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송시를 대표하는 강서시파의 종주(宗主)
중국 고전 시사에서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송시의 특징을 가장 잘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황정견의 시사적 위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국 고전 시의 최고봉인 당시(唐詩)에 이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돌파가 필요한 상황에서 “송시의 특징을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당시와는 다른 학시(學詩) 전통의 수립자이기도 하다. 그의 시적 전범은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다. 도연명은 전원 은일자로서의 삶의 방식에서, 그리고 두보는 유가 이념과 함께 시어의 단련이라는 점에서, 황정견의 역사적 스승이다. 동시대 인물로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단연 소식(蘇軾)이며, 이외에 구양수(歐陽修), 매요신(梅堯臣), 왕안석(王安石)이 있다.
학시 전통의 수립
황정견의 시는 박학다식한 독서를 바탕으로 많은 전고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점은 송시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황정견 스스로도 학문과 독서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정밀함을 위주로 해야지, 박문에 힘을 써서는 안 된다며 독서의 질을 중시했다. 공부에 깊이가 없으면 번잡하게 되어 자신의 뜻을 다 피력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치밀한 시구의 단련으로 새로운 시의와 시어를 만들어 내고자 한 그의 창작 경향은 두보류의 만권의 독서를 중시했던 황정견의 시학적 연마의 도경이었다. 황정견의 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환골탈태론‘은 바로 독서를 통한 시의와 시어의 재창조를 겨냥한 말이다. 그의 ‘점철성금과 환골탈태’의 창작론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고인들의 문화유산을 이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전통 존중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전인의 학습이라는 학시론은 재능 우선의 문학적 경향을 보인 소식과 비교할 때, 노력을 통한 학습주의 시학을 주창했던 ‘강서시파 시학’에 직결되었다는 점에서도 송대 시학의 방형을 설정해 준 의미를 지닌다.
도학적 정서
송대 성리학은 내성적 성찰과 ‘세속에 거하면서도 탈속을 추구하는[俗中脫俗]’ 절제된 수양을 중시했다. 황정견 역시 이러한 자기 존중의 도학자적 정서와 함께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해 나간 사람이다. 그의 시에는 자기 절제적이며 내적 정신의 엄격을 추구하는 ‘수경(瘦勁)’한 기풍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내적으로 굳센 도학자적 면모가 시에 투영된 결과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중시는 문학에도 투영되었으며, 위진 현학 이후 점차 심미적 규범으로 자리해 송대에는 일반화되었다. 황정견은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이상적 세계를 향한 자기 존중의 정신이 강했으며, 이를 작품화하고자 했다. 이 점은 송대 성리학의 이상적 선비형으로서의 탈속주의와 잘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관조적 형상미
이러한 내면 관조 의식은 형상 심미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송대 지식인의 교양으로 자리 잡은 선학은 시와 연결되어 풍부한 내성적 관조의 세계를 심화 확장해 나갔으며, 황정견은 선시에서 깨달음의 중요성을 자주 드러냈다. 황정견 시학의 중심 주장인 학시의 관념, 도학자적 정서와 문인 의식, 관조적 형상미, 구양수 이래의 산문화한 고시의 지향 등은 감성미 넘치는 당시적 세계와 구별되는 사변 형상을 지향하는 송시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더욱이 강서시파 시인들이 그 창작 방식을 시법화해 일세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황정견의 시가 미학은 감성 심미로부터 사변적 이성 심미의 세계로 전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방향성을 보여 주었다.
