 대부분 자기 보존이다. 자연은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욕망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량으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생명과 건강을 욕망하며, 나아가서 이것이 실현될 수 있는 한 미래의 안전을 욕망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반면에 (특히 고통을 수반한) 죽음은 모든 악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이지만, 삶의 고통이 극심하다면, 고통이 빠른 시일 내에 그칠 기미가 없는 한, 그 고통은 사람들이 좋은 것들 가운데서 죽음을 고려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24∼25쪽)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듯이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통해 포용과 자선에 대한 요구를 이해한다. 이런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의 명령을 기쁜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다.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늘 법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죄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66쪽)
실제로 현존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상업적 거래나 계약의 경우에 극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도 그와 같이 인위적인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인격 개념은 사회적 일에 유용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인격은 그 자신 고유의 것이든, 아니면 또 다른 한 사람의 것이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귀속되는 자다. 만일 그 자신 고유의 것이라면 그 인격은 자연적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의 것이라면 그것은 인공적인 것이다. 마치 동일한 배우가 상이한 시간에 상이한 인격을 연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많은 인격을 대표(represent)할 수 있다. 키케로는 “나는 나 자신의 것, 내 적의 것, 재판관의 것 등 세 개의 인격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한 사람의 키케로는 나에게 고려될 수 있고, 내 적에게 고려될 수 있고 재판관에게 고려될 수 있다.(87∼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