점철성금론
황정견 시학의 정신적 지향이 내적 성찰과 자기 존중의 도학자적 수양 위에서 전인의 창작물을 학습하고, 사물의 핵심을 오입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기류의 새로운 방식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라면, 문학 면에서는 시의 구체적 창작 문제로 귀결한다. 황정견 시학의 정화는 시어, 시구, 율격의 단련에 있다. 황정견은 진부한 말이라 하더라도 전인들의 유산을 물려받아 작품 속 상황에 맞추어 정련해 낼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점철성금, 즉 철과 돌에서 정금과 미옥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이치라 했다. 남의 시의를 그대로 빌려다 표현(시어)을 바꾸어 쓰는 방식이 ‘환골’법이고, 남의 시의에서 힌트를 얻어서 그 뜻을 확대 변용해 사용하는 방식을 ‘탈태’법이라 할 수 있는데, 즉 환골법은 시의 표현을 변용(變用)하는 것이고, 후자는 시의(詩意)를 심화하는 것이다. 황정견은 다양한 시어와 구법의 강구를 통해 구양수 이래 선배 시인들이 시대와 교감하며 만들어 나아간 송대적 창작 방식을 가장 착실하고도 성과 있게 자리매김하며 구현한 송대 시인의 최고 전형이 될 수 있었다. 중국 시사의 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황정견은, 시대 변화의 중심 부위에서 변화의 바람을 맞는 가운데 송대 사인(士人)의 전형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자평
송나라의 대표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시 36수와 사(詞) 12수를 엄선해 소개한다. 황정견은 시를 짓는 데 독서와 학문을 중시하고 성리학과 선학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했으며, 시어를 부단히 연마해, 서정적이고 운율 중심인 당시(唐詩)와는 달리, 철리(哲理)적이고 사변적인 송시(宋詩)의 기틀을 정립했고,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원조가 되었다. 오태석 교수의 상세하고도 전문적인 해설과 주석은 다소 난해할 수 있는 황정견의 작품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송대 중국 문학의 거대한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송대 문학 연표도 부록으로 수록했다.
지은이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북송 건립 85년 후인 인종 경력 5년 홍주부(洪州府) 분녕현[分寧縣, 현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슈수현(修水縣)] 수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및 형제들은 진사에 오르기도 했고 또 북송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운동가인 구양수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또 부친 황서(黃庶)는 두보를 존경해 그 영향이 황정견에도 이어졌지만, 황정견이 열네 살 때 작고했다. 이후 가세가 기울자 그는 명망가인 큰 외삼촌 이상(李常)에게 의탁했다. 이후 구파의 손각(孫覺)의 딸과 결혼했으나 9년 만에 사별했고, 북경국자감교수(國子監敎授)로 있던 1072년 다시 사경초(謝景初)의 딸과 재혼했지만 역시 7년 후 사별했다. 두 번째 장인 사경초는 양주통판과 둔전랑을 지낸 관리여서 황정견은 그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1064년 19세에 황정견은 중앙 정부의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한 번 낙방했다. 그리고 1067년 23세에 예부시에 다시 응시해 삼갑 진사제에 급제하고, 하남성 여주(汝州) 섭현위(葉縣尉)를 필두로 관직에 나섰다. 신종 희녕 5년(1072, 28세)에는 학관 고시에 합격해 국가의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교수가 되었고, 북경에 있을 때인 원풍 원년(1078, 34세) 구파의 천재적 문인인 소식과 교유를 시작하면서 그와 줄곧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을 뿐 아니라, 소문 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북송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080년 황정견의 정치적 후견인인 소식은 왕안석 신법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왕안석 신파에 의해 ‘오대시안(烏臺詩案)’의 문자옥에 걸려 호북성 황주(黃州)로 유배를 갔고, 황정견 역시 길주 태화현(현 장시성 타이허)의 지사로 좌천되었다. 임지로 가는 도중 안휘성 서주 삼조산 산곡사(山谷寺) 석우동(石牛洞)의 경치에 반해 ‘산곡도인(山谷道人)’이라고 자호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구파인 소식의 입각으로 이상, 손각, 소철(蘇轍), 황정견, 조보지(晁補之), 장뇌(張耒), 진관(秦觀) 등이 수도 개봉(開封)에서 관리 생활을 하게 되었다. 황정견은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1085, 41세), 신종실록검토관(神宗實錄檢討官), 집현교리(集賢校理)(1086), 저작좌랑(著作佐郞)(1087)을 지내며 1091년까지 원우 연간에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이후 1093년 소식은 다시 좌천되어 광동성 혜주(惠州), 해남도(海南島) 등 장기 유배의 길을 걷게 되었고, 황정견 역시 사천성 검주(黔州)까지 쫓겨났다.
황정견은 1101년의 소식의 사후 정치적 박해 속에 유배를 다니다가, 1104년 봄에는 동정호를 지나 곳곳을 거쳐 여름에 의주(宜州)에 도착했고, 이듬해인 숭녕(崇寧) 4년(1105) 9월 30일 61세를 일기로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 역시 동시대의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의 신법을 둘러싼 치열한 당쟁 속에서 풍랑을 겪어야만 했던 쉽지 않은 삶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신의 내면을 기록한 시사(詩詞)와 산문과 서예를 역사 속에 남겨 놓았다.
옮긴이
오태석(吳台錫)은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타이완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방문학자(1989), University of Washington Visiting Scholar(1999), 중국 저장대학교 방문학자(2009), 제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방문학자(2016)를 역임했다.
교육 이력은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동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과대학장, 중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다. 연구 활동으로는 한국이론문학회 회장, 한국중국어문학회 회장, 중국어문학회 회장, 한국중국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2016년 인문 기반 융합 연구를 지향하는 한국동아시아과학철학회를 창설해 회장으로 있다.
저서는 《황정견 시 연구》(1991), 《중국 문학의 인식과 지평》(2001), 《중국 시의 문예 심미적 지형》(2014), 《노장 선역, 동아시아 근원 사유》(2017), 《시공간의 인문학》(2020)이 있으며, 교육부 우수 성과에서 총 3회(2012, 2015, 2020) 장관 표창을 받았다.
차례
황정견 시(詩)
절벽 아래서 시를 풀어내다
청명
바둑 2수를 임공점(任公漸)께 드리며 제2수
유민(流民)의 탄식
고시 2수를 소자첨께 드리며 제2수
막걸리 제1수
고양이를 구하며
지구(池口)에서 비바람으로 사흘을 머물며
낙성사(落星寺)에 제해 제3수
새소리에 화답해
원명 형이 자유에게 차운한 시에 대해, 나 역시 차운해 자유께 보내 드리다
쾌각에 올라
영신(永新)현령이 석이버섯을 보내온 데 답해
연아(演雅)
황기복에게 보내다
왕형공의 〈제서태일궁벽〉 시에 차운해 제1수
전목보의 〈영성성모필〉 시에 화답해
소자첨(소식)의 시구는 일세를 풍미하는 훌륭한 시다. 그런데 〈송양맹용(送揚孟容)〉 시는 황정견의 시체를 흉내 내어 지었다고들 말한다. 이는 자첨이 마치 한퇴지(한유)가 맹교나 번종사(樊宗師)를 본떠 희작(戱作)한 것과 같으니, 문자 놀이를 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후생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를까 걱정해 차운한다. 자첨의 〈송양맹용(送揚孟容)〉 시 “우리 집은 아미산, 그대와 같은 지방(我家峨眉山, 與子同一邦)”에 차운하며
쌍정(雙井)의 차를 자첨에게 보내며
공의보(孔毅父)에게 재미 삼아 지어 보내다
자첨이 〈동생 자유의 〈한간의 그림을 보고〉 시에 화답한 시〉에, 다시 차운해 이백시(李伯時)의 〈천마도(天馬圖)〉 그림을 논하는 시를 쓰다
정방(鄭防)의 화집(畵集)에 제1수
자첨의 〈곽희의 추산도(秋山圖)〉 시에 차운해
대나무, 바위, 목우(牧牛)
자첨이 홍대를 왕선의에게 보낸 시에 차운하다
자첨의 〈고목(枯木)〉 시를 화두로
심명각(深明閣)
황빈로(黃斌老)의 ‘병상에서 일어나 혼자 동쪽 뜰을 거닐다’ 시에 차운하며
석칠삼(石七三)에게 차운하며 제6수
개미와 나비 그림
소동파의 〈이량공(李亮功) 귀래도(歸來圖)〉의 제시에 추화(追和)하며
고자면(高子勉)에게
자첨의 화도시(和陶詩)에 발(跋)하며
비바람에 악양루에 올라 군산을 바라보며
마애비문을 보고서
의양(宜陽)에서 원명(元明) 형과 작별하며 ‘상(傷)’ 운으로 쓰다
황정견 사(詞)
청평악·봄은 어디로 갔나
남가자
망강동
완랑귀
정풍파
염노교
자고천
소충정
목란화령
수조가두·유람
청옥안
남향자
해설
송대 문학 연표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유민(流民)의 탄식
북방엔 근년 비다운 비 내리지 않아
오곡은 결실 없고 세월만 허송했다
요즘은 한밤에 지진 일어나
대지를 받쳐 주는 큰 자라 삼산(三山)을 다시 받치려고 떠다니네
담벼락 무너지고 기둥 부러져 노약자 깔리고
원성이 가라앉기도 전에 홍수가 연이었다
땅 갈라지고 물 솟구쳐
열 집 중 팔구 호는 물에 떠내려갔지
듣기에 전연(澶淵)에는 강 건너는 이 하루에 수만이나 되어
하북에 빈 고을 얼만지 알 수가 없을 정도라지
양성과 섭현에는 봇짐 행렬 줄을 잇고
거처는 없고 경작할 소도 구하지 못해
먼저 온 이들 그래도 황무지나마 얻었지만
아! 뒤에 온 이는 무얼 의지할까?
자사(刺史)와 수령(守令)은 진정으로 힘써 백성과 함께 근심을 나누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 부모와 같이 애달파한다
조정에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명재상을 썼다는데
언제나 직접 눈으로 민생을 살필까?
치수의 대계획은 쉬이 정할 일이 아니지만
시중에 떠도는 말은 없는 호랑이도 만들지
계속되는 재해란 애당초 예고가 없는 것
요임금의 수재나 탕왕의 가뭄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
제나라 환공(桓公)의 질병은 처음엔 증세가 없었지만
편작(扁鵲)이 진(秦)으로 떠나간 뒤의 치료는 이미 때늦었다
한 움큼의 아교로 황하가 맑아지길 기다리려나?
한 소쿠리 음식으로 백성 어찌 먹일거나?
그래도 아직은 이 봄을 넘겨야 하니
주공의 구황(救荒) 십이책을 강구해야 하리
많은 선비들 책략 기기묘묘한 이때에
노생의 비법을 한번 들어 보시게!
流民歎
朔方頻年無好雨, 五種不入虛春秋.
邇來后土中夜震, 有似巨鰲復載三山游.
傾牆摧棟壓老弱, 寃聲未定隨洪流.
地文劃劙水觱沸, 十戶八九生魚頭.
稍聞澶淵渡河日數萬, 河北不知虛幾州.
累累襁負襄葉間, 間舍無所耕無牛.
初來猶自得曠土, 嗟爾後至將何怙.
刺史守令眞分憂, 明詔哀痛如父母.
廟堂已用伊呂徒, 何時眼前見安堵.
疏遠之謀未易陳, 市上三言或成虎.
禍災流行固無時, 堯湯水旱人不知.
桓侯之疾初無證, 扁鵲入秦始治病.
投膠盈掬俟河淸, 一簞豈能續民命.
雖然猶願及此春, 略講周公十二政.
風生群口方出奇, 老生常談幸聽之.
황기복에게 보내다
나는 북해에 살고, 그대는 남해에
기러기 편지 전하려 해도 방도가 없네
복사꽃 춘풍에, 한 잔의 술
강호의 밤비에, 십 년의 등
집에는 오직 네 벽만 있어
간난을 고침에는 세 번이나 팔뚝을 부러뜨리지 않아도 되지
생각하니 학문에 머리는 하얗게 세었겠지
강 건너 원숭이 울음소리에 남방의 장독 피어나는 등나무 숲
寄黃幾復
我居北海君南海, 寄雁傳書謝不能.
桃李春風一杯酒, 江湖夜雨十年燈.
持家但有四立壁, 治病不蘄三折肱.
想得讀書頭已白, 隔溪猿哭瘴煙藤.
왕형공의 〈제서태일궁벽〉 시에 차운해 제1수
바람 급해 까마귀 울음 그치지 않고
비 내리는데 개미들 싸움 한창이네
진정한 옳고 그름이란 어디에 있나
인간사 북쪽에서 보면 남쪽인 것을!
次韻王荊公〈題西太一宮壁〉 其一
風急啼鳥未了 雨來戰蟻方酣
眞是眞非安在 人間北看成南